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하나됨” (에베소서 2:19-22)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聖殿)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聖靈)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處所)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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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건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 나름대로의 교회에 대한 기대감 혹은 편견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교회가 이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인하여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란 사실은 제쳐놓고 ‘교회가 이러하기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저러하기에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들 중에, ‘예수구원’ ‘천국구원’ 외치며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과 같이 취급되기가 싫어서; 말많은 전도사가 싫어서; 교회가 술, 담배 이해 못해서; 교회는 팔자 편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서; 교인 아닌 사람은 사탄으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문화를 사탄으로 매도하기 때문에; 타종교, 타 종파에 너무 배타적이어서; 각종 제약이 싫어서; 양보 모르는 압력집단이기 때문에; 개척교회 간에 지나친 과잉경쟁을 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교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는 편견과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사람들의 교회 거부에 일리 있는 부분이 있기에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 눈에 우리 교회와 나는 어떻게 비칠까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혹은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한 사람의 ‘교회 가기 싫은 이유들’입니다: 기업화된 교회 위화감 싫어서; 빈민구제 외면하는 교회 이해 안 돼;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 메카니즘;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 볼 수 없어서; 양보없는 일등주의 세속성; 목사수준이 낮다, 엉터리, 사기꾼 목사들 때문에; 교회 종파분쟁 이해 못해; 이중인격자 많아 싫어; 헌금 따라 사람대접 달라서; 마음 터놓을 깊은 친구 없다; 예수님은 좋으나 교회사람들의 각종 행태가 싫고, 교회가 지능적으로 돈 밝히는 것이 싫어서; 아전인수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싫어서; 신분차별 때문에 벽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중에 어떤 것은 자신의 결점은 보지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또 상당부분은 교회의 잘못된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혹 이러한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면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성인 간디도 성경은 열심히 읽고 예수님은 그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교인되기는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영국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교인이라 하면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그들뿐 아니라 우리가운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자청하셨는데, 교회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장소가 되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헌물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한다고 스스로 여겨서 교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목사님이 부자를 특별 대우하는 곳이 교회라면 이도 또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화목과 일치를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교회가 반목과 대결의 장소이라면 이 또한 커다란 문제입니다.
복음서에 교회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머무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자기과시의 장소도 아니요, 누가 세상지식이건 성경지식이건 더 많은가 견주는 장소도 아니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귀고 놀 궁리를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또 한인교회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인끼리 모여서 생활정보를 교환하고 대화함으로서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장소도 아닙니다. 이러한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경배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획하고 힘쓰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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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로 표현된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육체로 이방인이었으며, 무할례당이었으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요,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화목의 제물로 죽으신 까닭에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의 막힌 담이 헐어지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화목의 제사가 있으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외인이 아니요 손도 아니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함께 동일한 천국시민이 되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속(household)"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머리되시는 하나님 가정의 식구란 뜻입니다. 1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자녀들)이 되게 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뜻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우리였는데 이제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호적에 우리를 양자로 편입시키시어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하는 반석(=터)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터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터는 또한 영원한 반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11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터에 비유할 때, 예수님은 또한 모퉁이 돌이 되시는데 이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석으로서 벽과 벽을 연결하는 건물의 중심이며 또한 이 모퉁이 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겨넣어 건물의 소유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라고 하는 건물의 기초석이요, 중심이요, 소유주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는 이미 시편 118장 22-23절에서 예언된 바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28장 1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구절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갖고 오시기 800여년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돌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돌을 믿는 자는 죽지 않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그 당시 사람들이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을 기초돌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우리는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4-5절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건물의 모퉁이 돌, 기초돌, 산 돌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건물의 굳건한 터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건물의 벽과 지붕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벽과 지붕의 자료들입니다.
벽과 지붕을 구성하는 자료들이 변변치 못할 때, 그 건물의 벽과 지붕은 웬만한 비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게 되어 세상사람들의 비난과 조롱꺼리가 될 것입니다.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삼풍백화점이, 성산대교가 붕궤될 때 사람들은 건축자를 욕하고 자료를 변변치 못한 것을 썼다고 비난했습니다.
교회의 벽과 지붕을 구성하고있는 우리의 변변치 못함으로 교회건물에 구멍이 나고 깨어지면 우리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건축자되시는 주님에게까지 화가 돌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서 건물의 벽과 지붕인 우리에 대해서 표현할 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것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건물의 벽과 지붕을 구성하는 자료일 때, 우리는 쉽게 불타고 허물어져 내리는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자료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이 단단한 자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로 인하여서 주님을 욕보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건물인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하고 화목하여서 하나의 성전이 되어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건물이나 성전은 성전이라고 함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말함입니다. 믿는 사람의 연합이 건물이며 믿는 사람의 연합인 건물이 연락하여 커다란 한 성전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영광(榮光)이 나타나는 성전일뿐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우리의 건물은 현재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일생동안에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가 어떤 모양의 어떤 자료를 사용한 건물을 지었느냐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력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15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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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가 주위사람들에게 “교회에 가기를 즐겨하는 이유”를 제공할 수 있는 교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님들은 모두 교회에 모여 찬송하고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주위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가 무언의 행동으로 가르쳐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갈리우고 반목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고, 기쁨이 넘치고, 서로 연락하여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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