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경쟁상대인가?” (고전 9:24-27)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류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冕旒冠)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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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 가운데 흥행에 크게 성공한 로키(Rocky)란 영화가 있습니다. 실베스타 스텔론(Silvester Stellone)이 주연한 것으로서 실존인물인 권투선수 로키 마르시아노(Rocky Marciano)를 영화한 것으로서 흥행에 대성공하자 시리즈로 계속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링에서 싸우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실전(實戰)을 준비하기 위해 한 복서(boxer)가 어떻게 훈련을 쌓아가나 보는 것도 상당한 흥미꺼리입니다. 실전(實戰)에서의 승패가 이 훈련과정에서 이미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표면의 화려한 각광(脚光)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숨은 피와 땀은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만 그들이 잠시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그들의 영광(榮光)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쌓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데 조금 쌓아놓은 믿음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어떻게 쌓아갑니까? ‘상급을 얻을만한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입을 여는 증거들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의 삶들입니다.
하루 아침에 마음만 먹으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impossible)입니다.
자기를 이기는 극기(克己)의 훈련이 없어도 요행히 한두 번은 (조그마한)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행일뿐이며 횟수가 거듭될수록 훈련의 진가(眞價)가 발휘됩니다.
믿음의 훈련이 없어도 사람들 앞에 ‘믿음의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그렇게 보일뿐입니다. 설령 일주일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사람들 앞에는 ‘믿음의 사람’으로 비춰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과정’을 누누히 운동경기와 이를 위한 훈련에 비유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연습하다’(exercise, train)란 말은 스포츠 용어입니다(굼나조, γυμνάζω→gymnasium).
크리스천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피와 땀을 흘리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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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고린도 지방에서는 올림픽(Olympic) 경기에 버금가게 큰 이스미안(Isthmian) 경기가 매 2년마다 열렸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밖에도 투사들(gladiators)의 싸움 등 여러 운동경기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울은 운동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승리를 위한 훈련과 상 얻기를 위하여 경주하는 모습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합니다.
올림픽 경기의 정신이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패자(敗者)를 위로하는 말일뿐입니다. 특별히, 훈련을 많이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역부족(力不足)이라 메달권에 들지 못한 선수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메달(medal)에 대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여져서 한국에서는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선수에게는 금일봉을 하사한다고 난리들이며, 미국과 같이 메달을 독식(獨食)하다시피 하는 나라에서도 프로농구스타들을 내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극한의 훈련을 감수하는 선수는, 할 수만 있으면, 실전(實戰)에서, 입상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경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동양선수가 우승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경주에서는 역부족이라 메달을 못타는 경우는 없습니다.
24절에서 바울이 비교한 세상의 경기와 크리스천의 경기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양쪽 경기 모두 경주하는 선수들은 상얻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훈련을 쌓아오고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 경쟁하기를 원하는 선수들이라면 처음부터 ‘참가하는데 의의’를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점은, 세상의 경기에서는 상을 얻기 위한 경쟁상대가 다른 선수들이지만, 크리스천의 경기에서는 경쟁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정과 욕으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겉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얻습니다.
몇 년 신앙생활을 한 후에도, ‘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滿足)하지 상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며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그것은 마치 현재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자체로 만족하지 내가 아무리 멸시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가운데 영원히 살아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상 얻기를 위하여 극기하고 열심히 겸손과 순종의 믿음 훈련을 하였는데 상을 못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달란트와 그 경영(經營)에 따라서 우리를 판단하시고 상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매일 매일의 훈련을 쌓아가서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권투경기를 며칠 앞둔 권투선수는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면 아내와 분방(分房)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즐기던 술도 일체 하지 않고 충분한 연습과 최상의 컨디션(condition)을 유지하는데만 전념(專念)합니다. 이는 그의 모든 힘을 축적(蓄積)하여 시합날 혼신(渾身)을 30-40분에 다 쏟아붓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합을 며칠 앞두고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節制)하는 것은 이제까지 피땀 흘려 준비해온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고 결실을 맺어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자 함입니다. 만일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절제(節制)하지 못한다면 몇 달의 그의 수고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주(競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도 이와같이 모든 일에 ‘항상’ 절제하는 삶을 살 것은 그가 사모하는 면류관--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자 하는 바울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신앙고백했습니다.
25절에서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과 크리스천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이나 크리스천의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이나 이기기를 다투어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점은, 세상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은 곧 시들어버리고 그 영광도 잊혀질 것이지만, 선한 경주에서 이긴 크리스천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이며 그 영광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영히 계속될 것입니다.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向方)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虛空)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선한 경주를 위하여 훈련하고 실전에 임하되 나의 하는 일이 무엇이며 나아가는 방향(方向)이 어디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임의(任意)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는 권투선수가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듯 허공을 칠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기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경기할 것입니다.
자신의 흥에 겨워 자신을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위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경기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규정대로 신앙생활을 하여 주위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여 주시기에 감사와 기쁨이 샘솟는 크리스천의 경주를 하여야 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26절을 번역할 때,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목적(目的)을 갖고 목표(目標)를 향해 ‘똑바로’ 달려갑니다. 나는 승리하기 위해 싸웁니다. 나는 다만 동작으로만 싸우거나 주위만 맴돌지 않습니다. (So I run straight to the goal with purpose in every step. I fight to win. I'm not just shadow-boxing or playing around.)”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훈련과 삶 하나 하나가 의미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ὑπωπιάζω μου τὸ σώμα καὶ δουλαγωγώ)--원문을 직역(直譯)하면, “내가 나의 몸을 심하게 다루어서 종으로 삼음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은 변화를 받고 상을 얻게 되었는데 바울 자신은 정과 욕심에 빠져 상을 잃어버릴 경우가 있을까 두려워함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서 그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상을 얻는 자가 될 것이며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자가 되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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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상을 받을지 모르며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을지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지식이 없습니까?
지식은 있습니다.
갓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어떻게 상과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믿는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의 선한 경주에 참가한 사람이며 이를 위한 훈련을 쌓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면류관을 바라보는 마음이며, 이를 위한 실천입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모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요행 수로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경주는 요행으로도 한두 번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심판관(審判官)이신 경주에서는 요행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뜻을 세우고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은 남을 이기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를 이기기가 어려워서인 까닭입니다. 노자(老子)도 “자기를 이기는 것을 (가장) 강한 것으로 한다.”고 했는데, 크리스천의 경주에서 우리의 경쟁상대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태만(怠慢)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집고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우리를 방해(妨害)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나라의 상급과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철저한 믿음의 훈련을 쌓아나가며 선한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얻기를 사모하는 것들을 마침내 얻는 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