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1, 2014

“우상의 제물(2)” (고전 8:7-13)

“우상의 제물(2)” (고전 8:7-13)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1
미국에 처음 유학 왔을 때 저의 호스트 패밀리(host family)가 있었는데 장로교 목사님 가정이었습니다.
호스트 패밀리란 처음 유학온 외국학생을 자원하여 돕는 미국 가정입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 가정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가서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 다니는 딸이 남자친구(boy friend)를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간다고 합니다. 물론 게스트룸(guest room)에서 자는 것이었을 겁니다.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지는 몰라도 대학생 딸의 이러한 행동을 용납하는 그 부모가 저에게는 충격으로 부딪쳐 왔습니다. ‘아, 미국사람들이 자유롭다고 하더니 이런 것인가보다’고 해석하며 애써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목사님이 과실주(果實酒)를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한 잔을 권합니다. 한국에서는 크리스천에게 술과 담배가 공식적으로는 금기사항이었기에,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음으로는 하는 사람들이 꽤 되지만, 그 미국 목사님과 사모님이 과실주를 마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남자친구를 데리고 온 딸의 행동에서 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목사님 가정이 초대하여도 학교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미국 목사님들의 상당수가 술을, 즐겨마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신다는 사실입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저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학생들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도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수는 학기가 끝날 때쯤 학생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간단한 식사를 나눈 후 맥주를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술과 담배가 자신의 성경 가르침과 신앙에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배우려는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거리낌을 줄 수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한 번 한인회 연말행사에 참석하였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장로님 부부와 한 테이블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는데, 그 장로님과 부인이 포도주를 자기들끼리만 마시기가 멋적었는지 저에게 권합니다. 제가 사양하니까, “아, 목사님, 미국에서 포도주는 그냥 음료수와 같아요. 한 잔 하세요.” 하며 계속 권합니다. 물론, 포도주 한 잔 마셨다고 해서 약속된 구원을 잃는다든지, 신앙이 갑자기 타락한다든지, 비윤리적인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 크리스천에게는 금기(禁忌)처럼 되어있는 술을 마시고 있는 목사의 모습을 발견하면, 이것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거나 돌아서게 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으나,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사람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지 않고자 마음 먹었으면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만 그리 말고 그들이 안보는 듯한 장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친한 고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에 모처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친구들은 이 목사님을 반강제적으로 끌다시피하며 술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목사님은 끌려가면서 “야, 너희들 내가 목사인걸 잊었냐? 나 술 못해”라고 하며 술집에 가는 것을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끄는 친구들에 의하여 술집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친구들은 자기들끼리만 마시기가 뭐하니까 이 목사님의 잔에도 맥주를 가득 따라 붓고 건배할 때 궂이 못한다는 목사친구에게 그저 잔만 들었다가 놓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날따라 이 술집에 들른 그 목사님 교회의 한 집사님이 건배(乾杯)의 잔을 든 목사님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발견을 하곤 기겁을 한 것입니다. 본인도 교회 직분자이면서 술집에 드나들었으면서 (물론 그는 술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찾아다닌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혼자 삭이지 못하고 그의 아내에게 얘기하고, 그 여집사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서 교회의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술집에 드나드는 행동이 바르지 못한 목사님을 목자로 둘 수없다.”고 하며 항의에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사실을 해명하였지만, 이미 ‘술마시는 목사’로 낙인찍은 교인들에게 목사님의 말은 거짓말이거나 공연한 변명으로만 들렸고, 결국 그 목사님은 그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7절에서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는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식(γνώσις)”--‘깨달음’은 4-6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즉, 고린도 지방에서 우상으로 제물을 드리고있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들일 뿐이며 오직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인간이 지어낸 많은 신과 주가 있으나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과 우리 인간이 존재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 지식을 가진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 이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들이 전에 섬기던 우상들이 여전히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그 우상에 대한 마음이 다 지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 신의 존재도 막연히 느껴집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심을 ‘아는’ 믿음이 좋은 사람의 권고를 따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어떤 사람 가운데는 여전히 거리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어납니다.
‘내가 지금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 것은 아닌가?’
‘아니야, 저 사람은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저걸 먹는데 나도 먹어도 되겠지.’
마음 속에서 양심의 문제로까지 여겨집니다.
이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을 따라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기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먹고 있지만, 그의 양심은 계속 ‘지금 저 지식이 있다는 사람의 행동이 바른 것인가?,’ ‘저 사람을 따라 고기를 먹고 있는 나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하며 계속 갈등하기에, 믿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다’고 표현했습니다.

8절에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6장에서 음행의 문제를 다룰 때, 바울은 식물(食物)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6장 13절에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폐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현재에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동안에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식물을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하여서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아니고, 남들보다 하루에 한끼를 더 먹는다고 하여도 그만큼 더 하나님의 덕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식물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더 거룩하여지고, 식물을 다른 사람보다 더 먹는다고 하여도 그만큼 더 죄 짓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聖靈)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행위는 죄가 아닙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담배를 피우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이러한 먹고, 마시고, 피는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못들어 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고 행동하는 일들이 거리낌과 가책꺼리가 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그러나, 믿음의 연장자로서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돌’이 된다면 이는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기도해야 할 문제입니다.

9절에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즉”이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 ‘데’(δὲ)는 여기서 “그러나,” “다만”으로 번역해야 뜻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8절에서 말씀한 대로 식물로 인해서는 하나님을 더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아니라, 지식과 믿음이 있는 너희가 먹어도 좋고 먹지 않아도 좋을 것이지만, 그러나(혹은 다만) 너희의 먹는 것에 대한 자유함이 지식과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혹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10절에서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이나 제우스(Zeus) 신전에 드나들면서 제사를 드리고 식물을 먹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옛 습관을 버릴 수가 없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몰래 드나들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니는 교회의 직분자로서 제법 믿음이 많다고 하는 사람이 그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에 버젓이 신전에 드나들고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사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몰래 신전을 계속 드나들던 사람이 이를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도 저렇게 버젓이 드나드는구나. 나도 좀더 떳떳하게 드나들고 고기도 먹어야지.’ 그러나,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고 여전히 우상의 존재로 거리낌이 있던 이 사람의 행동이 ‘몰래 함’에서 ‘드러내놓고 함’으로 바뀌어졌지만, 그의 양심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대학생으로서 교회생활을 할 때, 신학대학을 다니던 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이분이 성가 지휘를 맡고 있었고 다른 청년들보다 몇 살 위라 곧잘 성가대 청년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을 다녔습니다.
그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그의 행동은 먹고 마시는 일에 거침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전도사님의 지식과 믿음으로는 술 마시고, 담배 피고, 기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안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를 따라서 제법 대범한 척 하는 청년들에게는 여전히 자책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 외형적 행동을 따라함은 있을 것이지만, 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22-23절에서 바울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식이 있는 ‘나’는 먹고 마시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크리스천으로서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을 먹어도 ‘나’의 지식으로는 우상이 없음이 분명하여 하나님꼐로 향한 마음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행동을 따라 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갖고있지 못한 형제는 이로 인해서 겉으로의 대범한 행동과는 다르게 내면으로는 더욱 더 큰 갈등을 느끼고, 믿음이 온전하다고 하는 사람이 다니는 그 교회에서 돌아서서 신앙의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는 내가 지식으로만 행하였을뿐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의 행함’은 나 자신만 생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나만 하나님 앞에 떳떳하면 되지 다른 사람의 눈이 무슨 상관이 있나?’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따라 행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넘어지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약한 형제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나만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신’ 까닭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거리낌 없는 행동이 나에게는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피는 것도, 입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지식이 있는 나에게는 거칠 것이 없고 양심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는 나의 먹고, 마시고, 피고, 입는 것이 지식과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거칠 것이 되고 나를 따라 하는 그 사람의 양심을 여전히--아니 더욱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면, 지식과 믿음이 있는 나는 그 형제에게 죄 짓는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나의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지식의 행동’이 그 믿음이 약한 형제까지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 짓는 일이라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식 위에 사랑을 따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13절에,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로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세상에 신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지식이 있는, 내게는 조금도 거리낌이 되지 않습니다.

술을 병째 마시고, 담배를 피고, 마리화나나 기타 세상의 어떤 환락을 즐기는 일 등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내게는 자책꺼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도 사소한 일이라도 나의 하는 일이 지식이 없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실족하게 될 때 그 일을 삼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4장 21절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우상의 제물이었던 고기인 줄 알면서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고 포도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 위에 형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내게는 전혀 자책꺼리가 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주위의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일 때 이를 자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위의 형제에게 거리낌을 주는 것인 줄 몰랐을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그리스도에게 죄 짓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내가 나의 행동 중에 어느 부분이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거치는 것이 됨을 알았을 때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과감히 나의 자책함이 없는 행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3
1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행함’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 앞에서뿐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아마, 지식만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지식 위에 사랑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이 형제로 실족지 않게 하고 하나님 앞에 덕을 세우게 합니다.
 우리 한 사람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자녀로 발견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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