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오래된 인사 가운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은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란 인사가 있습니다. 한반도의 역사 중에 전쟁과 가난이 없던 때가 드물었기에 밤중에 무슨 변고라도 없었는지또는 다음날 끼니에 대한 고민 없이 잠을 잘 잘 수 있었는지 묻는 인사였습니다.
요즘은 한국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과정 중에 있으니 이런 인사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전쟁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려가 몽고에게 항복하여 다스림을 받고, 조선이 명과 청에 조공을 드리고, 일본에 의하여 36년 간 지배를 당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시련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족속이 애굽에 의하여 430년 간 종살이를 하였으며 솔로몬 이후 분열된 북방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무너진 이후 피섞임을 당하며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인이라 칭하여지며 멸시를 당하다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던 남방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져 내린 후에 일부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지내다가 놓임을 받은 이래 메대와 바사에 의하여, 시리아에 의하여, 그리스에 의하여, 로마에 의하여 지배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던 것이 로마제국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무너뜨려 내린 후에는 19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다가 194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재건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계 제2차 대전기간 중에는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 등에서 처형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을 때 므깃도 평원의 발굴장소에 들렀었는데, 므깃도 평원은 지난 수천 년간 수십 번의 전쟁의 장소였다고 합니다. 근동지방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애굽과 앗수르, 애굽과 바벨론과의 싸움 등 크고 작은 싸움이 수십 차례 일어난 곳이며 그 장소가 묻히고 또 그 위에 새로이 건설되고 하여 십여 층(layers)이 쌓였다고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16:16)에서 장차 인류의 마지막 싸움 장소로 예언되어진 ‘아마겟돈'(Armageddon)은 번역하면 ’므깃도의 언덕 또는 산‘이니 이 므깃도 평원 또는 언덕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이후에 공중에 재림하셨던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평안, 평강 또는 평화’란 뜻의 ‘살롬’은 한국사람들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또는 ‘밤새 평안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만큼이나 흔한 인사였습니다. 지금도 어떤 크리스천들은 뜻도 모르면서 편지 끝에 ‘살롬’이라고 쓰는 것을 멋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살롬’은 전쟁터에서 사용되어지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적과의 전쟁 중에 성 밖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오는 사람이나 무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때, 또는 그가 또는 그 무리가 전쟁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휴전 또는 평안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모를 때 '살롬?=평안이뇨?' 하고 물어 그 또는 그 무리의 목적을 확인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기 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밀을 넓은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는 대신에 좁은 굴 어귀에 마련된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 앞에 나타나서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미디안이 우리를 압제하는 일이 어찌 계속됩니까?"(13절)라고 반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된 성경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 또는 천사라고 그랬다가 그 다음 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여호와의 사자의 말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때로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가 혼돈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밤새도록 씨름하고도 죽지 아니하였을 때 그곳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기드온은 '나의 집은 이스라엘의 별 볼일 없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약하고 나는 지극히 약한 나의 아비 집에서도 제일 작은 자인데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절)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그렇게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이신지 증명할 수 있는 표징 즉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꿈인가 생시인가 긴가민가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내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앞에 드리기까지 떠나지 마시라고 간청하고, 그는 그리하겠노라고 대답하십니다.
기드온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고 무교전병을 만들어 고기는 소쿠리에 담고 국은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사자에게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사자(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쏟으라"(20절)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사르고 여호와의 사자는 그곳을 떠나 더 이상 그곳에 없습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를 살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식물(食物)을 기뻐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걱정이 됩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본 사람은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도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으므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나타나 보인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일 것입니다.
보통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분이요 진노와 징벌의 하나님으로 여겨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들 중에 영지주의자들과 마르시온에게 속하였던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구 약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세에게 십계명을 준 하나님은 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을 맡기신 일곱 천사(Hebdomad)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그를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힘으로 꽉꽉 누른 가짜 신으로서 '진노와 징계'로 표시되는 존재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참 하나님은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Unknown God)으로 '사랑'으로 표시되는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사랑의 참 하나님'이 '진노와 징계의 가짜 하나님'을 무너뜨려 내리고 진정한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구약성경을 읽긴 읽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듯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잘 알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할 때, 구약에서 보여주는 '오래 참으시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용사로 쓰임 받는 일로 기뻐하는 대신에 징계와 진노의 하나님의 사자를 봄으로 죽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으며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이유가 세상에 잘 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죽음이 두렵고 세상의 불확실함 가운데 마음에 평안을 얻고자 함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그에게 “안심하라,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 곧 ‘여호와는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에 앞서 이미 모세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민수기 6장 26절에서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이스라엘 자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편 85편 8절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사야는 26장 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살롬'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2장 14절에서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관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7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사람과 사람을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과 하나님을 화평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 울은 또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시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염려하며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 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 하면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시고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믿을진대 또한 ‘평안을 주시는 여호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고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장 27절에서 그가 주시는 평안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전쟁의 위험과 다툼과 분열과 걱정꺼리가 있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놀라며 살아갑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평안을 주시는 주님, ‘여호와 살롬’의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들에서 문안인사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평안을 전하는 문안인사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열거된 성령의 열매들 중에 '화평의 열매'가 있습니다. 화평이 성령의 열매인 것은 ‘여호와 살롬’의 주님을 믿고 모든 염려와 근심을 그에게 맡긴 사람들에게는 화평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살롬'의 주님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매 우리 또한 늘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나누어주며 평안의 본을 보이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