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다운 연보” (고후 9:1-5)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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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예물 드림은 창세기 4장의 아벨과 가인의 예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기록 중에 ‘첫’ 자가 중요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처음 소산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요 구분된 것입니다. 그 예물 드림에 구분이 있고, 마음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과 예물 드린 사람을 기뻐 받으십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 한 장로님이 계신데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일주일 수입 중에 매주일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서 매일 소득 중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장사가 다 끝나는 토요일에 떼어놓은 십일조 몫의 현금을 은행으로 갖고 가서 새 돈으로 바꿉니다. 은행에 새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든지 미처 은행에 갈 시간이 없는 때면 집에서 다리미로 돈을 정성스럽게 다린 다음 봉투에 잘 준비하여서 주일 제단에 바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장로님의 행동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합니다. “장로님, 새 돈이나 헌 돈이나 어차피 은행으로 들어가면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하세요?” 장로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것으로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것은 ‘교회’라고 하는 비인격체 혹은 비영리단체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과 준비로 헌금을 드리는가에서도 믿음의 있고 없음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매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2
8장에 이어서 9장에서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 드림에 대하여 말씀을 계속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받는 일’, ‘생기는 일’이지 ‘주는 일’이나 ‘드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지루하고 싫증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장장 두 장에 걸쳐서 ‘주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는 일’, ‘드리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받는 축복’, ‘생기는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없나니”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연보하는 일에 대하여 새삼 언급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바울이 먼저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16장(1-4절)에서 당부한 바요, 고린도 교인들도 일 년 전부터 행하기를 시작한 때문입니다(고후 8:10). 따라서 더 이상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얼마를 모금해야 하는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절에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에 호소합니다.
8장 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원함이 있었기에 모금하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색함이 그들의 원함을 방해합니다.
모금하는 일에 지지부진한 또 다른 요인은 아마도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으로 인한 바울과의 관계의 악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담임목사님과 사이가 좋을 때에는 제대로 드리던 헌금인데, 사이가 나빠지면 눈에 띄게 헌금이 줄어듦을 봅니다. 이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나의 예물 드림은 담임목사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분하여서 나의 속마음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의 헌물 드림의 양태(樣態)에 비추어 볼 때, 일 년이나 지났어도 애초에 작정한 모금을 완성하지 못한 고린도 교인들의 인색함과 지지부진의 결정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인 “열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일 년 전부터 모금의 일로 준비하였다고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 자랑하니까 그들도 자극을 받아 동참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일에 지역 교회들끼리, 혹은 같은 교회의 교인들끼리 서로 자극을 받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사업이 확장되어질 수만 있다면, 이러한 선의의 경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들끼리는 목회정보를 교환하는데, 교인들은 기존의 안일한 신앙상태를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따라서, 저는 가끔 여러분에게 이웃 교회를 방문하여 그 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나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떤 예배와 모임을 갖고 있고, 어떤 열심으로 어떤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자극시키고 격동하여서 더 근면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면 유익한 것입니다.
“격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씨조(ἐρεθίζω)는 ‘어떤 사람의 어떤 일로 자극을 받아 분한 마음이 듦’을 의미하는데 이를 선하게 승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감당하고자 할 때 이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들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선한 경쟁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많이 냄은 하나님의 재정을 풍요롭게 하니 좋은 것이요, 십일조를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업이 번창하여짐을 의미하니까 이 사람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자 만들어 달라’는 기도는 안 들어주셔도, ‘나로 하나님의 곳간을 풍성하게 채우는 데 으뜸가는 사람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들어주십니다. 동일한 목적을 위한 기도이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기도’가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3절에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형제들”이란 8장 16-24절에 언급한 디도와 다른 신뢰할 만한 두 사람입니다. 그들을 보내기에 앞서서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과 주의 일을 사모함에 관하여 자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가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하여 불평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평과 다툼은 내부적인 문제이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는 교회와 교인들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전도를 하는 사람이, “우리 교회는 목사님을 비롯하여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목사님은 너무 고집스럽고, 교인들은 사랑이 없고 다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한 번 와 보실래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전하는 말을 듣고 그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렇다고 없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단점들이 있는가 하면 장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드물더라도) 장점들을 찾아내어 자랑하고자 할 때, 여기에 교우들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장점들을 자랑하였으니 그가 자랑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말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바울을 함께 비난하고 그의 가르침을 폄하하였었는데 바울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해서, 바울이 당부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일 년 전에 그리 하겠노라 약속한 대로 연보를 준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을 작정한 것을 하나님과 한 약속으로 여기고 이 일에 전력을 다했더라면 가장 좋았을 것이지만, 뒤늦게라도 그들의 주님의 일 사모함과 열심이 자극을 받은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4절에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디도 일행을 미리 파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보냄으로 모금하는 일을 격려하고 잘 관리하게 하기 위함이요, 두 번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미리(이미 일 년이 지나긴 하였지만) 모금의 일(여기서는 모금의 완성)을 준비시켜서 나중에 바울이 마게도냐사람들 몇 명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갈 때 아직도 모금이 완성되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예루살렘 성도를 구제함에 커다란 차질을 빚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고린도 교인들에 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자랑이 헛되고 거짓뿐인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물론 바울 자신도 사도의 직분에 손상이 가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5절에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성도를 돕기로 작정하였을 때 그 금액도 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를 작정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도록 약속한 것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람은 이제라도 연보를 잘 준비함으로써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고 기쁨을 얻고자 함입니다. 지난 일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기준으로 바울과 마게도냐인들 중에 몇 명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기 전에 그들이 일 년 전에 약속한 바를 미리 완료함으로써 이제라도 참 연보다운 연보를 하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소득이 있을 때, 먼저 자기의 쓸 곳을 생각하고 뗀 다음에 남는 것이 있으면 남은 것중에 얼마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소득의 십분의 일(혹은 그 이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떼어놓고 남은 것으로 자기의 쓸 곳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하나님의 축복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만일 자녀가 아버지 어머니가 수저를 드시기 전에 맛있는 것을 먼저 골라 먹으면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자녀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인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분하고 드림이 축복의 비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연보라고 번역한 헬라어 ‘율로기아’(εὐλογία)는 축복(blessing), 선물(gif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으로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것이요, 또한 미리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함이 하나님의 더욱 커다란 축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를 돕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연보가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매 주일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물을 미리 준비함이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받는 비결임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3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에 관하여 대화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물드릴 때,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전들을 하늘 높이 던집니다. 동전들 중에 동그라미 안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드리고 동그라미밖에 떨어진 것은 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술 더 떠서 자기의 예물을 정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나는 동전들을 하늘을 향하여 높이 던집니다. 그 중에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고 땅에 떨어진 동전들은 나의 몫인 줄 알고 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 받기는 원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인색하지 않습니까?
말라기서에서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제물이 무엇입니까?
병든 것, 눈먼 것과 저는 것--사람들에게 찌꺼기 취급받는 것, 거룩하게 미리 구별되어지지 않은 예물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주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먹다 남은 찌꺼기 음식을 줄 때, 자기가 입다가 싫증나거나 흠이 있는 의복을 주면, 제 딴에는 좋은 일을 한 것 같으나 욕먹을 일만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구분되고 마음이 담겨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대함에 소홀함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예물 드림은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요, 비영리단체에게 바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하심에 자신의 가장 귀한 마음과 구분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과 이 세상 살 동안에도 공급하여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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