Sunday, January 4, 2015

“바울의 진면목(眞面目)” (고린도후서 10:7-11)

         “바울의 진면목(眞面目)” (고린도후서 10:7-11)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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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흔히 그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함은 그 사람의 생김새뿐 아니라 그의 외적 조건--인물, 학벌, 집안, 배경, 연령, 성별, 인종 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외모가 괜찮으면 그의 속과는 상관없이 후한 점수를 주고, 외모가 미달되면 박한 점수를 줍니다. 여기에서 편견이 생기고 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 제나라에 안자(晏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작고 인물도 매우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자의 슬기로움과 당당함을 잘 알고 있던 제나라 왕은 그에게 초나라의 사신으로 갈 것을 당부합니다. 이에 안자는 초나라로 떠납니다. 안자가 초나라의 왕궁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졸들과 왕실 관리들은 그의 볼품없는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해댑니다. “제나라에 인물이 오죽이나 없으면 저렇게 작고 못난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단 말이냐?” 군졸들은 이에 지나쳐서 제나라의 사신인 안자에게 대궐 정문이 아닌 작은 쪽문으로 인도하고는 이곳을 통해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자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말합니다. “이 나라는 개나라인가? 아니면 초나라인가? 나는 초나라에 왔지 개나라에 오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에 여기가 개나라라면 나는 할 수 없이 이 개구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나 나는 초나라에 왔다.” 그의 당당함에 당황한 군졸들과 관리들은 황급히 그를 정문으로 정중하게 안내합니다. 안자는 굿굿하게 대궐 정문을 통하여 들어가 초나라 왕을 만나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안자춘추(晏子春秋)》
공자(孔子)는 그 당시 안자(晏子)보다 삼십 세 가량 나이가 위였으나 그를 높이 평하면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생(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이)을 두려워할 만 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논어(論語)》「자한(子罕)편」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그의 군사(軍師)로 얻은 인물이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제갈량 공명이요 다른 한 사람은 방통이라고도 하는 봉추입니다. 이들을 얻기 전에 유비가 만났던 수경선생은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으리라’고 두 사람의 출중한 인물됨을 평하였습니다. 유비는 그 뛰어난 인물 두 사람을 모두 얻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면서까지 얻은 재갈공명은 과연 그 외모부터 준수하고 수려하여 그의 수고가 보람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대면(對面)한 방통의 외모는 일찍이 들은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매우 못생기고 꾀죄죄하게 보여서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는 수경선생의 인물평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방통을 홀대하여 뇌양현(耒陽縣)이라고 하는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삼습니다. 그것도 크게 호의를 베푼 것처럼 그렇게 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부재중이던 재갈량의 강력한 추천으로 그를 부군사(副軍師)로 불러들입니다. 유비의 방통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그의 제안은 어쩐지 재갈량의 제안보다 못한 것 같고 미덥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에 봉추는 이러한 편견 속에 자기의 역량을 십분발휘하지 못하다가 그의 운명을 낙봉파라고 하는 한 고개에서 마감합니다. 그의 명이 거기에서 다할 것임을 그가 알았지만 오기(傲氣)로 낙봉파를 넘다가 죽는 신세가 됩니다.
유비가 덕이 많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방통을 외모로 평가한 그의 오류가 재갈량과 방통을 양손에 얻고도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 요인이 됩니다. 방통의 실수는 자기를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기를 부렸기에 종국에 그의 능력의 결실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불순종하는 사울에게서 떠났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서 사울을 이을 이스라엘의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냅니다(삼상 16:1-13).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그곳 장로들과 함께 암송아지를 잡고 제사를 베풀고 그 자리에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청합니다. 그가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아비나답을 보니 그 용모가 수려하여 속으로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짐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 이새의 아들이 일곱 명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왕을 택하지 않으시고, 양을 지키느라고 그 자리에 없었던 여덟째 아들 다윗을 불러오게 하시고 아직 소년이던 그에게 기름부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영화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빼어난 용모를 갖고 계시나 그 또한 외모를 중시여기는 우리 인간들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하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서술은 우리들의 예감에 반합니다.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3-5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외모가 변변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외경 바울행전(Acts of Paul, 3)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두 눈썹은 일자이고, 코는 갈고리 모양으로 휘었고, 두 다리는 안장다리입니다. 게다가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눈꼽이 자주 낍니다. 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행전 17:18 참조) 그렇게 설득력이 강하다거나 힘이 있지는 못한 듯 합니다(고후 11:8 참조). 바울을 뒤이어 웅변가였던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얼마동안 사역하였던 터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대조는 더욱 뚜렸합니다. 바울의 당시 나이가 예순을 전후한 때이라 육체적으로도 쇠약합니다. 그의 외적 조건은 반대자들이 선동하는 대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삼으신 것은 외모를 보신 까닭이 아니라 그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열정과 순종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도의 권위는 반대자들의 부추김대로 외적인 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도로 세우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되어진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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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육체 안에서 육체의 모양을 보며 육체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중심을 보아 사람을 살피는 대신에 겉에 나타난 외모와 그 사람의 말을 갖고 사람을 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사는 큰 오류요 편견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단은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러한 외양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여전히 외모만 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는 그를 비방할 때 외모만 변변치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사람들의 방법대로 교인들을 속이기까지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모금이 더디고 지체되는 이유들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반대자들이 ‘너희들이 모금하는 돈은 결국 바울과 그 일행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인데 바울이 너희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속이고 있다’고 그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을 외모로 평가한 반대자들은 바울이 크리스천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사욕이 많고 추잡한 협잡군처럼 매도(罵倒)되어졌습니다.

바울은 반대자들과 이에 현혹되어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강한 말로서 징책하는 대신에 그들의 이성에 호소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위한 열심이 있느냐?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인 줄로 믿어달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의 정상적인 판단이 됩니다.
 
8절에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입니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는 반대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무리로 인하여서 그 마음에 번민함이 참으로 컸습니다. 하기에 때로는 편지로서 때로는 대면함으로서 그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합니다(고전 4:21, 고후 13:2 참고). 그러나 이와 같은 강한 어조의 편지조차도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무너뜨려 내리려는 의도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을 잘못에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그저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세우려는 나의 의도를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씀합니다. 나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고통과 번민 중에 있는 내 속을 들여다보시더라도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목회자의 심정이 때로는 분한 마음이 들고 때로는 야속하더라도 그 반대자를 무너뜨려 내리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비방이 정도를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무너뜨려 내리시는 예를 가끔 보지만, 목회자는 짐짓 분내며 짐짓 야단치나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맡기신 일은 하나님께서 의탁하신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커다란 교회에서 최근에 십여 명의 장로들을 무더기로 징계하여 교회에서 내어 몰았습니다. 출교(出校)당한 장로들이 커다란 잘못이 있었는지 속사정이야 밖에서 듣는 사람은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문지상에 밝혀진 장로들의 교회에 대한 요구는, 담임목사의 아들이 스포츠신문사를 운영하는 자금 중에 상당부분이 교회의 성도들이 헌금한 것 중에 일부인 것이 확실한 데 이를 해명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담임목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신본주의를 앞세워 그들을 인본주의자로 몰아서 출교처분을 내린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전혀 헌금을 임의로 유용한 적이 없고, 그 장로님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징계는 극단의 것이 되지 말아야 했음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9절에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를 대면할 때 볼 수 있는 그의 약한 모습은--그리스도와 온유와 관용이 나타난--볼 수 없기에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우리를 매로 대하겠다고 했는데, 그냥 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더욱이 그의 편지들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옳고 그에 대한 반박을 제기할 수가 없는데 하고 두렵고 놀라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레 겁을 먹는 사람들을 위하여 바울은 그의 강하고 힘이 있는 편지가 그들을 놀라게 하고 위축 들게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썼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강하게 선포할 때 교인들을 겁주고 넘어뜨리는 설교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도 사실은 성도를 넘어뜨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고자 함임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알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미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가들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의 설교의 중심 테마는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이었습니다.
그는 웅변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설교원고를 읽어내려갈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중하고 담대하기에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임박한 것같이 느껴져서 그 자리에서 생생한 두려움에 감싸이게 되어 눈물을 흘리거나 의자나 기둥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 교인들에게 불신임 결의를 받고(세례 받는 자들의 공개적 신앙고백 문제) 외할아버지(Solomon Stoddard)의 뒤를 이어서 23년 목회하였던(1727-1750년: 2년은 부목사로, 21년은 담임목사로) 노쓰햄톤(Northhampton) 교회를 떠나게 되고 스탁브리지(Stockbridge) 인디안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여러 편의 신학논문들을 발표합니다. 그의 논문들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는 뉴저지 칼리지(New Jersey College, 후에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로 학교명이 변경됨)의 총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비록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명한 총장이 되었지만).

교인들의 불신임을 받고 그가 사랑하던 교회를 떠나게 된 조나단 에드워즈였지만, 강하게 설교한 그가 바란 것은 교인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이것이 바른 목회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10절에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바울”은 반대자들의 바울을 향한 비난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10절이 그들의 비난입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반대자들의 비방이지 실제로는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함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써 사도행전 14장 12절에 기록된 대로 루스드라 지방의 전도 때 그곳 사람들을 바울을 변론의 신인 허메(Hermes)라고 부른 것을 듭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을 조리있고 웅변적으로 잘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반대자들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실제로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봐와 같이 그가 하찮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말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1절 후반부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기 때문에 바울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그의 모습이 약하고, 하찮고, 말이 시원치 않은 듯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떠나 있을 때 강하고 담대한 글로써 그들을 나무라고 경고하는 것이 그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파하려고 그렇게 담대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바울이 사랑의 마음으로 쓴 것임을 알 때, 대면할 때에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도 바울이 우유부단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주장할 바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용납하고 세우기 위한 까닭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대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모자라서, 아무 것도 모르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 아이를 향하여서 표정을 바꾸면서 야단친다고 해서, 매를 들고 심하게 때리기까지 한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사랑과 긍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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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사도로써, 목회자로써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도로써 바울에게 그를 인간의 주장과 생각과 이론으로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징계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한은 그의 외모에서, 외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를 사도 삼으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도로서의 권한을 성도들(반대자들을 포함하여)을 넘어뜨리는 데 사용하기를 원치 아니하며 하나님 앞에 바르고 순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역설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목회자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되, 잘못되어 있는 교인에 대한 강한 어조조차도 자기의 감정을 쏟아 부어서 그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리스도의 긍휼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와 반목하거나 그의 강한 권고에 섭섭해하거나 등을 돌릴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심중을 헤아려서 더욱 믿고 의지하며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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