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4, 2014

“성도의 결혼(結婚) 문제” (고전 7:1-16)

“성도의 결혼(結婚) 문제” (고전 7:1-16)
            
  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權道)요 명령은 아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恩賜)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婚姻)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
아주 먼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나뉘지 않고 한 육체 곧 앤드로지니(androgyny)로 존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앤드로지니(androgyny, androgyne, androgynous)라는 단어는 자웅(암컷-수컷)동체를 뜻합니다. 앤드로(andro-)는 남성적인 것을 의미하며, 지니(-gyny)는 여성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남성병학을 andrology라고 하고, 부인과(婦人科)를 ‘gynecology'라고 합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처음 한 사람--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처음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신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온전한 남자’라고 하기 보다는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였지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마련하시는데(창 2:18) ‘또 다른 온전한 사람’을 지어서 함께 있게 하시는 대신에 그 ‘온전한 사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시어, 이제 ‘온전한 사람’에서 ‘불완전한 반쪽의 남자’로 되어버린 아담과 함께 거할 ‘또 다른 반쪽의 여자’로 두셨습니다. 해서, 인간은, 사람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다른 반쪽 찾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자기의 또 다른 반쪽을 만나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반쪽을 못만나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반쪽 찾기를 포기하고 자기와 별 상관없는 반쪽과 결혼하여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반쪽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를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어에서 주로 아내를 ‘better half(더 좋은 반쪽)'이라고 하는데, 이는 창세기 2장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속 중에 가장 귀하고 단단한 부분인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신 까닭입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은 그의 아내인 이브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중국 한자어의 생성이 창세기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중국사람은 자기 아내를 내자(內子)--안사람 혹은 속사람--라고 불렀고 한자의 영향을 받은 한국사람도 아내를 내자(內子)라고 불러왔습니다. 여자가 집안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내자(內子)--안사람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의 것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안사람이란 것입니다. 육체를 뜻하는 육(肉)은 한 사람의 속(=내)에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육체)을 이룰지라”고 이른 대로,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이 ‘육(肉)’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이단(異端)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창세기 창조자 하나님의 인간 지으심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천상의 참 하나님(unknown foreign God)이 어느날 그의 천사에게 천지와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라고 지시하십니다.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불리우는 이 천사는 혼자 (혹은 영지주의파에 따라 일곱 천사가) 그 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천지를 만들고 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아담--을 만듭니다. 그 창조가 그의 마음에 들기에 그는 참 하나님을 배반하여 그 지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을 창조자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이 본성으로 참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로 돌아감을 막기 위해서 그에게서 여자를 떼어 만들고 여자에게 빠져버리게 하므로 그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방해하거나 상실케 합니다. 이 창조자(Creator)라고 자칭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는 이것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기 이외에 다른 어떠한 신을 찾는 자에게는 저주를 선포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애굽기 20:3-5).

이들은 참 하나님이 데미우르고스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인간을 영으로 구속하여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이와같은 진리를 깨닫는 영지(gnosis)를 가진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 이단(異端) 영지주의자들중 일파는 참 하나님이 아닌 자칭 창조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여서 철저한 금욕(禁慾)과 독신(獨身)을 고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계통의 영지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은 오직 영(靈)만 구원을 얻을 것이고 육(肉)은 무익하므로 어떠한 생활을 해도 좋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육체를 음란(淫亂)에 내어맡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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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결혼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수만 있다면 이것이 더욱 좋다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결혼문제에 관해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하는 바--“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에 의하면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알았는데,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을 해도 무방하나 결혼을 안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니,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과 배치(排置)되는 것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바울이 영지주의자이기 때문에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던 때를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멀지 않은 시대라고 판단해서입니다. 종말이 임박하여 음행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혼을 하였는데 아내 혹은 남편과 자식을 생각함이 지나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등한시하여 종말의 때를 준비하지 않은 마음으로 맞지 말자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행복하고 조화된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불협화음과 이로 인한 이혼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의 문제를 갖고  나왔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사람이 아내에게 이렇게 하느니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인 듯 여겨집니다’고 아룁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11-12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하느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3세기의 교부 신학자 오리겐(Origen)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는 말씀을 좋게 여겼고 음란의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거세(去勢)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그는 후에 ‘궂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주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한 남자에게 또한 한 여자에게 부부관계의 성경적 의미는, 첫째는, 같은 바울이 에베소서(5:22-33)와 골로새서(3:18-19)에서 말씀한 대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우리 믿음의 사람과의 관계를 알고자 함입니다. 또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자 함입니다.
둘째는, 창세기 1장 28절에 기록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과 관련하여 자손을 번식하여 하나님의 축복에 응하는 삶을 살고자 함입니다.
셋째는, 창세기 2장 18절의 말씀과 연관하여 홀로 지내는 외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넷째는, 바울이 오늘 본문 2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결혼함으로써 ‘음행의 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잘 아는 바울이 궂이 결혼하지 않음은 임박한 환란의 때에 주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한 자기희생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3-5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 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5장 22절이하에서 기술한 대로, 남편의 의무는 ‘아내 사랑’이요, 아내의 의무는 ‘남편에게 대한 복종’입니다. 나의 의무를 지키지 않고 다른 쪽의 의무만 강요할 때 이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않습니다.
이왕에 결혼하여 남편과 아내된 자들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리 할 때, 사단이 그들을 시험하여 다시 음행의 죄를 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권고는 그리스도를 위함에서 나옵니다.
결혼을 하는 자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자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인들도 그렇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독신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독신은 혼인이라고 하는 계약에 매이지 아니하고 좀더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인데, 이는 바울의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는 말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7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恩賜)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함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지나친 음행의 마음이 들지 않고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각각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느니라”고 말씀한 대로입니다. 크리스찬이 결혼을 해도 주를 위한 것이요, 결혼해도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8-9절에서는 현재 혼자 지내는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자 지내는 사람들은 주님의 날이 가까우므로, 내가 독신으로 주를 위해 복음증거에 힘쓰는 것같이, 혼자 지내면서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면 주를 위해 유익함보다는 해(害)가 많을 것이기에 혼인하는 것이 낫습니다.’고 하는 권고입니다.

10-11절에서는 기왕에 결혼한 크리스찬 부부가 있는데 그 결혼생활이 평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갈라서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것은 바울의 권고인 반면에, ‘결혼을 한 사람은 갈라서지 말라’는 것은 바울 개인의 권면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9장 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12-16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결합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12-14절에서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크리스찬은 믿음이 더 좋은 혹은 자기의 믿음에 합하는 크리스찬과 결혼하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므로 교회에 출석하는 문제, 주님을 섬기는 문제로 인한 갈등과 충돌을 줄일 수 있습니다.

바울이 12-13절에서 말씀함은 기왕에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와 결혼한 사람의 경우입니다.
상대방이 믿는 자기와 같이 살기를 원할 때, 그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이란 이유로 헤어지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만일 그리할 때 이 사람은 두 번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가 믿음을 갖기가 참으로 어렵지만, 그와 헤어짐은 그로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스도를 욕먹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없음을 참으며, 사랑으로 혹은 복종으로 대할 때, 믿지 않던 배우자가 그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일에 믿지 않는 남편이나 믿지 않는 아내와 헤어지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그들 부모의 불화와 헤어짐으로 구속함--깨끗함에 이르지 못할 수 있으나, 믿지 않는 한편의 부모가 다른 편의 부모로 인해 거룩해짐을 본 자녀들은 이로 인하여서 그들도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15절에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2-14절은 믿지 않는 쪽이 같이 살기를 원할 때인 반면에, 15절은 믿지 않는 쪽이 갈라지기를 원할 때의 예입니다. 만일 그가 ‘나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갈라서기를 요구할 때 이혼함에 자책함이 없이 갈라서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안하려고 할 때, 이 사람은 믿지 않고 그와 살기를 원치 않는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로 속앓이를 함으로 그 자신도 믿음의 삶에서 떠나 고통 중에 지나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부르심은 그 사람에게 믿지않는 남편이나 아내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평을 주기 위해서인 까닭입니다.

또 다른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에서 또 다른 문제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리기를 원하지는 않으나 신앙의 문제로 계속 괴롭힐 때입니다. 때로는 교회생활을 못하게 모진 방해와 매질과 핍박을 가합니다. 그리할 때 이는, 할 수만 있다면 견디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일입니다.
믿는 사람끼리의 결혼에서도 충돌이 많은데, 하물며 믿지 않은 사람과의 결합에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같이 살기를 원하면서도 종종 핍박을 가할 때, 이는 그 믿는 사람의 십자가입니다.

16절에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와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의 구원이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풂으로써 그 사람이 혹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결혼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울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음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많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결혼생활이나 독신생활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인데, 오늘 바울이 권면하는 결혼생활이나 독신의 삶은 오로지 그리스도 주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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