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4, 2015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고린도후서 10:1-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고린도후서 10:1-6)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强力)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1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라는 책에서 그가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시절로부터, 혹은 그의 머리 속에 막연하게 떠올리던 그가 ‘알고 있던 예수님’은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미스터 로저스(Mr. Rogers)처럼 늘 친절하고 위안이 되며 날카로운 면이라고는 전혀 없는, 항상 유순하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러한 분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그는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예수님과는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어린아이들을 향하여서 팔을 내미시고 잔잔한 미소를 띄고 계신 예수님,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한없는 연민의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서 준엄하게 노를 발하시는 예수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시며 방금 전에 그의 믿음의 고백을 칭찬하신 베드로를 향하여 얼굴 표정을 바꾸시며 나무라시는 예수님;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그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심한 진노로 꾸짖으시는 예수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며 피땀을 흘리시고 번민하시며 세 번씩이나 기도하시는 예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상에서 울부짖으시는 예수님 등등--이러한 장면들은 우리가 이제까지 마음속에 그리던 부드럽고 자애하시며 잔잔한 미소를 띄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기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간과하고 지나가던 예수님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예수님의 모습들이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삶입니다. 어떤 것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늘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그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지 않기로 작정한’ 예수님의 모습들을 쉽게 담을 수 없음이 문제입니다. ‘나의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셔야 돼’라고 하며 자기의 생각에 합당한 예수님을 만들어 놓은 사람은 또한 ‘목회자는 이래야돼.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 자기의 생각과 이론대로 목회자상을 그려 놓고 목회자가 자기의 생각과 주장에 반할 때 서슴지 않고 그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장로님은 아들들의 진로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큰 애는 학교성적도 좋고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도 할 정도로 언변이 좋으니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법과대학원(Law School)에 진학시켜서 변호사(lawyer)가 되게 하여야겠다고 하고, 대학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공부는 썩 잘하는데 내성적이니 의과대학원(Medical School)을 보내어 의사(medical doctor)가 되게 하여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셋째는 형들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가 없으니 신학교에나 보내서 목사나 시켜야겠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장로님, 예배나 보죠“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됨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림은 귀한 일이겠느냐는 풍자(諷刺)입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믿음이 좋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공부를 잘하여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진학하고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아버지 장로님께 전화를 걸어 자기의 뜻을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칭찬해줄 줄 알았던 장로님은 칭찬은커녕 펄쩍 뛰며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아들은 그 즉시로 장로님을 만나러 집으로 향합니다. “아버지, 저는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교회 장로님이신 아버지께서 제일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반대하세요?” “아, 이 녀석아, 네가 그렇게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데 신학교는 웬 신학교냐? 대학원에 진학하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해라.” 그러나, 아들이 끝까지 주장함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장로님의 반대함과 주저함은 육체를 따라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린다 하면서도 막상 똑똑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림이 왠지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목회자와 교인들 혹은 교인들간의 관계가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또한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대인관계가 항상 좋으면 참으로 복된 일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있음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연단이십니다. 관계가 좋을 때의 처신보다는 오히려 관계가 좋지 않을 때의 처신이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 앞에 보이는 기회가 됩니다.
목회자들 중에 교인들과의 불화하는 관계로 인하여서 상처를 받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의 하는 일들이 사사건건 반대에 부딪칩니다. 전에는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까지 반대자들과 힘을 합하여 강력한 목소리를 냅니다. 전에는 그의 사랑의 권면을 고마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목사라고 비난합니다. 전에는 목사님의 청빈한 삶이 좋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목사가 주변머리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비난을 하려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에 좋게 여겼던 일들도 비난거리가 되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간에--목회자와 교인들, 혹은 교인들 간에 틈이 생길 때 누가 신나 합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이때 사단은 양측을 이간질하기를 즐깁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혹은 어느 한 편을 자기의 진영에 끌어들여서 교회를 세상사람들의 육체대로 주장하고 싸우는 장소로 만들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간에, 목회자와 교인(들)간에 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에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반대편을 말로써 당을 지어 공격하는 대신에 말을 아끼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욕을 퍼부으며 상대방의 약점을 침소봉대하여 공격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인데, 만일 이미 쏟아 부었다면 화해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용서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믿음의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연단의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입니다.
가끔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내리고 나의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은가 그른가는 살펴보지도 않고 판단내린 마음대로 입술을 통하여 쏟아버립니다.
“목사란 사람이 뭐 저래? 목사가 어떻게 교회보다 자기 아이를 더 생각해?”
“장로란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빠졌어? 아니 무슨 장로가 그 모양이야?”
“저 사람은 권사라고 하는데 물건값을 그렇게 비싸게 받을 수 있어?”
일의 앞뒤는 살펴보지도 않고,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과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혀를 놀립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함으로 8-9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요청하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의 문제에서 떠나 자신에 대한 고린도 교회 내에 있던 반대자들의 비난으로 화두(話頭)를 바꿉니다.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이란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10장 10절에서도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한 것같이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멀리서 편지로 말할 때에는 제법 담대하고 능력이 많은 척 위장하지만 마주 대하여 보면 유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우유부단하며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모양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반대자의 자기를 비난하는 말을 받아 그것이 반대자들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대면한 바울이 보잘 것 없고 연약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관용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기 원한 까닭이라고 상대방의 비난을 긍정적으로 변론하고 있습니다.

2절에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쉽게 쉽게 말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자신의 행동거지와 부족한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험담하고 매도해버립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기를 쓰고 반박하고 다른 사람에게 결정적인 흠집을 내고자 합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할 때에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의 이익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란 비난입니다.
그런데, 실은 바울의 반대자들이 육체대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교리를 폄하(貶下)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드러내고자 한 사람들이었으며, 바울이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헌금을 강조한 것을 두고 그 자신의 생활비를 취하고자 헌금하라고 한다고 육체를 따라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터무니없이 육체를 따라 그를 비난하는 반대자들을 대함에는 담대히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을 통한 복음의 진리를 좇고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부족함과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것이지만, 교회를 무너뜨려내리는 비난과 반대를 일삼는 자들을 대함에는 그들이 (바울의 편지가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대로 실제로 대면함에도 그러한 담대함으로 대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꾸짖음과 징계함으로 대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전체를 그렇게 대할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을 통한 교훈 받기를 원하며, 바울의 권면에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자들을 대함과 같은)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중적 모습인 것 같지만, 이중인격이 아니요 위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실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진노를 발할 자에게 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위로와 사랑으로 대하시고 심령이 강퍅한 자에게는 엄위와 꾸짖음으로 대하셨습니다.

3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고 육체의 제약성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헐벗으면 추위를 느끼고, 굶주리면 배고품을 느끼고, 매맞으면 고통을 느낍니다. 추위를 느끼고, 배고품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도 그 자신과 가족의 육신적인 생활을 위하여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일을 한다고 해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생활의 모양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에 있어 행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산다고 하지만 그도 “육체대로 행한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바울은 변론할 때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느 믿음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육체에 있어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육체대로 싸운다”는 것은 육체의 일에 급급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 중심이 세상에서의 삶에 있습니다. 그의 자랑이 세상의 기준이요 판단입니다.
육체대로 싸우는 사람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소유하는 일에 욕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지만 그 믿음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자기의 집을 세우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육체 안에서 살되 힘써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고 세우는 일입니다.

4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I use God's mighty weapons, not those made by men, to knock down the evil's stronghold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대적함에, 사단의 미혹 가운데 놓여있는 반대자를 대함에 사람의 주장과 감정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병기는 하나님 앞에서(=하나님으로 말미암는, τῷ θεῷ) 강력(δυνατὰ, divine power)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대적을 공격하는 무기로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개인의 의견이나 감정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할 병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의 대립이 있을 때 그 해결책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각자의 다른 주장과 생각이기에 대립이 점점더 첨예화하고 분열됨을 봅니다. 믿는 사람에게 병기가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견고한 진”이라고 함은 사단의 진(요새, 성채)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견고한 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역행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사주하여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과 가르침을 반대한 사람들이 사단의 견고한 진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던 것과 같이 요즘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주장대로 서슴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견고한 진”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견고한 진을 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론”(every proud argument against God, Living Bible)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과 논리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every wall that can be built to keep men from finding him)은 인간의 자고한 마음으로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과 같이 스스로의 하나님을 형상화함으로써 참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겸손함에서 멀어집니다. 즉, 스스로 참하나님과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가는 자입니다. 결국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아니라 사단을 기쁘게 하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사주하여 바울의 복음과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며 그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을 일삼는 거짓 교사들과 반대자들이 바로 사단의 견고한 진 안에 머무르는 자들이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강력--즉 말씀의 영적 병기를 사용하여서 그들의 모든 주장과 생각과 이론을 파할 것이며, 그들의 자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벽을 허물어뜨려서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 “너희의 복종(服從)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와 가르침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바울에게 교회를 치리하고 징계할 권한이 있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아직 바울에 대한 비난과 반대가 누그러지지 않은 고린도 교회에 계획이 변경되어 가지 않음을 바울은 1장 23절에서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관용함으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여행계획을 변경시키시어 분노와 매를 갖고 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고전 4:21 참조). 그러나, 충분히 돌이킬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단의 견고한 성 안에 사단의 사주를 받는 자와 함께 머물러 있기를 고집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과 구분하여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13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복종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것이지만, 끝까지 복종하지 않기로 작정하며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사업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자들은 사도의 권위와 위엄으로 벌하겠다는 바울의 담대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두 팔을 벌리고 받아주시며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에 인자를 베푸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가차없이 물리치시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징계를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입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육체를 따라 육체대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남을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교회 밖에서 때로는 교회 안에서까지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그 발아래 복종케 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견고하게 보이는 진영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그럴듯한 주장과 생각과 이론을 보임으로서 그리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러한 그럴싸하게 보이는 각종 이론들과 제법 견고하게 보이는 듯한 사단의 성으로 안일을 일삼아 들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오히려 이러한 모든 이론과 안일의 (사단의) 성채를 파하는 하나님 말씀의 검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에게 이러한 병기가 주어집니까?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겸손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강력의 병기(weapons of divine power)를 들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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