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6, 2014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고전 5:1-8)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고전 5:1-8)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犧牲)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怪惡)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1
루마니아의 쿠르디아디 알케쥬라는, 한 작은 도시에서 약 500년 전에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설계사로 마노오레라는 사람이 선정되어 교회를 짓는 중에 건축구조에 대한 설계 잘못으로 세 번이나 교회당이 무너져내립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지역 주민들은 이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고 불안해하고, 교회의 사제는 하나님의 노여움이라고 단정하여 그 지방 수령인 밧사부라 공에게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는 이 지방의 어떤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건의하자, 그는 사제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여, 사제와 설계사를 불러 이 뜻을 전합니다. 권력자와 종교인, 그리고 건축설계사가 한 자리에 앉아서 이 문제를 결정하는데, 설계사 마노오레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건축설계 실수 때문임을 압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직하게 자기의 실수를 고백하면 처벌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누구를 제물로 드릴 것인가 의논을 하던 중에 다음 날 아침 맨 처음 그 교회당 앞을 지나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기로 결정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세 사람은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교회당 부근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교회당 앞을 지나갑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달려가 잡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마노오레 설계사의 부인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남편을 기다리다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건축 현장에서 수고하고 있을 남푠을 생각하며 식사를 준비하여 현장에 오다가 붙잡힌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치 않는 비겁의 죄가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을 잃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였을 때 선지자 나단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그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가 죽기로 다윗의 잘못을 간하였을 때, 다윗은 이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밧새바와의 사이에 난 첫아들을 잃게하시고, 또한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다윗을 문둥병에 걸리게 하시나, 그의 기도(시편 51편)를 둘으시고 그를 낫게 하십니다.
만일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 없었다면, 무슨 잘못을 범하였는지도 모른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치 않아 망하였거나, 아니면 후에 더욱 커다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2
1장 10절로 시작하여 4장 21절에 이르기까지 교회내의 분쟁에 대해서 다룬 바울은 이제 세 가지 도덕적 혼란을 언급합니다. 곧, 근친상간의 음행(5:1-13), 소송(6:1-11)과 방종(6:12-20)의 문제가 그것들입니다. 오늘을 그 첫 번째인 음행의 문제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중에 음행(πορνεία)을 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음행이란 무엇인가 하면, 아비의 첩들 가운데 하나를 취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음행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방인 중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절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음행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보고도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물리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교만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만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도 무감각합니다.
음행한 자를 보면서도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물리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삶 가운데서 물리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도 분개하지 않습니다. 물리칠 생각은 더더우기 할 수 없습니다.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떠나있는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 내에 음행의 문제가 있음을 들었을 때 바울의 심정을 안타깝습니다. 그가 멀리 떠나있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이미 이 일 행한 자를 “판단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판단하다”(κρίνω)란 말은 “비판하다,” “정죄하다”란 뜻의 단어인데, 4장 3-5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4장 3-5절에서는 “판단치 말라” 하였는데, 여기서는(5:3) “판단하였다” 하니 어떤 사람은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비판(=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Μὴ κρίνετε ἵνα μὴ κριθήτε)고 밀씀하셨는데, 여기서 “비판하다”(κρίνω)에 사용된 단어와 바울의 “판단하다”(κρίνω)에 사용된 단어가 같고 결국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도가 판단해야 할 문제가 있고, 판단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판단할 문제는 판단치 아니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립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각 개인의 성격 차이, 선호도의 차이,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입니다. 이럴 때, 나와 성격이 다르고, 선호도가 다르고, 견해가 다른 사람을 판단(=비판)함을 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위배되지 않는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보면서 상대방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는 잘못입니다.

그런가 하면, “판단하지 아니함”이 잘못인 문제가 있습니다.
“판단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말이나 생각이나 행위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믿음 없는 행동, 마땅히 제하여 버려야 할 음행이나 분쟁, 기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입니다.

4-5절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소란케 하거나 교인 전체의 깨끗하고 바른 믿음생활에 장애(障碍)를 초래하는 사람을 교회 밖으로 내어모는 것이 참으로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고 인정머리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 일 범한 사람을 죽이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교회 전체를 더럽게 할지도 모를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잠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치 않고 계속 그러한 삶 가운데 있는 사람을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그런 일을 하여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그 일 범한 사람의 육신뿐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죄를 공동으로 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교회 밖으로 내어모는 것(=“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출교[excommunication])이 당장은 인정이 없고, 사랑이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리함으로 이 사람이 후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있다면 이 사람의 영혼은 예수님의 심판 날에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함이 그 사람의 음행을 묵인하거나 감싸주는 것보다 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6절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한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이러한 음행 행한 자를 그들 가운데 그대로 둠이 사랑의 행위라고 자랑합니다. 그들에게 용서가 많다고 자랑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음란이 그들을 넘어뜨리지 않는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고 지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음행 행한 자를 묵인하고 용납함은 사랑이 아니요, 용서가 아니요, 믿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음행 행한 자를 권고함이 믿음과 사랑이요, 그가 회개하였을 때 그를 받아줌이 용서입니다.

누룩이 빵의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교회 내의 묵인된 죄는 또 교회 전체에 퍼져갑니다.
선한 일은 본받는 사람이 많지 않고 잘 전파되어지지 않는데, 악한 일은 잘 퍼지고 동화(同化)되는 힘이 강합니다. 마치 유리병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을 때 병 속의 물 전체가 까맣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을 다 몰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들으면, 하나님은 인정이 없으시고 잔인하시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들을 다 몰아내지 못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섬기고 있던 우상들--바알과 아세라, 몰록과 그모스등을 섬김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냥 두셨습니까?

북방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722 BC), 남방왕국 유다는 주전 605년부터 느브갓네살의 바벨론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 시작하여 주전 586년에는 포로로 끌려갑니다. 70년 뒤에 그들이 돌아왔지만,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이킴은 잠깐뿐이요 다시 가나안 거민들이 섬기던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상심시켜 드립니다.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든 죄가 사함받아 누룩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고자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믿음의 사람들이 온덩어리를 죄로 가득 차게 하는 누룩을 그 가운데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유월절(踰越節)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애굽 땅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믿는 자들)의 장자들을 애굽(=세상)의 장자들로부터 구별하여 살리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한 가지로 명하실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引枋)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죽음의 천사가 이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지나가겠다(=유월)고 말씀하십니다. 곧, 어린 양의 피가 죄된 세상인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별하여 죄 없는 백성의 표시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그의 피를 우리 몸에 바를 때, 죽음의 천사가 우리를 유월(踰越)하여 갑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으므로 우리가 죄 없는 자 된 까닭입니다.

8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怪惡)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장자들을 애굽의 장자들로부터 구분하여 살려주신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과 무교절의 명절(=절기)을 지킵니다: “(아빕월)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13:16).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명절을 지키되 누룩(=죄) 없는 삶으로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쾨쾨 묵은 오랜 습관의 죄성을 제하여 버리고, 죄의 모양이 괴상하고 악독한 것도 과감히 털어버리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되 순전함과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순전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아니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계속 우리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묵은 죄들을, 괴악하고 악독한 죄들을 믿는 사람의 공동체 가운데 간직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의 죄를 다 자백하고 벗어버릴 뿐만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현저하고 전염성이 강한 죄들을 지적하고 판단하고 공동체 밖으로 과감히 내어몰아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각 사람의 삶으로, 또한 공동체의 삶으로 섬길 때, 오직 순전하고 진실되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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