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3, 2014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누가 19:28-44)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누가 19:28-44)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란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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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까? 예루살렘 입성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처음 올라가신 것은 누가복음 2장 21절의 기록대로, 난지 팔일이 지나서 유대인들의 예대로 결례 (潔禮)--성결케 하는 예식--를 행하려 한 때입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에는 그 부모가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한 걸로 보아 적어도 매년 유월절 한 차례씩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시던 해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의 날들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데 아이 예수가 그들 일행 중에 알았다가 나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성전에 유대인들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계셨다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할 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았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반문하십니다(누가복음 2:48-49).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유월절의 절기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그가 초막절에도 비밀히 예루살렘에 가시고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때의 절기도 유월절입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시고자 하나 애굽 왕 바로가 이를 가로막을 때, 죽음의 천사로 애굽인의 장자는 죽이시고 이스라엘인의 장자는 살리시게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린양을 죽여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인의 집과 애굽인의 집을 구별하여,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애굽인의 집 장자는 죽이게 하시고, 이스라엘인의 집은 그냥 지나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하나님께 속한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의 희생양(Paschal Lamb)이 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연관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이기보다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 하는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곳에 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는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님이 그들의 식민통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 통치를 상징하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의미합니다. 장차 성도들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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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고 하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예수님의 입성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야의 입성에 대해서 스가랴서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되어있습니다.

31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맞은 편 마을에 나귀 새끼가 매여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주인이 나귀새끼를 순순히 내어주실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나귀 새끼의 참 주인은 주님이시오,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그는 다만 그 관리를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가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시간을 드려라.” “너의 재물을 드려라.” “너의 몸을 드려라.” 우리가 주님께 묻습니다: “왜 그리 하십니까?” 주님께서, “내가 쓰고자 한다” 말씀하실 때, 지체하지 않는, 변명을 달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 중 우리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로서 이 세상을 살 동안만 맡아서 관리하고 경영할 뿐입니다. 누구의 원대로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것입니까? 주님의 원하심대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32-34절: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 새끼의 임자들의 허락도 없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그 매인 끈을 풉니다. 이에 그 임자들은 별로 화를 내는 기색도 없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묻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대답할 때, 그들은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어줍니다.

35-36절: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지날 길에 펼쳐놓음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집을 치기 위해서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가 왕이 되었다 함을 당치 않은 일로 여기던 사람들이 그가 여차여차 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열왕기하 9장 13절에 보니,  “무리가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라” 말하며 그의 왕 됨을 인정하고 그를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겉옷은 그 사람의 몸의 일부와 같은 것으로 겉옷을 깔았다고 함은 ‘자신을 낮추어 신하(臣下)로서 왕(王)께 복종(服從)하겠다’는 뜻입니다.

37-38절: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의 일행은 감람산의 언덕을 넘어서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삼 년여 공생애를 사시며 온갖 기사와 이적과 능력을 베푸신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해서, 그들은 큰 소리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복음의 기록은 축소된 것인데, 마가복음 11장 9-10절에 찬송의 전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것은 시편 118편 25-26절과 시편 148편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 25-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호산나라 함은 호시아의 합성어인데, 이제 구하소서! 하는 뜻입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群衆)이 호산나 하며 종려나무를 흔듦은 그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왕으로, 또한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당장의 구원을 청원함입니다. 이 예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대리자로 그들에게 오심입니다.

시편 148편 1절은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주님을 그들께 보내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합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라  함으로써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이 그들이 염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주권의 회복을 위함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이,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자 함이었음”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고, 유대인들의 다수는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39-40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는데 내어놓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제자들과 군중의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이를 잠잠케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의 행렬은 시편과 예언서(스가랴서)에 예언된 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써 입성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정치적 왕으로써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에서 풀어주고자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매인 것에서 풀어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사역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며 ‘호산나--주여 이제 구원하소서’ 외치는 당연한 것입니다.

41-44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성을 보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셨습니다(요한 11:35).
오늘 예루살렘 성이 장차 어떤 고난을 당할 것인지 아셨기에 우십니다.
로마장군 디도(Titus)는 예루살렘 주위에 토성을 쌓고 그들을 압박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은 로마군대에 의하여 함락되고 훼파를 당합니다. 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맛사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3년을 더 버티지만 그들에게 양식이 떨어지고 소망이 사라지매 집단으로 자살하여 죽습니다.

80년에 걸쳐서 헤롯의 성전이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지만, 그 헤롯 성전은 불과 7년 뒤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다만, 성전을 둘러싸고 있던 사면의 벽 중에 서쪽 편의 벽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통곡의 벽(wailing Wall)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성전이 무너져 내리고 성이 훼파된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여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그들에게 왕으로 오신-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결과인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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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눈먼 자도 보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손 마른 자도 낫게 하시고,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하셨지만, 결국 이러한 치료의 사역이 무엇을 위하심이었습니까? 그가 물위를 걸으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다섯 개의 떡 덩어리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시고 (마태 14:17이하), 또 다른 때에 일곱 개의 떡 덩어리와 두어 마리의 물고기로 4,000명을 먹이셨지만(마태 15:34 이하), 이 모든 기사와 표적들이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는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나라가 어떠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이 치료받아 온전하여지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사건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께 청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을 입술로만 외지 마시고, 마음으로 간절히 청원하심으로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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