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7, 2014

“교회 내의 송사의 문제” (고전 6:1-11)

“교회 내의 송사의 문제” (고전 6:1-11)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1
예배나 어떤 성경모임이나 기도모임에 참석하던 사람이 한 번 빠지면 마음에 자책감(自責感)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이건 두 번 빠지고 세 번 빠지면 자책감을 갖는 대신에 자기의 빠지는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그 예배가, 모임이 나의 신앙적인 바람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든지, ‘그 모임에 누구로 인하여 나의 신앙이 자라기는커녕 시험을 받는다’든지, ‘꼭 그 모임이 아니더라도 혼자 기도하고 성경 봄으로써 나의 신앙을 자라게 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나의 바쁜 일을 하기 위해서 당분간 주님의 일을 뒤로 미루겠다’든지... 그러나 이러한 말이나 생각 등으로 자기 변명 내지는 자기 정당화를 한 사람들의 신앙이 그 이후에 나아지는가 하면 99%이상이 정체(停滯) 내지는 퇴보(退步)를 걷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함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혹은 세상 일로 하도 바뻐서, 혹은 다른 성도들도 자기의 안일함에 동참케 하기 위하여 그리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 날(=주님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한 번 모이던 것을 두 번 모이고, 두 번 모이던 것을 세 번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혹은 빠져들기 쉬운 것이 안일(安逸)함입니다. 무사안일주의(無事安逸主義)입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평안하면 좋을 것같습니다. 나에게 아무 걱정, 근심이 없으면 신앙이 잘 자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설적(逆說的)인 말입니다만, 신앙의 성장은 평안할 때보다 고난이 많을 때, 역경이 많고 시간에 쪼들릴 때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후에 과연 여유가 생길 것인가?’도 의문이고, 혹 여유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는 세상살이에서 고생한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쾌락에 탐닉하는 삶은 살지언정 좋은 신앙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늙고 병들게 하는 것은 육체적 나이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늙음입니다.
‘내가 쓸모 없구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구나,’ ‘나는 아무 비전이 없다’는 생각들이 그 사람을 무익한 사람으로 만들고, 치매(癡呆)나 다른 병에 걸리게 합니다.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비전(vision)을 갖고 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요 교육가인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말대로 ‘우리 앞에 넘을 산이 없어질 때’ 우리는 인생의 끝에 서게 됩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전이 있는 성도가 모인 교회’는 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장(成長)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비전이 있기에 그 비전을 위해서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비전이 있기에 그 비전을 위해서 깨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면서 안락하게 잘 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또 다른 오류는 믿음과 실생활이 따로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연륜으로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보면 분명히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는 성경 가운데서도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장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문제들에 있어서 말씀이 제시해주는 대로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그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집단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기관이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는데 그 의논들이 성경의 적용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성경은 접어두고 자기의 생각들만을 주장하고 자기의 생각들로 다른 사람의 의견 제시에 반대함을 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송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교인끼리의 다툼이 있을 때 그 판단을 교회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판단을 받는데, 상대방이 막무가내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정말로 옳은 사람이 이것이 억울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보기 위하여 세상법정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차라리 불의(=불이익)를 당하라.”고 합니다. “차라리 속아주라.”고 합니다(7절).

한인 교회에 종종 일어나는 교회 건물이나 재산을 둘러싼 목회자와 장로들 간의 갈등과 법적 소송이나 지난 번 한국의 장관부인 옷 로비 사건으로 인한 같은 교회 여집사의 권사에 대한 법적 소송 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법칙에 따라 살고자 하는가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법적 소송을 제기한 적은 없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법칙에 의지합니다.

2
1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訟事)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 하느냐?고 말씀합니다.
‘다른 이’라고 함은 같은 교회 내의 형제 혹은 자매입니다.

세상의 판관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간에 판단 받을 일이 있을 때 이를 세상 법정으로 갖고 가는 대신에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시비거리를 잘 찾는 사람들은 아마 ‘세상 판관 가운데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이 불의한 자들입니까?’고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한 적용 법칙이 세상 법정과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은 배상(賠償)과 보응(報應)의 법칙을 적용하지만, 교회내에서는 사랑과 용서의 법칙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현재는 세상의 일들이 성도와 별로 상관이 없지만(5:12),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될 때 성도들이 세상의 악한 자들의 판단의 주체가 됩니다.
말라기서 4장 3절에 “또 너희(=의인)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다투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기를 서슴치 않는 일을, 바울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천국의 기업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같은 교회의 형제나 자매로 인하여 당하는 불이익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작은 일”이란 것입니다.
성도의 천국 기업에 비교하여 “지극히 작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 했습니다.
판단은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 “천사를 판단한다”고 함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의 지위가 천사보다 위에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주님의 날이 임할 때 성도들은 그들을 괴롭히던 타락한 천사들이 무저갱에 갇히는 심판을 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과 천사를 판단할 권세까지 가진 성도들이 자신과 교우의 문제를 갖고 그들의 판단의 대상이 될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게 판단을 의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교회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의 판관은 세상사람들에게는 중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나 바울은 이 사람들이 교회의 믿음의 기준으로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5-6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 거듭 반문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평상시에 하나님의 말씀 법칙에 따라서 살아간다면 교우들간에 어떤 다툼이 있을 때 이들의 문제를 말씀에 기초하여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이 말씀을 접어놓고 세상의 학식과 판단으로 살아가기에 교회 안의 일이라도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대신에 세상 법정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형제로 더불어 송사하는 그 자체입니다. 차라리 조금 불이익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날 일인데 조금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두 번째는, 다툼이 안 일어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다툼이 일어나도 교회 내에서 믿는 자의 믿음의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 지혜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송사꺼리의 근거를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송사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완연한 허물”이 됩니다. 세상 법정에서 승리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 가운데는 ‘패한 자’가 됩니다. 어떤 다툼거리, 송사거리가 있을 때 하나님의 법정에서 진정한 승리는 불의당함을 감수하는 자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이 하나님의 말씀 법칙에 따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지 않고 불의를 감수함이 때로는 죽기보다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불이익이 가장 큰 것 같고, 자신이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이를 감수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참으로 바보같고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이신 마태복음 5장 39-40절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 편 뺨을 맞을 이유가 있어서 맞은 것이 아닙니다. 속옷을 빼앗길 잘못을 하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는 줄 뻔히 알면서 이용당해 주는 것, 상대방이 나를 속이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것,  상대방이 나를 뒤에서 욕하는 줄 뻔히 알면서 그 사람을 품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에게 거기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8절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의 형제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와는 반대됩니다. 우리가 오히려 불의를 행하고, 우리가 오히려 속입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삶의 모습입니까?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迷惑)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세상 법정에 나가는 불의를 행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할 때, 그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성도는 세상 살 동안에 당하는 작은 불의를 오히려 기쁨으로 감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하나님보다 세상에 속한 것을 더 사랑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지나치게 쾌락에 취하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ㅡ-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자ㅡ-나, 후욕하는 자--남을 욕하거나 비방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남의 것을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우리가 가질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그 믿음이 ‘나의 삶이 어떠해도 좋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그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며 나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에 합당한 자녀되게 하여줍니다.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설파(說破)한 로마서의 6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씀함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죄와 결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송사를 하는 자가 여전히 있고, 음란을 행하는 자가 있음에도 이와 같이 씀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바램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영적인 자녀들로 생각하기에(4:14) 그들이 속히 이러한 잘못됨에 돌이켜서 성령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혹은, 바울의 권면을 따라 그러한 삶에서 돌이킨 자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부요한 삶이 약속되고 보장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의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교회의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속임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바보같이 보이는 성도가 될 때,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교회 밖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여유이요 관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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