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2, 2012

"거울을 보는 사람들" (야고보서 1:22-25)

                                         “거울을 보는 사람들” (야고보서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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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나라에 거울을 보기 싫어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의 얼굴은 잘 생긴 편에 속하지만, 왕이 거울을 보기 싫어한 이유는 오른쪽 눈썹 위에 난 작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별로 띄지 않는 상처인데, 거울을 들여다보는 왕의 눈에는 유독 그 상처만 보였습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하여 머리를 길게 길러 눈썹 있는 데까지 늘여 뜨려 보기도 하였지만 머리카락 속에 가려진 상처가 더욱 크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던 왕은 하도 화가 나서 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왕은 나라 안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모두 깨뜨려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거울을 깨뜨려 버리지 않는 사람은 큰 벌을 내린다고 엄명하였기에 사람들은 마지못해 거울을 없앴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차림새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지저분한 모습에 화를 내고 미워하고 욕하였습니다.
외딴 산 속에 한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할머니는 거울을 없애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손녀에게만 거울을 보여주었습니다. 소녀는 할머니에게 거울을 사용하여 몸을 단정하게 하는 법과 마음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소녀가 웬만큼 성장한 후 마을에 내려가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의 더러운 얼굴과 엉망의 차림새를 보고 놀랐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소녀가 자기들과는 달리 깨끗한 차림을 하고 있는 것에 놀라며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는 말합니다.
“넌 분명히 거울을 보았어. 이 나라에 거울은 하나도 없어야 되는데, 넌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울을 보았으니 벌을 받아야 해!”
마을 사람들은 아름답고 깨끗한 차림새의 소녀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소녀를 성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왕은 소녀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소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우리들하고는 다른 것 같구나. 그 이유가 무엇이냐?”
소녀는 두려움 없이 대답합니다. “거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부하를 불러 당장 소녀에게 커다란 벌을 내리려고 합니다.
소녀는 말합니다. “저에게 벌을 내리시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이 거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왕의 모습이 어떠한가 비춰보세요.”
왕은 소녀의 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뜨려버리려다가 호기심에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거울을 들고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주름이 가득하고 일그러진 무서운 얼굴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내 모습이 이렇게 변하다니...” 왕은 크게 놀라 소리쳤습니다.
소녀가 말합니다. “임금님, 임금님의 명령을 어긴 저에게 벌을 주세요. 그러나, 그 전에 거울을 보며 자란 저와 임금님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저는 비록 헌옷을 입고 있지만 깨끗하게 입고, 몸과 얼굴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고 있습니다. 또한 거울을 보는 것은 단지 얼굴만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을 보면서, 저는 저의 마음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왕은 소녀를 들여다보며 그의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왕은 사람들에게 왜 거울이 있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왕은 곧 신하를 불러서 지시합니다. “지금부터 서둘러 거울을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백성들에게 골고루 거울을 나눠주도록 하라.”
왕은 그의 눈썹 위에 있는 작은 상처는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과 차림새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음에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의 얼굴과 차림새가 깨끗하고 밝게 되었습니다. 서로 욕하고 미워하고 비난하던 것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김 율희의 「거울이 없는 나라」에서)

남자와 여자가 거울을 보는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여자가 대체로 오래 들여다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여성이 거울에 비친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히 자기 모습을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기 확인을 위한 것인데 ‘타인의 눈’을 통한 자기 확인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성은 화장을 하고 몸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남성은--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사람을 만날 때나 상담 같은 것을 할 때라야만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곤 머리나 넥타이를 만진다고 합니다. 또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날의 컨디션이나 건강상태를 자가 진단합니다.
남자에게는 거울을 보고 결점을 고치려는 ‘비판정신’이 있는 반면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아름다운 면을 확인해 보려는 ‘긍정정신’이 있다고 합니다.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남자성도와 여자성도 간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판정신’이 강한 남자성도들은 들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고치고자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쳐서 고치는 대신에 설교자가 ‘나를 깐다’고 생각하는 한편, 여자성도들은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그래,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지. 오늘 설교는 어느 권사님이 들으셔야 하는데... 그리고 어느 집사님도 들으셔야 하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동화책에 얼굴은 아름답지만 마음이 추하고 사악한 여왕이 등장합니다. 여왕은 매일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적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매일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거울은 대답합니다.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쁜 사람이에요.” 그 대답을 들으며 여왕은 흐뭇해합니다.
어느 날도 여왕은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거울에게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거울은 대답합니다. “당신도 아름답지만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처녀가 있습니다.” 백설공주가 어느덧 아이에서 처녀로 성장하여 여왕의 아름다움을 능가하게 된 것입니다. 악한 여왕은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백설공주를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거울은 정직합니다. 우리의 추한 면은 추한 면 그대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대로 반영해줍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우리의 얼굴에 묻은 검댕이를 지울 수 있으며, 옷에 묻어있는 티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흠은 어찌 할 수 없지만, 우리는 거울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묻어 있는 흠과 티가 무엇인지 보게 되며 떼어내고 가다듬을 수 있는 것은 가다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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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는 말뿐인 사람들을 “듣기만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의 표현은 우리가 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도를 실천함에 있습니다.
그 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함으로 믿음이 사랑으로써 표현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아니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를 우리 마음 안에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영--곧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시며 나로 믿음의 사람임을 삶으로 증거하게 하십니다.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떡’이든지 ‘아멘’하든지 하는데, 설교를 듣고 교회를 떠나면서 전혀 그 말씀이 그 마음에 남아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혹은 ‘아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표시를 하였는데, 혹은 아무 표시도 아니하였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후에 행함이 없는 것은 그가 듣고 인정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머리로 알고 인정하는 것과 삶으로 알고 인정하는 것 사이의 괴리(乖離)입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속이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되,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지 아니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움을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날마다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은 그대로 덮어두고 죄로 여기지 아니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난의 칼을 갑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 대신에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의 마음이기에 하나님도 같은 판단으로 그를 판단하시되, 은혜와 긍휼을 베풀지 아니 하십니다.

23절: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 거기에 검댕이가 붙어 있으면 떼어버릴 터인데, 어떻게 도를 행치 않는 사람이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는 것인가?
요즘의 거울은 우리의 얼굴 생김새와 묻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야고보 시대의 거울은 동판(copper plate)으로 된 것이기에 사람의 얼굴의 외형을 대강밖에는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얼굴의 윤곽밖에는 보여줄 수 없었기에 얼굴에 붙은 자질구레한 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따라서 이 거울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동판 거울에 자신을 대충 비춰보는 사람은 해서 자신의 얼굴에 티가 없음은 물론이고 상당히 괜찮게 생겼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 말씀의 거울에 우리의 외적 부족이 무엇인지 내적 결함은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고치거나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의 거울이 마치 우리의 얼굴을 다만 희미하게 비춰줄 뿐인 동판거울과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충 들었기에 말씀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고 고치는 대신에, 자신이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흠이 있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24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그 동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였기에 조금 지나면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설교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대강 들었기에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듣는 당시에는 어렴풋이 알았지만 교회를 떠나는 순간에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잊어버립니다.
해서, 이 사람은 교회 생활을 10년 아니 그 이상을 계속하고 있지만, 항상 대충 그에게 동판 거울과 같은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기에 자신의 결점이 무엇이며,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이며, 말씀을 따른 삶이 어떠해야 할지 항상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지는 오래인데 삶은 믿기 전하고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동판 거울이 사물을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오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얼굴의 눈, 코, 입술, 귀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요가의 달인(master) 가운데 불투명한 바위 밑에 놓인 책을 읽을 수 있는 투시력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훈련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처음에는 책 위에 얇은 반투명한 유리판 같은 것을 올려놓고 읽기를 시도하고 차츰차츰 그 두께를 더하여 가는 훈련을 쌓다 보면 나중에는 불투명한 바위를 꿰뚫고 그 아래 놓인 책을 읽는 투시력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도 그 말씀의 거울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듣고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닫기를 사모할 때, 이 사람은 말씀을 거울을 통하여 뚜렷하여지는 자신의 외모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내면과 외형이 뚜렷하기에 그는 거울 앞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거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바를 실행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그 말씀으로 자신의 결점을 고치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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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씀의 거울을 우리 가까이에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흠을 발견한다고 하여서 그 거울을 치워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거울을 치워버린다고 하더라도 나의 흠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위에 거울을 보지 아니하므로 나는 더욱더 추하고 헝클어진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되, 대충 비춤으로 나의 결점이 무엇이며 거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잊고 사는 자가 아니라, 거울을 응시하므로 나의 흠과 티를 고치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에서 너무 멀리 서있으므로 거울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다만 희미하게 볼 것이 아니라 거울에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다가서서 뚜렷하게 우리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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