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요한 18:33-38전)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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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에 이스라엘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디베랴 시에 머물 때에 이스라엘 여행의 첫 주일을 맞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세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머물고있던 호텔도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호텔 가까이에 교회가 있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고자하는 여행객들의 편의에 따라서 예배시간이 정해집니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이라곤 목사님내외분과 아들, 그밖에 두세명의 다른 여행객이 있었을 뿐입니다. 40명 가까운 청중을 앞에 둔 목사님은 여느 때보다 많은 숫자에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평소에 얼마나 적은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지 짐작케 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이 법으로 금지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하는데 오히려 법으로 금지하여 복음을 가로막는 추세라니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메시아닉-쥬"(Messianic Jews)라고 부르는데 극히 소수이고 동족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선교목적으로 세워진 한국식당이 이스라엘에 세 군데 있었습니다. 갈릴리 디베랴 시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데, 선교 의욕이 있어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복음을 전하리라고 세웠을 터인데 별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현재 이스라엘 내에서 복음증거의 방법으로 가장 가능한 것이 있다면 아랍인들의 거주지역에서의 선교활동입니다.
이스라엘에 사는 팔레스틴 아랍인들 가운데는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어 크리스천 숫자가 제법 많다고 합니다.
미국목사님들 가운데는 이미 이러한 선교의 일을 시작하신 분들이 얼마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이스라엘 땅에서 복음증거를 공식적으로 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사하며 관광수입을 올리는 아니러니를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언제까지 이방인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만 ‘존귀한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는지,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메시야--구세주로 고백할 것인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우리의 더욱 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25-26절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고 종국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는데, 그런 이후에라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인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유대인들의 형편로서는 복음이 유대인들안에 충만하게 전파되기가 요원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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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갈릴리 사역을 많이 다룬 공관복음서들(마태, 마가와 누가복음)과는 달리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귀결지이기 때문입니다.
1-2장과 4장 43-54절에서만 갈릴리 사역을 기록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 13절로부터 3장 21절에서 유월절(4월)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다루고있습니다.
3장 22-36절은 예루살렘 근처 유대지방에서의 사역입니다.
5장 1절이하에서 예수님은 명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십니다.
7장 14절이하에서 예수님은 초막절(10월)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십니다.
8장 1절에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8장 2절에서 다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7장 14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신 기록이 없이, 10장 40-42절에서는 유대의 한 지방에 머무십니다. 11장 17절에서 예루살렘 동편 2-3Km 떨어진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마을인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곳에 12:11까지 머무시다가 12장 12절이하에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요한복음은 12장 12절이후 20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장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에 할애하고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주님의 나라와 그 진리를 증거하시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요한복음의 처음 장 :9-13절에서 그 종국을 짐작케 합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요한복음 12장 12-13절에 보니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갖고 나가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칩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群衆)이 “호산나” 하며 종려나무를 흔듦은 “그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왕으로, 또한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당장의 구원을 청원함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주시고자 하는 구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구원은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인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은 사단의 압제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었습니다.
메시야로 기대하던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던 것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시자 그들의 기대는 분노(憤怒)로 바뀝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마치시고 그들과 만찬을 나누신 예수님은 기드론 골짜기 동편 감람산 중턱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금요일 새벽 두 시경에 붙잡히시고,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한 후에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이 귀찮고 득이 전혀 없는 심문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기를 원하는 유대인 무리들의 강청으로 인하여 심문을 계속해야 합니다. 전승(傳乘)에 의하면, 빌라도의 현지처인 갈릴리 여인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그에게 해를 가함이 불길한 일임을 빌라도에게 간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원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혹은 하나님과 동일하다 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고자 했지만 총독으로부터 사형판결을 얻어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자 고소내용을 종교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바꾸어, 예수가 백성을 미혹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여 로마황제에게 대항한다고 고소했습니다.
33절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합니다.
빌라도에게는 별 의미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고소한 무리가운데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自稱)한다고 하나 빌라도가 보기에는 로마제국에 전혀 해를 끼칠 반역의 세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신 후에 더 이상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데 요한은 약간 다른 기록을 하고있습니다.
34절에 예수님께서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하고 반문하십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유대인의 왕”임을 자인(自認)하심이 포함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유대인의 왕’의 의미를 빌라도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있음도 지적하심입니다.
35절에서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질문합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이 무슨 연유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이 마르고 힘이 없어보이는 사내가 로마제국에 무슨 해를 끼칠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를 놓아줄 구실을 얻고자 질문을 계속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첫 번째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의 왕권(kingship) 혹은 왕국(kingdom)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십니다.
36절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라”라고 번역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왕국(kingdom) 혹은 왕권(kingship)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미치는 장소(place) 또는 영역(domain)을 의미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의 바탕위에 세워졌으며 그러한 사람들 마음에 존재하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장차 영원히 거할 장소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며 그 진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서 그리스도가 왕노릇하실 나라--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고,
5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로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장 3, 5절에 언급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장차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미래의 장소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3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나라(my Kingdom)”는 3장 3, 5절의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하여 현재에도 믿음으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곳은 진리가 아닌 것이 설 수 없고 다스릴 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장소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왕이라는 소리인지, 왕이 아니라는 소리인지 잘 모를 일입니다.
37절에서 빌라도가 반문할 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로서는 더욱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미가 급한 사람들에게는 성경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자신이 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그의 백성도 그를 고소하는 유대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장 11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그를 왕으로 영접지 아니하였고 또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그를 듣지않아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그의 나라를 알고 그 백성되는 것과 그가 증거하는 진리(眞理)를 듣는 것이 상통(相通)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그 진리(眞理)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나라에 속한 왕이신 그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眞理)를 알지니 진리(眞理)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14:6) 자신 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8장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적인 진리(the Truth)--하나님의 말씀 혹은 말씀이 육신이 된 자신(1:14)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러한 진리에 속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소리(=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시는데, 빌라도는 변하는 진리(a truth)에 대해서 묻습니다.
38절에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a] truth?)”고 세 번째 질문을 하는데 이 세상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빌라도에게 그 대답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세상진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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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아직도 사단의 종노릇하며 그 압제가운데 놓여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3년여의 공생애를 사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로, 또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진리이신 그 자신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가 주시는 평안--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진정한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나라이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자마다 이 주기도문의 축복이 임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십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함은 우리들의 관심사가 이 세상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영존하시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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