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4, 2014

“종말론적 결혼관” (고전 7:25-40)

                   “종말론적 결혼관” (고전 7:25-40)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紛擾)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한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1
건강한 사람에게 호흡(呼吸)하는 일은 누워서 떡 먹는 일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누워서 떡을 먹다가는 체할 수도 있는데 호흡하다가 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악성(惡性)의 천식(喘息) 환자나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쉽던 호흡하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중단되므로 사람은 더 이상 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祈禱)는 영적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기도하는 일은, 따라서, 어떤 일보다 쉬운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삶 가운데 기도가 지속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어딘가 병들었다는 증거이며, 기도를 전혀 안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크리스찬으로서는 죽은 사람입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대가(大家)로서 자주 인용되어지는, 또 ‘기도하는 손’ 그림의 주인공인 조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 목사님은 93살까지 장수를 누렸는데, 고아원(영국의 Bristol)을 시작하면서 생의 마감까지 60년간 이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고 5만가지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물질을 위한 기도도 많이 했는데 그의 생을 통하여 720만달러(약 150만파운드)나 받았다고 합니다. 뮐러목사님에게서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뮐러 목사님은 무엇이 필요하게 되더라도 곧바로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드릴 기도의 내용이 성경의 어디에 약속이 되어있는지 꼭 찾아 확인하고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간구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도를 하기 전에 며칠동안 관련 성경구절을 찾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기에 기도하는 뮐러 목사님의 손에서 성경이 떠날 때가 없었으며 그는 많은 고아들을 돌보는 바쁜 생을 살면서도 성경을 백 번 이상 읽었습니다.

우리가 물질(物質)을 놓고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 사업의 확장을 위한 물질을 얻기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기도가 아니라 억지입니다. 더욱 많이 기도하심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람의 몸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아무리 잠을 조금 자더라도 피곤치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 하면, 아무리 잠을 많이 자더라도 몸이 찌프둥하고 게운함이 없이 병든 사람처럼 시들시들한 날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함도 이와 같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을 잘 감당하던 사람이 교회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주일 날도 간신히 출석하기까지 신앙이 나태해졌다고 해서 학교 일이나 직장 일을 하는 시간이 느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맥 없는 날들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열심히 예배와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건강을 책임져 주시며 그에게 장수를 주십니다.

우리가 종말적(終末的)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생의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철이 난 사람들은 압니다. 아니, 나의 이생의 삶이 끝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재림하실 수도 있습니다.
종말론적 삶은 생의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소망으로 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신천지, 새 하늘과 새 땅의 전개입니다.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하면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삶--그것이 종말적인 삶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곧 오소서 주님!” 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삶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임의로 주님의 때를 계산하는 자들이요, 주님을 맞는다고 하면서 세상 일을 등한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소망있는 종말론적 삶을 사는 사람은 현재 일에 충실하면서 언제 임하실지 모르는 주님을 소망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영적으로 항상 깨어있고자 합니다.

현재의 생을 사는 것도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육신의 장막을 떠나 주님을 만나는 것은 더욱 큰 즐거움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 즐거움을 더욱 큰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감사함과 기쁨으로 현재 주님의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긴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갑니다. 그는 그것이 너무 견딜 수 없어 기도합니다. “주여 십자가가 너무 깁니다. 조금 짧게 하여 주소서.” 주님이 그의 십자가를 조금 짧게 하여 주십니다. 얼마쯤 가니, 그것도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또 기도하니 주님은 군말씀 않고 또 짧게 하여주십니다. 이렇게 몇 번을 하니 십자가가 가쁜하여 한 손만으로도 잡고 갈 수 있습니다. 얼마쯤 가니 넓은 강이 앞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고온 십자가를 강에 놓고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건너갑니다. 강을 건넌 사람의 십자가는 그 사람이 강을 건너면 신기하게 사라져버립니다. 이 여집사님은 그의 지고온 십자가가 너무 짧아 도무지 다리 삼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남이 건너는 것만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 집사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주님, 내가 헛걸음하였습니다. 난 어떡합니까? 난 어떡합니까?“ 하고 울다가 자기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우리의 이생이 끝날 때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을 하였기에, 아이가 있기에 내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주님을 사랑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잃었기에 그 슬픔이 하도 커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나이다.”  핑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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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으로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두 번째 주제(topic)인 음란에 대해서 마칩니다.
1-4장에서는 교회 내의 분쟁과 분열에 대해서 말씀하고, 5-7장에서는 음란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8-10장에서는 우상(偶像)의 문제, 11-14장에서는 공중예배의 문제, 15장에서는 부활(復活)의 문제를 다룹니다.
무슨 주제를 다루든지 바울의 말은 항상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 제일주의”입니다.
결혼이 주님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아예 결혼하지 말고, 결혼하더라도 주님을 우선으로 놓고 살 수 있으면 그리 하되 핑계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25-26절에서 처녀의 결혼문제를 말씀합니다.
처녀가 결혼을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명이 없지만, 바울이 권고하기는 종말을 사는 입장에서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좋으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무엇이 중심입니까?
결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결혼을 말씀합니다.
세상사는 사람들하고 다르죠! 어떤 사람은 “결혼”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이 제한 당하는 것도 마다 하지 않습니다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신앙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 뻔한 결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27-28절에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편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핑계입니다. 그들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핑계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비밀(秘密)인데, 하나님과 하나됨은 생각지 않기에 남편으로, 아내로 신앙생활을 잘못한다고 핑계꺼리를 삼습니다.
결혼을 하거나 안하는 것은 죄의 문제와 상관이 없는 것이로되, 결혼을 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이, 또한 자식이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면, 이 사람은 이로 인한 육신의 고통--곧,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치 못하는 자의 자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9-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권면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슬픔도 기쁨도, 우리가 사기를 원하는 것이나, 현재 갖고 사용하는 것이나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너무 거기에 탐닉할 것이 아니고, 소욕을 채우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도, 현재의 나의 커다란 재산도, 명예도, 지위도, 학식도--‘이 세상의 형적’(τὸ σχήμα τού κόσμου τούτου)은 모두 다 지나갑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배우자가 있는 자도 없는 자같이, 슬픔이 있는 자도 없는 자같이, 기쁨이 있는 자도 없는 자같이, 쓸 것이 있는 자도 없는 자같이 살 것입니다. 이는 믿는 사람의 현재의 생활이 허무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자의 삶의 중심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2-35절에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32-33절에서는 장가 가지 않은 자와 장가 간 자를 비교하고, 34-35절에서는 시집가지 않은 자와 시집간 자를 대비하였습니다.

장가 간 자의 “마음이 나누인다”고 했습니다.
전에 총각일 때는 주님만 온전히 사랑했는데, 여기 시집 안간자와 처녀의 예에서와 같이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려고 했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그 마음이 하나님과 배우자 사이에 나누어집니다.
남편이, 아내의 주님으로 향한 열심을 본받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어느 한 쪽이 열심히 없고 오히려 불만이 많을 때 이를 본받아 같이 열심히 없어지고 불평이 쌓이기는 어찌 그리 쉬운지 모를 일입니다.
믿음의 불을 지피기는 어려운데, 조금 타고 있는 믿음의 불을 끄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더 쉽습니다.

바울은 결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자식에 대한 염려와 이로 인한 믿음의 시험은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남편이나 아내보다는 자식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데 제한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 17절에서 “그 날(마지막 때)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바울이 결혼한 자에게 이러한 경계의 말을 함은 그들 마음에 걸림꺼리를 놓고자 함이 아니라 더욱 경책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에 한결같이 열심을 내게 하고자 함입니다.

36-38절에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그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 권면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권리가 있습니다.
딸의 선택대로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하게 딸을 시집보냅니다.
과년(過年)한 딸이 혼자지내는 것이 인정상 안되어 보여서 시집 보내는 것이 죄 짓는 일이 아니지만 주의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게 하는 것도 인정상 걸릴 수 있지만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한글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원어에는 그저 ‘처녀’(παρθένος)란 단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글성경은 소수의 번역에 따라 ‘처녀 딸’이라고 생각하여 번역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정혼한 처녀’라고 여겼습니다.

어떤 남자에게 ‘정혼한 처녀’가 있는데, 약혼한 사이로 오래 지남이 그 정혼한 처녀에게 합당치 않고 자신의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 통제하기 어려우면 결혼하여도 죄짓는 것이 아니나, 환난의 때가 임박한 것을 고려할 때, 정혼은 하였지만 결혼하지 말고 주님의 재림까지 그대로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욱 좋으리라는 권고입니다.

39-40절에서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를 사별하여 과부가 된 여인이 그가 원함이 있을 때 결혼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왕에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재혼하고자 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권고는 할 수만 있으면 혼자 지내는 것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더욱 바람직하다고 말씀합니다. 혼자지냄으로 정욕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결혼해도 무방하나, 모든 일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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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주님 사랑이, 주님을 그 중심에 놓음이 지나치다고 여겨지십니까?
이것이 바울의 일관된 권고의 말씀입니다. 결혼문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 아니지만, 어떠한 형편에서건 주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삶의 중심에 놓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명령입니다.

종말의 때에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종말이란 단어를 싫어합니다. 특히 이 세상에 연연함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함이 우리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우리 이생의 삶의 종말을 맞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영과 몸으로 주님의 재림의 종말을 맞든지, 아니면 생명이 끝나고 우리의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는 종말을 맞든지 때가 이를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충성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혼을 한 자이든지, 결혼을 안 한 자이든지, 슬픔이 있는 자이든지, 기쁨이 있는 자이든지, 많은 것을 소유한 자이든지, 적은 것을 소유한 자이든지, 우리가 이들로 인해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여러분의 달란트에 따라서 주를 더욱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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