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4, 2014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고전 7:17-24)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고전 7:17-24)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먕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1
바울이 살던 1세기 중엽 고린도 지방은 여러 가지로 혼합된 사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라의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헬라인들 이외에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노예를 거느린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주인과 종이 한 가정교회에서 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니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됩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자의 궁핍 가운데 그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부자들은 더욱 더 큰 세상 복을 허락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주인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종은 종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신 주님을 찾습니다.
이러한 혼합된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기에 그들의 모든 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변신하셔야 합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할 때 나를 사로잡던 하나님의 말씀이 부자가 되니 나에게 부담이 됩니다. 그보다는 부한 자의 세상 삶을 정당화시키는 성경구절이 없나 열심히 살핍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Bill Leslie)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점점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서 좋아하는 찬송가가 전에는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에서 이제는 ‘이 세상은 내 아버지께서 지으신 것’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19-20세기에 걸쳐서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즐겨부르던 영가(靈歌)는 하늘 나라와 연관되어있습니다: “내가 탄 마차는 저 하늘 나라 올라가네,” “내가 하늘 나라에 가면 내 옷을 걸치고 천국이 떠나가라 소리치리라,” “주께서 우리를 본향(本鄕)으로 부르실 때 우리는 자유로우리라.”
그들에게 이 세상은 살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노예를 부리던 백인 주인들에게는 설령 하늘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그들이 누리던 권세보다 큰 권세를 누리며 살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 말씀이 부담이 되거나 별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 5:3-10).

필립스(J.B. Philips)가 이것을 이 세상 세태에 맞추어 고쳐봅니다:
“약삭빠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위가 오를 것이요/무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요/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마침내 제멋대로 갈 것이요/환락에 빠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죄를 갖고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요/노예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 노예들이 수고한 대가를 누릴 것이요/유식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 것이요/말썽을 일으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가난할 때, 고통 중에 있을 때는 고난받는 메시야가 마음에 부딛혀왔는데, 삶이 윤택하여가고 세상의 성공을 붙잡은 것같게 되니까 더 이상 고난받는 메시야(suffering Messiah)를 원치 않게 됩니다. 그보다는 왕노릇하시는 메시야, 세상 복주시는 하나님을 찾게됩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께서 각각 그 선하신 뜻대로 그들에게 합당한 사명을 맡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여러 가지 형편과 모양이 다른 사람들이 또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교회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 다른 모양의 사람들을 통하여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증거케 하시고 확장해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모양이 다른 우리들의 공동기도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17절에서 바울은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모양이나 환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베푸신 혹은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나의 모양과 형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각각 다른 모양과 용도로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여자라서 남자보다 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부자보다 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요, 남의 집에 하인이기 때문에 주인보다 하나님을 찬양드릴 수 있는 시간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평과 불만은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일을 적게 할 수밖에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만 주님을 찾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뇌성마비로 팔다리와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는 송명희 시인은 주옥같은 시(詩)들과 간증의 글들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그가 발견한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가 최근에는 목의 디스크로 그야말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입니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있는 말을 다 들으셨을 것이니이다.
                     나의 주께서 내 마음의 비밀을 다 아실 것이니이다.
                           나의 외로움을 아시고 내 심중의 번뇌를 다 아실 것이니이다.
            그러기에 나의 말들을 들으실 이가 있고 나의 비밀을 아시며
                    내 모든 외로움과 번뇌를 경험하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나의 사랑을 주께 드리리이다. (「나의 사랑을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나는 가난한 자라도, 종 된 사람이라도 참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한 자라도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마음을 낮추고 비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면 말씀 중에, 기도 중에, 찬송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나 결혼한 자나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을 찾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세기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유다가 시리아(Seleucids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때에 경기장에서 벌거벗고 맹수와 싸움을 하던 유대인 투사들 가운데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숨기기 위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할례의 표로 잘라낸 표피를 다시 덮는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방인들 중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믿음뿐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함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의 목소리로 인해 할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구원은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나 무할례자인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기에, 할례자가 무할례자가 될 것이 아니요, 무할례자가 할례자가 될 것이 아닙니다.
결혼과 관련하여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현재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결혼을 하여야지만 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현재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배우자와 헤어져야지만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하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할례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할례받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과 관련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에게 할례받는 일은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지키는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정에 처음으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이 그의 나이 99세이고 하갈과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은 나이는 13세였습니다(창 17:24-25).
하나님이 명하시되, “무릇 아브라함의 가정에 머무는 자는 집에서 난 자나 이방사람에게서 돈을 주고 산 자나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 17:12)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헌신의 의미’로 할례를 행케 하셨으며 이를 언약의 표징(창 17:11)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예를 따라 할례를 행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함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육체에 행하는 형식적인 할례가 중요하지 않고 마음 중심을 드리는 내면의 할례가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말라”; 신명기 30장 6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말씀하고; 후에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할례를 행하되 마음으로는 주님께서 멀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무할례시에 부르시고 그가 무할례시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무할례시에 부르신 것은 그의 믿음의 마음을 보시기를 원하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은 17절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고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잘 생겨서, 배운 것이 많아서, 부유한 자라 더 많이 바칠 것같아서, 세상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라 교회 사업에 유익할 것 같아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 믿음의 씨를 보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믿음의 씨가 있어서 부르심을 받기는 받았는데, 이제 우리의 세상 형편이 더 나아져야지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좋은 세상 형편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를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그 사람처럼 되게 해달라고 떼쓰고 욕심낼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21절에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종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다른 사람의 종노릇하지나 않을까?’고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다 자유자로서 날마다 기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마음에 합한 사람을 못만났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나는 독신으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지나 않을까?’ 쓸 데 없는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장가가는 것도 시집가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독립적이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같은 하나님 안에 속한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상급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세상을 살 때에는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남자와 여자가, 종과 자유자가 각각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들의 번역은 두 가지로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은 “자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종의 상태를 (최대한) 선용하라.”고 양보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But even if you are able to be free, make use of your slavery.)
원어에 가까운 번역은 후자인데, 이렇게 번역하지 않음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배제하고자 함인 듯합니다. 어떻게 번역해도 뜻이 통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람의 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종과 자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누구에게 예속되었나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과 자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억지로 일을 감당하느냐 아니면 자원함으로 일을 감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면 그의 신분은 종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일을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할 수 있으면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유자이나,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고 그에게 예속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예속시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을 자원함과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함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5-6절에 보면, “(상전에게 속한)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영원히 섬기리라’고 결단함으로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한한 기쁨인 한에서는 하나님의 종된 삶을 살 것입니다.

23-24절은 앞의 6장 20절의 변형된 반복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6장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누가 어떠한 값을 치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피값을 치뤘습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도 우리의 주인이셨는데, 옛뱅의 유혹으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후에 사단이 소유권을 주장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하시고 이를 바라보는 자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속(=redeem, purchase)하셨습니다.
세상을 살동안 종된 사람의 육체는 주인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사실이나 그의 마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것이며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인종이나, 성이나, 재물이나, 학식이나, 명예나, 기타 모든 외양과 환경은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영영히 설 것입니다.

3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자유자입니까? 종입니까?
결혼을 하여 자녀를 둔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혼이거나 혼자 사는 몸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한 자입니까?
배운 것이 많습니까? 아니면 적습니까?
지위가 높습니까? 낮습니까?
이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까?
세상 가운데 세상의 일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