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죽고 함께 살고” (고후 7:2-4)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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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싱(Sundar Singh, 1889-1929)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 시크교도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특히 힌두교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선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신학교수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힌두교가 기독교와 비교하여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선다싱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그의 간단한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다시 질문합니다.
“힌두교에는 없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기독교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크리스천으로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여전히 그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질문하고자 한 의도가 당신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군요.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신봉하도록 만든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다싱은 세 번째 질문에도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은 기독교에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고매하고 독특한 가르침이나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까닭이 아니란 것입니다.
옛사람을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은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요한 1서 5장 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언어 가운데 ‘상생(相生)의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중상함으로 서로 죽이는 ‘상살(相殺)의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존중하되 합리적이고 국가발전을 위한 것일 때에는 받아들임으로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늘상 파행적이고 서로 죽이는 국면만 초래합니까?
그것은 남이 제안하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나의 것만 주장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하자고 외치면서 속으로는 남은 죽이고 혼자만 사는 ‘독생(獨生)의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야(與野)가 서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만 죽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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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χωρήσατε ἡμάς,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고 당부합니다.
6장 13절에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πλατύνθητε καὶ ὑμείς)”라고 권고한 것에 대한 반복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받아들일 여지(room)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체면 치례로 마지못하여 형식적 화해의 제스처(gesture)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속으로부터 받아들이라고 청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과 기둥 장로님이 어떤 일로 사이가 벌어져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회 차원의 예배에서, 화해를 요청하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가 악수하고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제는 잘 지내자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두 분 사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교회 내에서 목사-장로의 갈등이 사라지는구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화해의 모양은 그럴 듯 했지만, 그 화해의 악수와 눈물은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영접한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장로님이 목사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던 교인들 얼마와 함께 교회를 떠나는 사태로 매듭지어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대하여 사도로서 자신을 변론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사역할 때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밝힙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흥하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들입니다.
사무엘이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앞에서 한 일에 대해서 사무엘상 12장 3-4절에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사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바로 되어 모든 것에서 떳떳할 때 그 교회, 사회와 국가는 건강하고 밝게 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의 부정부패가 있으므로 정경유착(政經癒着)의 문제가 나오고 한 국가나 사회의 올바른 조정(調整)과 발전(發展)이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씀은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이러한 자들로 매도(罵倒)하였던 것같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안위의 기도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였던 바울에게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악의가 가득찬 거짓 교사들에 의해 바울은 불의를 행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해롭게 한 사람이요, 또 속이는 자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누명을 쓰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바울이 벌이고 있는 모금 캠페인(8-9장)을 잘 마무리짓기 위하여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라고 하자, 이를 기회 삼아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돈을 탐하는 자이며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것 중에 얼마를 불의하게 착복하였다고 중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운반하기 위하여 그가 신임하는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보내었는데(고후 8:16-24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트집을 잡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7-18절에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반문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도 그의 투명성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3-35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3절에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며 그와 그 일행의 일을 변론함은 그들을 나무라고 죄를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 미혹되어서 바울을 한 가지로 욕할 때에도 바울은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원함은, 6장 11-13절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들을 향하여 마음을 넓히고 활짝 열어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도 바울 일행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공동체로서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하여 비난의 말, 원망의 말과 정죄의 말은 접어 두기를 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이 배부르고, 상대방이 죽게 되든 말든 상관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고 협력하는 삶입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비난하고 죽이는 삶이 아니라, 상대방을 용납하고 위로하고 상대방과 함께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세상에 대하여 함께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서 함께 등을 돌리고 떠나서 하나님의 온전한 표상이신 그리스도께로 함께 향하는 삶입니다.
불의와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의와 진리에 대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는 데, 여기서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8-9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앎이로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은 서로 연합하고 서로 위할 때 죄와 불의에 대해서는 함께 죽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의에 대해서는 함께 사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불의와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의와 진리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되 바울 혼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과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4절에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I have the highest confidence in you, and my pride in you is great. You have greatly encouraged me, you have made me so happy in spite of all my suffering. (나는 여러분을 매우 신뢰하고 있고, 여러분에 대한 나의 자랑이 큽니다. 여러분은 나를 크게 위로하고 있으며, 나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왔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난하고 중상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여전히 자랑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말썽 많고 말 많고 그를 욕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 전도로 인하여서 세상 우상을 섬기는 데서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이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자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바울에 대한 신뢰와 자랑도 여전하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들을 부정적인 눈과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치 않고 긍정적으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비난과 중상의 말이 바울을 괴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생각하기를 원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으로 위로를 얻고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적 부모인 바울에게(고후 6:13 참조) 고린도 교인들이 말썽꾸러기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갖고 있는 믿음의 자녀이기에 바울에게는 소중하고 위로와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전도하고 목회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만들고 길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양육된 사람들이 현재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이 장차 더욱 온전하고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하고, 현재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과 곤고 가운데서도 그가 양육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자녀들로 인하여 위로 받고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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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함께”란 연합의 공동체적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을 넓혀서 다른 사람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각 지체인 우리 믿음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어려움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그런 삶을 살게 합니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살리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