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받을 만한 사람들” (고후 8:16-24)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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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배달되어지는 우편물들 가운데 자선단체들로부터 기부하라고 오는 편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기부금을 보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부금을 보내면 이것이 과연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대로 사용되어질까 의심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기부를 요청하는 행위가 너무나 상업적으로 되어 가는 세상이기에 선의의 피해를 입는 선한 자선단체들도 있게 됩니다.
오래 전에 가뭄과 극심한 경제적 곤란(困難)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미국 내에 있는 기타 교회협의회들, 개 교회들과 자선단체들에서 벌렸고 모금한 돈과 물품들을 여러 기관들을 통하여 북한에 전달하여 주었지만, 때로는 과연 우리가 선택한 단체가 그 일을 정직하게 잘 감당할 것인가? 그 위에 돈이나 물품을 받은 북한 당국이나 관리들이 제대로 고통을 겪는 주민들에게 전달하여 줄 것인가? 의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사람들이 탐하는 것 가운데 으뜸이 돈이요, 또한 돈에 얽힌 부정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을 다루는 일로 봉사하는 분들은 특별하게 정직의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어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정이나 회계의 일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고 적어도 두 사람이상이 보는 것도 쓸 데 없는 의심을 받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한국의 큰 교회들은 그 재정규모가 엄청난데 헌금이 전부 현금으로 들어오기에 유동성(liquidity)면에서는 어떤 커다란 재벌기업보다도 좋을 것입니다. 이를 관리하는 분들은 회계사를 위시하여 회계·재무관리에 특별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 위에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 임명합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금전을 유용(流用)함으로 또는 지출 내역이 모호하여서 교회에 말썽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일행의 돈궤를 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그를 대단히 신뢰하셨는지 아니면 그가 강력하게 재정을 맡겠다고 자청하였는지 그가 혼자 돈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유지들이 가만히 예수님께 기부금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하는데 그가 나중에 왕이 되면 한 자리 하려는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 나은 것이 고마워서 얼마를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세어보지도 않으시고 가룟 유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베다니에 들르셨는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를 분히 여기는데 그 이유인즉 그가 횡령할 몫이 없어진 까닭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정상 일꾼의 300일치 노임)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금전에 대한 욕심이 많은 가룟 유다가 돈궤를 맡은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는데, 사단이 그의 탐심을 미혹하여서 예수님을 은전 삼십냥에 팔게 하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요한 13: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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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신뢰할 만한 일꾼들--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들을 파견함은 첫째로는 고린도 교회의 모금을 격려하여 이제 완성하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모금한 돈을 다루고 운반함에 조금도 부정한 것이나 의심받을 만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16-17절에서 디도에 관하여, 18-19절에서 다른 형제에 관하여, 22절에 또다른 형제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16-17절에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고 말씀합니다.
모금의 격려와 관리를 위해 파견하는 세 사람 가운데 먼저 디도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냄은 디도의 마음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간절함이 있듯이, 동일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푸데이’(σπουδή: earnestness, diligence, eagerness, zeal, effort)는 ‘간절한 바람’, ‘열성’, ‘열심’, ‘노력’, ‘근면함’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디도의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간절함이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교우들을 걱정하고, 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두 번째로, 디도의 간절함은 바울의 권함을 받아 더욱 간절하여졌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성도를 위한 권면이 그의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더욱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간에 교회를 위한 권함과 함께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교회를 더욱더 간절히 사랑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그의 간절함은 자원함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함은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 하라’ 해서 마지못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석한 기도모임이요, 예배요, 봉사이면, 이내 싫증을 느끼고 도망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 이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즐겁고, 보람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디도는 처음에 바울의 지시하는 대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를 보고 나서, 바울의 자랑이 무엇이며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염려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와는 무관한 고린도 교회이었는데 그 교회를 방문하고 난 지금은 자기도 그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바울의 그 교회를 위한 염려와 기도가 그의 염려와 기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입니다.
18-19절에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복음을 잘 증거하여서, 혹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복음증거에 힘써서, 또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잘 살아서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되 “모든 교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편지를 쓰고 있음으로 이 “한 형제”는 마게도냐 교회들 중에 한 교회에서 선별한 사람일 것인데 그에 대한 칭찬은 자기의 교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마게도냐의 모든 교회들--곧,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마게도냐 교회들 안에서는 그의 복음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형제는 바울이 소아시아에 머물러 있었을 때부터 모금하는 일을 위하여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 중에서 선택을 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모금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바울과 동행하여 전도여행을 다녔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이름을 거명하여 소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굳이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그의 원함이었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 이름이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더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 일행과 동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의 일을 사사로이 하지 않았습니다. 모금하는 일에 아무런 부정한 것이 없고 투명하게 행하여지게 하기 위해서 여러 교회들이 인정하는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모금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바울의 원하는 바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을 온전하고 흠없이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1절에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거액의 연보(捐補)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모금하고 모금한 돈을 관리하는 일에 특별히 조심함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서 그의 복음증거가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바울이 원하는 바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사역자로서 생활비 청구권까지 포기하겠다는 바울의 의지를 비친 바 있습니다. 9장 11-12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복음)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물질)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障碍)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지방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 거액이기에 전도와 모금을 위한 여행을 하면서 그는 그 돈을 자신이 관리하지 않고 여러 사람으로 관리하게 하고 모금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렇지 않아도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비방과 중상의 기회를 찾는데, 그들에게 훼방거리를 제공하지 않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선한 일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3장 3-4절에서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일이 중상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일로 사람들 앞에서도 선히 여김을 받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또 저희(디도와 한 형제)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 또한 참으로 신실한 사람인데 바울은 이 사람이 과연 정직하고 물질을 탐하지 않는 사람인가 여러 면에서 지켜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람이 과연 모금하는 일과 모금한 연보를 관리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어서 그 일을 감당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고 우리가 과연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인가 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심이 아니라 세우기 위함이심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인정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인정함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곧,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최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판단하건데, 이 사람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를 감당하기에 합당한 형제이므로 바울은 그에게 고린도 교인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함에 간절함이 있었다고 이야기 해줍니다. 그랬더니, 이 형제도 고린도 교인들의 간절함을 믿고 이 연보를 거두고 관리함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성도를 돕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더욱 간절함을 표현하였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파견한 세 사람에 대해서 추천의 요약을 합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어디에서 처음 알게되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갈라디아서 2장 3절에서 디도가 헬라인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디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디도를 “나의 참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를 돕는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나의 동무”,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도가 그만큼 바울의 신뢰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한 데 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함께 교회를 염려할 동무요 동역자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른 두 형제들에 관하여는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들이 여러 교회들 가운데 선택되어 바울의 모금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함에 무명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할 때, 장차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고 당부합니다.
이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이들에게 말한 바,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보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보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말로만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매도 있는 사람들인 것을 저들에게 알게 하라는 당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였다고 했습니다.
7장 14절에 “내가 그(=디도)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기쁨은 그가 사역한 또는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때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보람이요 기쁨일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자랑한 바가 헛되지 않고 디도의 보고를 통하여 과연 참되게 되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울은 이번 모금의 일로도 바울이 디도를 포함한 세 형제에게 한 자랑이 과연 참된 것을 보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3
오늘 바울은 연보하는 일을 격려하고 모금한 돈을 관리하는 일로 파견한 세 형제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과연 하나님의 일군의 덕목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간절함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간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더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또한 ‘자원함’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의 헌신이나 봉사는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강청으로 혹은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헌신이나 봉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를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영위하는 목적은 우리의 복음 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정직하고, 근면하고, 불의와 부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훼방되어지는 많은 원인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비윤리적인 삶이 적나라하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신뢰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험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를 드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임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며 더욱 더 커다란 평강과 축복으로 같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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