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7, 2016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近日)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해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아기는 울고 태어나지만 주위사람들은 이를 즐거워하며, 주위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그는 웃으며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일 때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어남은 미지의 세계로 옴이요 죽음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옮겨감입니다.
사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닌데, 아니 고생과 슬픔의 연속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삶에 미련과 애착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그에게 다가올 미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의 정지가 초기불교에서는 열반(涅槃)의 상태에 들어가는 최고의 경지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허무일 뿐입니다. 존재의 정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혹시 지옥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또 그보다는 생과 사의 갈림을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죽음 다음에 전개될 낙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곳인지 알게 될 때에 그는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낙원이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아직까지 세상의 삶에 연연해 왔던가?’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이별하는 사람은 웃을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마다 되뇌이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더 담담하게,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소망 중에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까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발견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 26:42)
세 번째도 이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다(마태 26:4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에게도 고통으로 느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에 매어달려 계신 처절한 것이기에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이 혼자 견디어야 하는 장시간의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고통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을 가볍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늘 동행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슬픔과 번민 중에만 같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철저한 버림당하심과 처절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2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 모리아산”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장소에 예수님 시대에 건축되고 있었던 헤롯 성전은 일명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유명한 서쪽 벽만 남고 성전의 터에는 이슬람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Omar Mosque)가 지어졌습니다. 이 사원은 또한 “Dome of Rock"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올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큰 바위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이 성전 터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 곧 모리아의 한 땅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모리아의 한 땅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약의 원형(Type)인 아브라함에게 과연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고는 다만 그의 믿음의 고백-“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을 기뻐 받으시고는 이삭 죽임을 중지시키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시고 6시간의 기나긴 고통 끝에 죽게 하심으로 그의 인간 사랑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조만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실 분이라고 믿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은 참으로 황당하고 허망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잠시 후에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그 후에 잠시 나를 다시 보리라.”고 하시기도 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하시기도 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였습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소리쳤습니다. 덕분에 제자들도 으쓱한 기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 회복은 고사하고 강도들과 함께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형을 받다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 저녁에 만찬을 잘 들고 여느 때와 같이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는 줄 알았는데 한 밤중에 그들이 왕으로 받들리라 생각했던 그 예수님께서 아무 힘없이 붙잡히시고, 붙잡히신 날 아침이 오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모든 로마병정과 군중들 앞에서 ‘이보란 듯이’ 내려오시지 않나 기대도 해보았지만, 오후 세시가 되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46; 시편 31:5 참조)란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로 흩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황망한 마음으로 맥없이 주님의 시체가 있는 예루살렘에 며칠 더 머물기로 작정합니다.

4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헤롯의 청직이 구사의 아내)와 요세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살로매(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이 예비한 향품으로 예수님의 몸에 발러주기위하여 갔으나, 예수님의 시신(屍身)은 간 데 없고, 두 천사(혹은 한 천사)가 이르기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돌아가서 사도들에게 알리매 다른 사도들은 허탄한 말로 받아들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나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만 발견하고 기이(奇異)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날 오후-즉, 주일 날 오후-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5리(약 10Km) 떨어진 엠마오(Emmaus)라 하는 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한 자리 얻으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왜 고향이 아닌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모든 의미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15-16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나, 낙담과 절망으로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들과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것이 허황된 말로 여겨져서 곁에서 동행하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Mark)는 16장 12절에서 예수님이 “다른 모양(模樣)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이에 두 사람 중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설명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고,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었다는 것,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서 사형 판결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소문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헛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18-24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시고, 구약성경에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쳐 주십니다.
 
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가르치시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더 가려는 것같이 하시는데, 그들은 예수님께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머무시도록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유하러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30-31절: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영의 눈이 밝아지매 비로소 그들은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구약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여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가던 길에서 돌이키어 방향을 바꾸어 어둠이 내리 깔리기 시작하는 길을 급히 달려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심’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이후 2,000년 뒤 현재를 사는 믿는 사람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체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향하던 이 두 사람과 동행하시던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낙담한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사람의 탄식에도 주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또한 떡과 잔을 떼는 성찬에도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의 눈이 뜨임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우리와 이제까지 동행하시며,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시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교인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영의 눈이 아직 뜨임 받지 못하였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영의 눈이 뜨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문 29절은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강권함--주님께 떼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점잖게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여, 주시든지 마시든지, 응답하시든지 마시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안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데,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알고자,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우리와 함께 유하시기를 간구하는 청원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문 밖에 서 계실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영의 눈이 뜨임 받고 그들과 동행하시던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엠마오로 향하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고통의 빛을 띠고 가는 세상으로 향한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무슨 중요한 볼 일로 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다 제쳐놓고 급히 “주님이 부활하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증거하려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을 깁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청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 4:28)라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주위에 증거하여야 합니다.

3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symbol)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책을 썼는데, ‘우주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이는 다만 구약시대의 엘리야-엘리사 스토리(story)를 그리스도-제자들의 상황에 맞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상처를 입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하루를 머무신 후에 에센인들(Essenes)이 거하는 쿰란(Qumran)으로 가시어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겨지지 않을 뿐입니다. 합리적인 자신의 사고의 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요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 시간도 여러분 삶 가운데 주인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급한 마음으로 증거하여야 할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웃들에게 소리쳐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4절) 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절)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죽으심으로 실망과 좌절감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아온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한 차례가 아닌 여러 차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함은 거짓말을 기록한 인간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그러하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흩어졌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 거기에 유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성령을 체험하여 능력을 얻은 후 다시 흩어져서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곳을 향하여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같이 그들이 따르던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상실감과 낙담의 마음으로 여전히 엠마오를 향하여 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급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기쁨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에게 부활의 주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한 20:24-29)

       
1
자연인(自然人)으로서 우리 인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가 사람들에게서 소망과 기쁨을 빼앗아가고 절망하게 하고 슬퍼하게 합니다. 중국 한무제(漢武帝)는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하여 승로반(昇露盤)의 찬 이슬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한다는 불로초(不老草)를 얻기 위해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인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사역은 그가 죽으실 십자가로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다면 이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소망과 기쁨은 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은 여전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는 여느 다른 종파와 다름없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그 이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그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고는 “주가 부활하셨다”라고 우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제자들의 변화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동안에 제자들은 그를 따라 다니며, 때로는 같이 죽겠다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 병정들이 지키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수는 있었겠으며, 설령 훔쳐왔다고 하더라도 그 축 늘어진 시체가 그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외치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맹수에게 찢김을 당하면서, 또 때로는 화형에 처하여 지면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라고 증거하면서 담대한 죽음을 맞이하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그런 놀라운 담대함과 소망을 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짐승에게 찢겨 죽게 하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안한 미소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망 중에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죽인 네로는 절망 속에 미쳐서 죽었습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일정기간을 산 다음에 다시 죽는 “회생(또는 소생: resuscitation, restoration)”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생은 일시적으로 살아나지만 다시 죽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됨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고(눅 7:13-15),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눅 8:49-56), 죽은 지 사일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사건(요한 11:43-44)이 나옵니다. 이것은 회생(回生)이지 아직 부활(復活)은 아닙니다. 회생은 부활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자가 다시 일어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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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은 안식후 첫날--곧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나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하여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무덤 돌이 옮긴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제자는 급하게 달려와서 무덤 속이 빈 것을 확인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의 향방을 알지 못하여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파송’을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의심 많은 도마는 권능이 크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이 숙제를 푸느라고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도마에 관한 기사는 11장 16절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체념적이지만 인상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도마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고자 하실 때, 도마는 예수님께서 그의 반대자들이 많은 예루살렘 근처로 향하심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두 번째로, 14장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사에서 우리는 충성되지만, 자신의 확신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다소 상상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마의 모습은 또한 현재를 사는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삶이 순조로이 진행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인생에서 세찬 바람이나 파도를 만날 때는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인생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사람들의 갖가지 증거-마리아와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는 도마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기 위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면밀히 검토해보고 이상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여기에 ‘여드레’는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 방법으로 기산일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라고 할 때 그 사흘은 죽으신 금요일부터 기산(起算)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드레를 지나서’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날을 가리킴입니다.
일주일 전 주일날과 상황이 똑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만 도마만 그 자리에 더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문이 닫혀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집 안에 들어오셔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와 같이(19, 21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νη)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입니다. 이 “샬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평안)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인데, 이 평강은 환경을 이기게 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열 한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온통 도마에게 머물러 계십니다. 다른 열 제자는 지난 번 방문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따로 그들의 상태를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일주일전 의심의 마음으로 인하여 일주일 내내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도마에게 예수님의 관심이 쏠리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그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듣고 아시는 듯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도마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인데, 그의 마음 속을 훤히 드려다 보시며 그에게 가벼운 책망도 포함되어 있지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기 위하여 도마에게 무슨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점잖은 서술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Ὁ κύριο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극한 감격으로 인한 부르짖음입니다.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신앙고백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제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셨지만,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반문하셨었습니다(요한 14:9-10).

제가 아는 성도님 가운데 어떤 분이 최근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분의 신앙이 열심인 것을 볼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도마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To see is to believe"란 말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뜻인데 세상사람들의 생활법칙입니다,
그러나, 기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즉 믿음이란 바라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To believe is to see"-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는 신앙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기 때문에 믿는 자“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믿을 때에 그 믿고 소망하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증언대로(고전 15:6),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성도들의 수는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본 형제들 중에 380명 정도는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만으로는 “부활의 증인” 되기에 아직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필요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한 후에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삶으로 부활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실제를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향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운데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욱 복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도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다른 제자들처럼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증거할 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갈 때에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바울이 만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절망 중에 방황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방황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별개의 두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영접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전승(=도마행전)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러 갑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결국에는 붙잡혀서 창으로 찔리는 죽음을 당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육신의 죽음을 당하여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도 부활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수치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장사지낸 바 된 자가 부활함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이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사건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죽음도 불사하는 무모한 담대함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홀로 된 외로움이 사무치고, 육신의 아픔으로 고통 당하고, 또 세상 일로 너무 쫓겨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을 생각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셨습니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He is risen!)”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를 감싸는 감격의 부활주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Sunday, March 13, 2016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의 삶” (에베소서 4:25-32)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의 삶” (에베소서 4:25-32)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1
어느 날 석가모니불이 영산(靈山)에서 중생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說破)합니다. 석가모니불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중생에게 보입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서 잠자코 있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짓습니다. 석가모니불은 가섭이 그 뜻을 참으로 깨달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설명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가섭 존자에게 말합니다: “내게는 정법안장(政法眼藏: 올바른 진리를 갖추고 있음)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 상태의 미묘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 변화하는 생멸의 세계를 떠난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로 가는 미묘한 길)이 있는데, 문자를 통해 표현치 않고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뜻을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유래되었고 또한 이 사건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란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가섭만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달은 것이 그의 천재성에 기인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원함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미인선발대회에서는 지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된 육체의 아름다움 혹은 육체의 아름다움만이 그 판정 기준이지만,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제자는 외모와 상관없이 그가 가르치는 학문을 터득하기 위하여 그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배우고, 배운 학문을 연마하여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그의 기풍(氣風)을 이어받기 위하여 정진하는 학생이 아름답고 귀하게 보입니다. 피아노나 기타 악기, 혹은 성악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제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에게 주어진 몫을 훌륭히 잘 해내는 사람입니다.

공자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안회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쓰며 선생인 공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군자의 세 가지 낙(樂) 가운데도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그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있는데,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힘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생으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다른 학문이나 예·체능계의 선생들과 다른데, 다른 분야의 경우에 선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주장이나 학설 혹은 기풍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것이지만,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전하여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목사들이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 혹은 교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자기의 제자들로 삼고자 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적(敵)이 되며 이단(異端) 종파의 교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힘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과 형상으로 변화하고자 매일 매일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새 사람의 옷-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이 지향(指向)해야 할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7-19절과 22절에 나오는 옛 사람의 삶의 모습과 오늘 25-32절에 나오는 새 사람의 삶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새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혹 하루 이틀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합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이 일을 감당케 하는 원동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아무리 강권한다고 한들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물에 어떤 차의 봉지(tea-bag)를 담궜을 때 그 속의 냄새와 색깔이 뜨거운 물을 채우듯이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와 우리의 온 몸과 영과 혼을 채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시고 대속적인 희생의 사랑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눈을 향하고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먼저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사 아들의 형상으로 오셔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강요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이것이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며 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17절에서 옛 사람의 생각과 행함은 허망-거짓이 많고 망령되다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 사람은 먼저 거짓을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과 참된 것으로 교제합니다. 이는 진리이시며 참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서 우리의 마땅히 행할 일입니다.

26-27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는 것은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겸손(謙遜)과 온유(溫柔)의 대표적인 삶을 사신 예수님도 때로는 불의를 보시고 분을 내셨습니다. 그를 불신의 눈으로 마음의 완악함을 갖고 바라보는 자들에게 노하심으로 대하시고(마가 3:5), 그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태 23:33) 노를 발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상과 의자를 노하심으로 뒤엎으셨으며 그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으셨습니다(마가 11:1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함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은 불의에 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분냄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또 다른 죄가 싹트게 방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분을 내되 해가 지도록 오래 품고 있어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케 하는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어떤 사람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 분을 풍고 있었더니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내는 쓸 데 없는 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전에는 우리가 사람을 속이고 남의 것을 마음으로 또는 행동으로 도적질하던 자들이었는데 새 사람의 옷을 입을 때 더 이상 도적질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고자 합니다.
전에는 부당한 이익을 구하며 게을리 행하며 일하지 않고 구제의 대상으로 얻어먹고자 하였지만 이제는 새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며 가난한 중에도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욕하는 말이나 불신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목사님이 불평과 원망투성이의 말을 하고, ‘내가 실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마음 속에서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설령 그 목사님과 같이 원망과 불평이 많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일지라도 그 목사님을 그들의 목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 혹은 믿음이 앞선 사람들은 나중에 믿은 사람들 앞에서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는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은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라고 무심코 한 말이지만 이런 것이 믿음의 문턱에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문밖으로 밀어냅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어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대신에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말로 인해 그들보다 더 악한 지옥자식으로 만들고 있음을 꾸중하셨습니다.
새 사람은 더러운 말은 삼가며,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믿음의 선한 말을 합니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내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내가 정결하고 믿음이 충만한 생각을 하고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탐욕과 추함과 불신의 생각을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나간다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속에 거하시며 활동하기를 원하시는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 구원과 하나님 나라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늘 거하시는데 그분과 불편한 관계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1-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납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악독이라고 함은 남을 해치는 독기가 들어있는 악한 마음이고, 노함(anger)과 분냄(Wrath)은 일시적 혹은 지속적인 노여움의 감정이요, 떠드는 것은 노여움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요, 훼방하는 것은 이 노여움의 표현으로 인하여서 상대방을 중상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방을 향한 절제할 수 없는 악한 감정과 그 표현인데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옷-그리스도의 옷을 입고자 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인데 우리가 남보다 더 자비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남들보다 더 죄악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자이요 불의한 자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는 ‘의인 중에 의인’인 것 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도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을 진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대하듯 그렇게 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저는 교회에 각기 다른  인격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 감사합니다.
전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리 믿음이 없고, 왜 그리 책임감이 없고, 왜 그렇게 변덕스러울까 불만이 많은 적도 있었지만 주위의 다른 모양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마음이 천국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밖의 삶에서는 만나기 싫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은 피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보기 싫은 사람도 보아야 하고,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도 어울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전에 미워하던 사람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워지고, 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고, 나와 견원(犬猿)의 관계에 있던 사람, 나를 욕하고 돌아선 사람까지 용납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용서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왜 나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지 그 깊으신 사랑의 은혜를 깨닫는 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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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의 옷을 입음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입니다.
해서, 새 사람이라고 함은 기실은 원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짓과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마음에 도적질함과 더러운 말과 악의와 위선과 교만으로 두꺼운 옛 사람의 겉옷을 입고 있었던 우리인지라 이 옛 사람이라고 하는 옷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시며 나에게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나에게 다가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만 있다면 해서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분의 영이신 성령께 나의 전부를 내놓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옛 사람은 벗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역사하시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의무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정이 우리의 감정을 대신하고, 성령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를 대신하고 성령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대신하는 변화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새 사람의 삶으로의 변화를 사모하시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