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ㅅ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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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분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고통이나 어려운 상황을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고 나눠 가질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이나 어려움이 아무리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헤쳐 나가거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서 수억 원 빚을 지게 되고 이제 집도 뺏기고 모든 가구도 뺏기고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는데 그 사람에게 있는 다섯 형제가 자기들은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발길을 끊고 고개를 돌릴 때 이 사람은 주위에 그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음이 야속하여 더욱 더 낙담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상황에서 가난한 형제들이 그 사람을 돕기 위하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고자 힘 쓸 때 그는 없던 용기라도 내어서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짊어질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할 때 심정적으로 위로가 될 수 있으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한 병에 걸려서 밤새도록 끙끙 앓고 있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아내란 사람이 무심하고 태평하게 옆에서 잠만 퍼 자고 있으면 참으로 야속하여 병세가 더욱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효부,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환자의 병 수발을 잘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딴에는 잘한다고 하는데도 환자에게는 마땅치가 않습니다. ‘나는 이제 얼마를 못 살고 죽게 되었는데’ 배우자라고 하는 사람이, 자식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아 속이 상하고 신경질이 납니다. 해서, 가족들에게 온갖 짜증을 다 부립니다. 이러한 사람의 병세는 호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환자도 이러한 사람들을 고마워하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면 병이 의외로 쉽게 고침을 받기도 합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아직도 고시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법고시에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는데, 아내란 사람이 구박을 합니다.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에요? 이번에도 실패했어요? 도대체 그 머리로 무얼 하겠다는 거예요? 이제 애들과 다 거리로 나앉게 되었어요. 아유 저 웬수.” 하면, 이 사람은 주눅이 들어 다음 시험에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마침내는 자포자기하는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기운을 내세요. 몇 번의 실패이건 실패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요 성공이에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은 꼭 해낼 수 있어요.” 이 사람은 용기를 갖고 다음 시험에 임하게 되고 그는 마침내 그가 추구하던 것을 이루게 됩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짊어질 어려움인데 다른 사람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때 어려움을 담당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려움이 더욱 더 가중되어 옴을 느끼기도 합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하듯이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합하고 협력하면 금방 좋아질 듯 한데 다들 남의 일 보듯 하고 있을 때 용기를 내려고 하던 사람도 주춤하게 되고 어려움은 점점 해결될 수 없는 처지로 치닫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고통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의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동일하게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을 사시는 인간 예수님으로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부담스럽고 두렵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며 예수님을 만류하였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좀 심한 꾸지람까지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마태 16:21-23). 따라서, 제자들은 이번 예루살렘행이 예수님께는 비장한 것임을 짐작은 하지만 다들 ‘설마 정말 죽으시기야 할려구’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도 예수님은 행동으로써 말씀으로써 그의 어떤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지 며칠 지난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각오가 비장하고, 제자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제자들은 선생님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하는 자가 없습니다.
만찬을 나누시고 그가 죽음을 맞이할 것과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말씀하시는데도(마태 26:31) 그것이 진정으로 무슨 목적을 위함이요 무슨 뜻인지 깨닫는 자가 없으며 깊이 알려고 하는 자도 없습니다.
다만 (아직 변화되지 않은) 베드로가 그의 투박한 공명심으로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노라”는 헛맹세를 할 따름입니다(마태 26:33).
이때 베드로에게는 아마도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죽음의 진실성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지금 이러한 ‘충성 발언’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인척이라는 유리한 입장에서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인사청탁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의 자리를 다 빼앗기고 그는 그들 밑으로 처질까봐 염려되어 이렇게 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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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의 만찬과 마지막 당부를 마치시고, 밤이 깊을 대로 깊었는데, 예수님은 미리 만찬의 자리를 빠져나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서 북쪽으로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중턱의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수십 그루의 감람나무들로 이루어진 작은 뜰입니다.
이곳으로 향하심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철저히 깨닫고 확인하기 위함이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같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한판 승부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러 가실 수도 있었는데, 왜 열한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마지막 씨름을 하시는데 심정으로 그를 지원하는 응원군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그와 고락(苦樂)을 같이하고 그의 현재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제자들이 그의 곁에 같이 한다면 그가 마음이 든든하고 힘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37절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덟명의 제자들을 한 곳에 남겨두시고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좀 더 깊숙이에 들어가십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he began to be sorrowful and troubled)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페오”(λυπέω)는 고통과 슬픔이 뒤범벅이 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위에 “비탄하다, 고뇌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아데모네오”(ἀδημονέω)가 더하여진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처절하게 고통스러우시며 비탄하시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면 피하지 미련하게 죽기는 왜 죽어?”라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만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면, 신실하신 순종의 아들 예수님으로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죽음만이 유일한 길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이제 기도로써 대면하고자 하심입니다.
38절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하고는 다른 예수님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에게는 속내를 드러내보이지 아니하시고 한적한 곳에 혼자 물러 가사 하나님께 기도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통스런 죽음”을 앞두고는 그 비통함과 고통을 마음 속에 담아두실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περίλυπός ἐστιν ἡ ψυχή μου ἕως θανάτου, my soul is very troubled even unto death)--“나의 영혼(마음)의 고통함과 비통함이 극심하여 죽기까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육적 죽음”을 경험하시기에 앞서서 예수님은 영혼의 고통함과 비통함으로 죽음을 이미 경험하시고 계십니다.
언제 교수대에 서게 될지 모르는 사형수에게 감방에서의 하루하루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날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초조하고 처절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래도 그렇게 초조하게 살던 것이 그래도 나았다고 얘기한다고 합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탁 또는 청원에 가까운 명령이십니다. 그의 속내를 어리석고 쉬 변하는 인간에게 드러내지 아니하셨던 예수님이셨지만, “내가 이제 고민이 하도 커서 죽게 되었으니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는 동안 너희--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어서 제발 나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해달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39절에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서서 하는 기도와,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와 엎드려 하는 기도가 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의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에서 “죽음의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며,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을 피하기를 예수님께서 얼마나 바라고 계시는지 알게 합니다. 그러나, 인류를 사랑하지 아니하심에 그런 것이 아니요 구원하실 의사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극단적인, 고통스런 방법말고 다른 방법은 과연 없는지 알기를 원하심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그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십니다.
40-41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생과 사의 기로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신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아무래도 그가 죽음의 잔을 마시는 것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데, 그와 삼년여 동고동락하며 그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서슴치 않을 듯이 하던 제자들인데, 지금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주님의 번민에는 아랑곳 없는 듯이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합니다. 게다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두고 데리고 다니고 하시던 제자들인데 이들의 무심함에 그의 고통이 더욱 더 가중되는 듯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모양은 약하기 때문에 마귀가 시람들의 평안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이용할 때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믿는 사람에게 영적 잠과 육신의 피곤함을 마냥 공급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변명하게 합니다. “나는 육신이 피곤하고 약하여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에 시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강건함도 허락하시며 모든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들로 먼저 영적인 잠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데, 이 당시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 아직은 없었을 때입니다.
42절에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변경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는 거의 확인하셨습니다. 해서, 두 번째 기도를 하시는데 이 기도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가 ‘죽음의 쓴 잔’을 내가 마시는 것이라면 그 모든 일이 아버지의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진행되어지기”를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인데, 마귀가 아버지의 원함을 방해하지도 말게 하시며, 예수님의 약한 육신이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게도 말게 해달라는 간구이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함이 철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순종의 예수님에 대해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43절에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 기도하신 후에 베드로를 위시하여 요한과 야고보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건만 그들에게 육신과 영혼의 잠을 몰아낼 능력이 아직은 없습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 눌러 그들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잠에 취하게 만듭니다.
잠에는 천하장사가 없습니다. 추운 겨울 술에 만취한 사람이 외진 곳에 쓰러져 누우면 얼어죽는다는 사실을 희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알면서도 죽음과 잠을 맞바꾸는 예는 허다합니다.
성도의 영적 잠이 그의 영혼을 죽게 하고 교회를 약하게 함을 알면서도 잠에 취하여 못 일어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44절에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로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너무나 분명함을 아셨습니다.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죽음의 쓴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바람’이 거부되어지는 응답도 하나님의 확실하신 응답이심입니다. 내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느지 깨달아 알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No”라는 응답을 통하여서 나의 믿음은 한층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의 기도에는 좀채로 “No”라고 응답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이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다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계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Yes”로 응답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많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서 벗어난 일을 구할 때는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두 “No”라고 대답되어진 것은 지독한 역설(paradox)이요 사람들이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간구’가 “No”라고 응답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죽음의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No”로 응답되어졌습니다.
바울의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기도가 “No”로 응답되어졌습니다.
무엇을 의미함입니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을 살 동안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순복(順服)하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심입니다. 또한 그 약함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함을 알기를 원하심입니다.
45-46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달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괴로워하고 비통해하는 가운데도 육신과 영혼의 잠에 흠뻑 취해 있음도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잠시잠간동안 허락하신 역사임을 알게 되셨습니다. 그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0절에서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앞으로 잠시동안 사단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듯 보이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고통 가운데 사단의 마지막 시험(last temptation)을 온전히 물리칠 때 그 영적 싸움의 최종 승리자는 주님이 되십니다. 해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이십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번민과 비통을 짐작하십니까? 그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흠도 없으신 주님께서 나 때문에 고통당하시고 비통해하셨습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미련하신’ 죽음을 당하시기가 참으로 고민스럽고 비통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바라심은 모든 일이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하시고 쓴 죽음을 맞이하셨던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육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늘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돕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4장 1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거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미리 시험받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우리를 돕고자 하실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시간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시험에 들지 않게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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