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의 한계를 따른 자랑” (고린도후서 10:12-18)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 지기를 바라노라.
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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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복음은 교회를 통하여 좁은 지경(地境)을 넘어 멀리까지 계속 전파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장막터를 넓히라.”(사 54:2)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또 숫적으로도 성장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 안에 시끄러운 잡음이 생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장막터를 넓히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과 신뢰함이 필요합니다.
제나라의 왕 장공(莊公, 재위 BC 794-731)이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갑니다. 벌레 한 마리가 유난히 큰 앞다리를 쳐들고 수레바퀴를 향해 돌진해 옵니다. 이에 장공이 수레를 몰고 있는 마부에게 물어봅니다. “저것이 무슨 벌레냐?” “당랑(螳螂: 사마귀)이라는 벌레입니다. 저 벌레는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더욱이 저 벌레는 제 힘은 헤아리지 않고 적을 가볍게 봅니다.” 그러자 장공은 “만일 사람이 저 당랑과 같다면 반드시 천하의 용감한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에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지시합니다.《회남자(淮南子)》「인간훈(人間訓)」편.
여기에서 당랑, 즉 사마귀가 팔을 벌리고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뜻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유래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분수와 힘은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강한 상대와 맞서거나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흥분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만 의지하여서 분수를 넘어서 간섭하지 않을 일에 참견함을 말함입니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에서는 “그대는 저 사마귀를 알지 못하는가? 그 팔을 뻗쳐 수레바퀴에 대들면서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기 재주의 뛰어남을 과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고 했고, 「천지(天地)」편에서는 “그대의 말은 제왕의 덕에 비하면 마치 사마귀가 성난 팔을 쳐들고 수레바퀴에 대드는 것과 같아서 아무 쓸모도 없다. 더구나 그러한 짓은 자기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뿐이다.”고 경계합니다.
그러나 무모함이 유익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마귀와 같이 제 힘을 믿고 객기(客氣)를 부리는 것은 무익하며 위험에 처하게 할뿐이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앞을 향하여 돌진하는 무모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맛보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무모함을 보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다른 열 명이 인간의 생각과 지혜에 합리적인 보고를 할 때 하나님은 이를 믿음 없는 자들의 보고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들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자랑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이기에 가나안 땅 사람들이 아무리 장대하고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하나님 안에서 호기를 부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함을 얻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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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정하여 놓은 기준을 가지고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가 하는 일들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바르고 선을 행한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전해 들으면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 세워놓은 판단과 생각에 따라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게 되었을 때 그의 삶의 판단의 근거가 바뀌어야 합니다. 믿지 않았을 때는 세상의 철학과 학문과 경험이 그 사람이 자기를 헤아리고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고 한다면,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세상의 학문과 경험과 철학으로 판단기준을 삼는 것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그 사람의 삶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명철이라(잠언 9:10, 또한 잠언 1:7)고 말씀합니다.
눈금이 잘못된 자(ruler)를 가지고 어떤 것의 길이를 백 번 잰다고 한들 바른 측량이 될 수 없으며, 잘못된 저울로 무게를 천번 단다고 한들 바른 무게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살을 빼어 날씬해지기를 원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몸무게를 재기 위해서 상점에서 저울을 사왔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저울 위를 올라가 보지만 몸무게는 여전합니다. 그 여자는 분명히 이 저울은 잘못된 거라고 투덜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울을 파는 상점에 다시 들르게 되는데 거기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저울들 위에 차례로 올라가 봅니다. 저울들 대부분이 집에 있는 저울과 비슷한 수치를 가리키는데 어떤 저울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집에 있는 저울보다 무려 5파운드나 적게 몸무게를 표시합니다. 그 여자는 기쁜 마음으로 그 저울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집에 있는 저울은 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몸무게가 5파운드나 빠졌다고 주위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람은 아닙니까?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바른 저울을 버리고 잘못된 저울을 살 것이 아니라 운동을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죄와 허물의 살을 빼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의 죄와 허물의 무게를 가볍게 표시하는 저울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른 저울을 구하여야 하고 경건과 성화의 운동을 계속 해나감으로써 죄와 허물의 짐을 가볍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물론 죽음에 이르는 죄의 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해결되었지만).
13절에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경고하는 바울은 자기 자신을 판단함에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내가 사도인데 나야 뭐 판단받을 것이 있나?’ ‘내가 사도인데 내가 하기를 원하는 일을 하면 되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하는 일도 "분량의 한계를 따라"(κατά μέτρον τού κανόνος, to the limits God has apportioned to us, RSV)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분량”이라는 말로 사용된 헬라어는 카논(κανών)인데 이는 기준, 표준 혹은 규범이라는 뜻입니다. “분량의 한계를 따라서”라고 함은 ‘기준(혹은 규범)의 범위 내에서’--‘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허용되어지는 범위 안에서’란 의미입니다. 고린도 지방에 이르러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일도 바울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가 계셔서 그렇게 한 일입니다.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도 분량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까닭에 사도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임과 권한 밖의 일을 말하고 행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는 일이나 나무라는 일이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직을 맡기신 권한의 한계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바울의 고린도 지방에서의 교회개척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되어진 것이지 임의로 그곳에 이르러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곳에서 고린도 교회를 목회할 때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15절에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떠난 다음에 고린도 교회에 이르러 바울을 비방함으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게서 돌이켜 그들에게 동조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은 말하자면 “남(=바울)의 수고를 가지고” 그들에게 허락되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남의 수고와 터 위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 일에 철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에게 허락되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후 16절 참조)고 말씀함으로써 복음 전하는 것이 귀한 일이지만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일도 ‘분량의 한계를 따라’ 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의 분량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직분을 감당하며 그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이 확장되어짐에 따라 이를 통하여 그의 한계를 확장하여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의 영역을 계속 넓혀가기를 원하되,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교사들같이) 남이 이미 터를 닦고 전파한 지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지방 이외의 지역으로 계속 복음을 확장하여 나가기를 사모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교회에 부목사로 들어간 사람이 담임목사님과 교인들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함으써 교인들 중 얼마를 자기편으로 규합하고 마침내는 담임목사님을 몰아내든지 아니면 얼마의 교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가끔 보는데, 이는 남의 한계를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그가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분량의 한계 밖에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주님 안에서 주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1:31 참조).
예레미야서 9장 23-24절에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있으며, 용사에게 용맹이 있으며, 부자에게 부함이 있지만, 이를 자랑할 때 이는 하나님의 한계 밖에서 자랑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스스로의 올무에 걸릴 수 있습니다.
“자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카오마이(καυχάομαι)가 주님과 함께 사용될 때 세 가지 뜻을 포함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자랑하다(boast)요, 둘째는 주님을 찬양하다(praise)이며, 셋째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다(glory)란 뜻입니다. 주안에서 분량의 한계를 따라 자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을 자랑할 것이요, 주님을 찬양할 것이요,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판단하시고,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 시풍의 선구자인 시인이며 음악가인 안티마쿠스(Antimachus, BC 400년경)가 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의 작품 한 편을 낭송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소리가 불분명한 까닭에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플라톤(Plato, BC 427?-347?)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불평을 하며 나가 버립니다. 안티마쿠스는 사람들이 다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낭송을 계속하겠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내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함을 받는데 연연해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일을 훨씬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이로써 실망할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갈 줄 아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경계로 삼아야 할 말씀을 주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의 인정받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우리 삶에 대한 자랑이 무엇에 따른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돌아봄에 거울이요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인정함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자기에게 관대한 우리 사람들이 ‘내가 이만하면 참으로 바르고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지.’ ‘내가 목사로서 이만하면 됐지. 교인들이 모두 잘한다고 하잖아?!’, ‘내가 장로로서 이만하면 족하지. 주일 예배에 꼬박 출석하지. 주일날 장사도 안하지’, ‘내가 집사로서 할만큼 다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자신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후한 평가를 내리지만, 우리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리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평가가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관대한 마음이나 세상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聖經)이 기준(Canon)이 되어 우리를 칭찬하고 또한 나무라고 징계하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덮고 알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스스로 세운 판단 기준에 의하여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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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과 행동의 판단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분량)은 바른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임의로 정해 놓은 기준을 따라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분량이 이러한데 그 분량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의 터와 수고를 침범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 것을 자랑하십니까? 세상에 속한 지혜나 지식을 자랑하지 말 것이며, 명예나 권세를 자랑하지 말 것이며, 부함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량의 한계를 따라 주님 안에서 주님을 자랑할 때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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