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1, 2014

“우상의 제물(1)” (고전 8:1-6)

“우상의 제물(1)” (고전 8:1-6)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知識)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1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 고민스럽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겉으로 드러내놓지 않아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50%가 넘는 집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속앓이를 할 것입니다. 일가친척 모두가 믿는 사람일 때는 그들이 모여서 추모예배를 드림으로써 먼저 소천하신 웃어른의 생전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어른이 아직 믿는 사람이 아닐 때, 아니면 일가친척 중에 가장 어른이 있는 가정(‘큰집’)이 아직 믿지 않는 가정일 때는 적지 않은 문제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이 믿지 않는 일가친척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제사를 드림으로 조상신에게 절하자니 이건 더 못할 일인 것같습니다. ‘그래, 다만 조상에 대한 예를 표시하는거야’ 자신에게 말하면서, 제사 상 앞에 절을 해보지만 께름직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하다보니, 명절이 다가오는 것은 좋은데, 제사 시간만은 피하여 있고 싶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여 온 가정이 복음화되어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제사와 추도예배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조상을 무시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웃 어른에 대한 효와 공경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조상들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절대성 안에서 함이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정이 복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처신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죽어도 제사를 지낼 수 없어요’ 극단적으로 반박함으로써 가정불화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부모와 갈라서는 사태까지로 몰고 나간다면 이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크리스천으로서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서 집안의 다른 어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기 전에는 그분들의 하는 행동에 극한적 반응을 보이는 것보다는 어른들에게 잘 말씀드려서 그분들이 제사드리는 장소에서 나 나름대로의 조상에 대한 예를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분들이 절을 할 때 조용히 돌아가신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에 대한 묵상 기도함도 한 방법입니다.

2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말씀합니다.
지식(γνώσις)이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알고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깨달음)에 따른 행동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며 다른 사람의 다른 지식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요즘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2,00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전 세계인구중 5분의 1이 기독교 인구인데, 세상은 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의 한국의 모습은 그래도 인정이 넘치는 사회였는데, 교회와 교인들이 더 많아진 지금의 한국은, 물론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한 시각으로 봄에 차이가 있지만, 각박한 세상이 된 것같습니다. 물질은 몇 십년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와지고 교회와 교인들도 엄청나게 는 것이 사실인데, 체감(體感)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저만치 물러나 있는 느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부터 지식의 전달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말하는 입이, 그리고 교인들은 듣는 귀가 발달되었는데, 그러므로 자기 주장과 변명들은 열심히 잘 하는데, 사랑의 가슴은 여전히 냉랭(冷冷)하거나 오히려 믿지 않을 때보다 식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못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복음의 내용을 잘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의 죽어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접힌 여인을 돌로 침은 율법을 아는 지식의 판단입니다(신 22:23-24; 레 20:10). 그러나, 그러한 여인까지 용서하여줌은 사랑의 마음이란 것입니다(요한 8:10-11).
간음한 여인의 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코자 할 때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무언가 땅에 쓰고 계셨는데(요한 8:6, 8), 어떤 성경학자들은 ‘사랑’(love)이란 단어를 계속 쓰고 계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을 사랑하여서 어떤 사람의 명성이 알려지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어떤 것인지 보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지만 그가 갖고 있는 그의 분야에 대한 지식이 별 것 아님을 발견하고는 실망하여 돌아섭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말은 지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향한 것이 아니요 지식이 있다고 우쭐거리는 사람을 향한 말입니다.

무언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믿음이 남들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믿음이 많기 때문에 성경말씀도 설교말씀도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저기 믿음 없는 저 사람이나 들어야 할꺼야” 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성경의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만한 성경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나 말씀의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 아는 자입니다. 이 사람은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지방에는 많은 헬라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 제우스 신전, 아폴로 신전 등이 있었고, 이들에게 제사로 드린 식물(food)--특히 고기(meat)가 시장에 내다 다른 고기들과 섞여 팔렸습니다. 시장에서 고기를 사먹어야 하는 사람은 그 고기가 신전에서 제사드리고 내다 파는 고기인지 아니면 그냥 내다 파는 고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그만큼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다가 내다 팔리는 고기의 양이 많았습니다.

고기를 먹고는 싶은데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세상에 우상을 섬기는 일은 있지만 그 우상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도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우상의 실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그 거민과 함께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기타의 우상은 다 허구(虛構)입니다.
로마-그리-스 종교 문화권 아래에서 그들 이방인들이 섬기던 이들 신상들도 실재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꺼릴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은 것은, 그들 마음에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하다면, 그들은 양심에 가책함 없이 자유로이 장터에서 고기를 사다가--그 고기가 그냥 내다 팔리는 고기인지 아니면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인지 가리지 않고--먹어도 좋습니다.

5-6절에서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주라고 불려지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허구(虛構) 속에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어릴 때 도깨비나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안식을 얻지 못하여 구천을 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보면 마귀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악령(evil spirit)입니다. 이 악령이 마귀의 장난으로 생존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 사람의 생존시의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신내림을 체험한 용한 무당은 바로 이와 접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무엘상 28장에서 사무엘이 죽은 후 사울이 하도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아가서 그가 초혼(招魂)할 때, 곧 죽은 사무엘의 흉내를 내는 잡령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귀의 장난이지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은 아닙니다.
도깨비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현상일 수 있고, 또한 마음이 허한 사람의 상상속에 만들어진 일종의 허구(imagination)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깨비이든, 귀신이든, 아니면 다른 유사 잡신들이든--태양, 산, 나무, 돌 등 사람의 마음이 그곳에 가있으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인데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고 따라서 이것이 그 비는 사람에게 하나의 신(神)이 됩니다. 성황당(城隍堂)에서 비는 사람에게 성황당은 그의 신이 되며, 그 사람은 그 빎을 통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은, 그러나 이러한 것은 헛된 신일뿐 실재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요 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다른 사람의 나와 다르게 갖고 있는 지식을 정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교만하게 해서는 안되며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지식 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남이 나와 다름을 용납하고, 남이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거리낌이 있고, 가리는 것이 있음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랑이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게 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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