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6, 2013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 10:38-42)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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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E. C. Willard, 1839-1898)라고 하는 여류 사회운동가가 있었습니다. 1839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여성이었는데 대학재학 때에는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과 정치가로 꿈을 펼쳐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19세 때 큰 병을 얻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기도 하였는데 그때 병상에서 그녀는 그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대학을 마친 후 교육자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의 교수가 됩니다. 그의 나이 35세일 때, 그는 두 가지 초빙 제안을 받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1870년대) 연봉 2,400달러의 노스웨스턴대학의 총장으로의 초빙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푼의 수입도 없이 그 다음날부터 무엇을 먹을까 염려해야 하는 기독교여성절제회의 시카고 지부장으로 일해 달라는 초빙이었습니다.
밤새 고민하며 이 초빙에 대하여 기도하던 그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었고 그는 기독교여성절제회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제회의 금주운동은 당시 종교 사회운동의 중요한 사업이었던바, 그의 활약은 눈부시게 전개되었습니다. 금주운동 뿐아니라 여성지위 향상, 노동자지위 향상 등에도 큰 성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일푼의 보수 자리를 택한 윌라드의 선택은 보통사람에게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 같았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절제운동과 여성과 노동자의 지위향상은 두드러진 것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있었던 땅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간에 가축을 위한 목초지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절).
이에 롯은 당장 눈에 좋아 보이는 요단 온 들,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하여 떠납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눈에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은 가나안을 택하게 되었는데 이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으로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이삭의 아들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 사이에서 당장의 배고픔을 모면하고자 야곱이 주는 팥죽 한 그릇을 택하고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헌신짝처럼 넘겨줍니다.
이러한 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과소평가한 잘못된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택의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생활에서 또 우리 신앙의 삶에서 어떠한 선택과 봉사와 헌신을 할 것인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도 선택의 원리(Principle of Choice)는 중요합니다.
경제학 중에서도 소비자이론(Consumer's Theory)은 선택에 관한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그의 만족(또는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수입은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수입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선택을 하느냐를 결정합니다. 만족극대화를 위한 선택은 내가 세상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느냐, 하늘의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 교인이긴 한데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닌 사람, 그리고 영에 속한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인 육에 속한 사람과 교인인 육신에 속한 사람의 돈에 대한 소비선택에는 사실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 즉 교인이긴 한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사람은 그의 생활패턴도 여전히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내는 돈이 없는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헌금을 낸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이 교회에 내는 헌금은 아직은 기쁨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내면 하나님이 축복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또는 천국생명보험 정도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교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간에 지출선택의 가장 큰 차이는 헌금액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별하여 놓느냐 아니면 쓰고 남은 것으로 헌금하느냐 하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신 것은 구별된 제사냐 아니냐는 차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이렇게 큰데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봉사는 아주 잘하는데 이를 드러내기 원하는 사람, 봉사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 봉사를 잘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봉사는 잘하는데 하나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봉사는 전혀 하지 않는데 하나님 말씀은 들으려고 하는 사람, 봉사도 잘 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마르다는 봉사는 잘 하는데 이를 약간은 드러내기 원하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육의 음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더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봉사와 대접을 잘하지만 (우리가 알 듯이 순전한 나드향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기 위하여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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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절: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어느 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사는 마을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들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북동쪽,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들르겠다고 통보하신 것 같지는 않고 길 가시다가 그들이 생각나셔서 갑자기 베다니로 발길을 향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즐겁기에 그가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39절: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갑자기 모셔드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한 식사준비로 마르다의 집은 온통 법석입니다.
마리아도 아마 마르다를 도와 음식을 장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마리아는 음식을 여러 가지로 장만하는 일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마 한두 가지의 음식을 만든 후에, 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앉습니다.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도와주던 마리아가 가고, 마르다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도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를 원하였기에 이것저것 많은 것으로 준비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는 분주한 마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이 더디기에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주하고 상한 마음은 그의 뜻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데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대접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을 원하시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원하심과는 무관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면서 그 일이 잘 진행되지 않으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야속한 심정으로 무례를 범합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도중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
마르다는 마음 속이 너무 편치 않기에 자기 집으로 모셔드린 귀한 손님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41-42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개인적이며 친근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집을 방문하신 손님으로서 그 주인의 잘못됨을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지적해 주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르다의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사랑함입니다.

우리도 이와같은 오해로 주님께 잘못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좋아하시며, 그것을 들어주고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우리의 기도함과 간구함으로 주님을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이미 피곤하실 터인데 나까지 주님께 여러 가지로 간구하여서 주님을 더욱 더 피곤하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관심이 육적 양식에 있으셨던 것이 아니었듯이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주관심도 먹는 것에 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친교를 위하여 먹고 마실 것이지만 그러나 이 일에 지나친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창립예배나 장로-집사 장립예배에 가보면, 그 교회 여전도회원들이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예배 후의 식사로 잘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고 강사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도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는 여전도회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설교를 듣는 것보다도 음식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마르다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세상의 것으로 그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경청하여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식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접이나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고 기쁘시게 하는 일에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며 그 말씀에 따라서 봉사하고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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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해서 대접하기를 즐겨하고 봉사하는 일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잘하는 일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봉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항상 주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때로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는 것은 우리의 봉사의 초점이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나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자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을 때 불평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영적 기준으로 판정되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도 이를 다 지켜보시는 주님께서 후에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년조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봉사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헌신은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리되, 우리들이 쓰고 남은 것으로서가 아니고 첫째의 것으로 드리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말씀에 기초하여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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