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7, 2016

“성도들의 하나됨” (에베소서 2:11-18)


                       “성도들의 하나됨” (에베소서 2:11-18)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어떤 이상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허구한 날 싸우는 데 싸울 때마다 끝장을 볼 듯이 싸웁니다. 서로 짐을 싸기도 여러 번 하면서도 그러나 갈라서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날이 밝으면 싸우고, 또 날이 어두워지면 싸웁니다. 심할 때는 치고 받고 할퀴며 싸웁니다.
여자가 다니는 교회 사모님을 찾아가서 멍든 몸을 보이며 호소합니다: “사모님, 제가 이래도 그 원수같은 인간하고 살아야 하나요. 아유, 분하고 치가 떨려서 더는 못살아요.” 하며, 눈물을 흘리며 코를 훌쩍거리며 웁니다. 사모님이 그를 동생 대하듯 측은한 마음으로 달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참고 살아야지.”

목사님이 그 남편을 만나봅니다.
그 남편이 자기 아내의 모자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목사님, 말도 마세요. 이제까지 창피해서 말씀드릴 수도 없었는데...  저도 그 사람 얘기를 하자면 울화통부터 납니다. 연애할 때는 전혀 몰랐어요. 얌전하고 말수도 적어서 결혼하여 살면 제 말을 잘 듣고 제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라올 줄 알았죠.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결혼하자마자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한 마디로 자기 주장이 너무 쎄요. 자기 분수는 모르고 값비싼 화장품 아니면 안쓰죠,  명품이 아닌 옷이나 핸드빽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리고, 여편네가 얼마나 게을러터진지 집안도 안 치우죠, 아침에 9시 이전에 일어나는 법이 없어요. 목사님은 이런 여자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 아예 갈라서야 겠어요. 동네에서는 이미 소문이 나서 그렇지 않아도 더는 못살 판이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까지 아시게 되었으니 이번 판에 이혼해야 되겠어요.” 목사님도 “참고 살아가 보라”는 말말고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후에 그 부부는 이 일을 갖고 또 싸웁니다. “그래, 이제 사생결단을 내자. 이제 더 이상 너같은 인간하고는 못살아.” 목사님이 한 이틀을 기도한 후에 사흘 째 되던 날 이들 집을 찾아갑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두 사람이 다 집에 있습니다. 얼굴의 표정으로 보아서 그 날도 한바탕 난리를 치렀음을 짐작케 합니다. 여자가 말을 꺼냅니다. “목사님, 마침 잘 오셨어요. 이제 도저히 저 인간하고는 못살겠어요. 사모님이 참고 살아보라고 하셔서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이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
남자도 질세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한 마디 합니다. “사돈 남 말하네. 누가 할 소리를 하나. 목사님, 우리 헤어지는데 말릴 생각은 아예 마세요. 저는 이미 결심이 확고해요. 이제는 정말 안되겠어요. 이 여편네가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제 욕을 하고 다니는 거 있죠! 정말 창피해서 이제 직장에도 얼굴을 들고 나갈 수가 없어요.”
목사님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두 분 모두 잠깐 앉아봐요. 실은 내가 보기에도 두 분은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두 사람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목사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까닭이 싸움을 말리고 계속 잘 참고 살라는 권면을 하시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않던 말로 시작하십니다.
“두 분이 잘 싸운다고 이미 교회에서 알 사람은 다 알고,  해서 교회 내에서도 덕이 안되고 차라리 이 참에 아예 갈라서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을 것 같군요.” 그리곤 한 수 더 떠서, “법정에서 증인이 필요하다면 제가 증인을 서줄 수도 있어요. 이 두 사람은 도무지 같지 살 수 없는 부부라고.”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목사님의 말씀이 지나치고 심히 부당하다는 표정입니다.
여자가 말을 꺼냅니다: “아니, 목사님, 어쩌면 그러실 수 있으세요... 헤어진다고 하면 말리셔야지. 아니 이러시는게 교인을 사랑하신다는 목사님으로서 할 말씀이세요?”
남자도 옆에서 거둡니다. “저도 이제까지 목사님을 그런 분으로 보지 않았는데, 참 이상한 분이군요. 제가 성경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도 이혼을 금하고 있는데 ...”
목사님은 묵묵히 그들의 항변을 듣고 있다가 말없이 그들의 집을 나섭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빙긋이 미소를 짓습니다. 그 후로 그 부부의 싸움은 현저히 줄어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며 잘못을 고쳐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흐뭇한 소문이 들립니다.

 2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기에 육체로 이방인이었으며, 해서 할례자이던 이스라엘로부터 무할례당이라고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절: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방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할례받지 못한 것뿐아니라 그외에 다섯가지가 더 있습니다.
둘째로, 혈통으로는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중 잃은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축복이 없는 상태를 의도적으로 “그리스도 밖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합니까?
에베소서의 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과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시고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1:4),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1:7),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통일되게 하시고 (1: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고 (1:12),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1:13),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시고 (1: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그 뿐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지역적으로도 “이스라엘 나라 밖에 거하던”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다스리시는 대상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습니다.

넷째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자이니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에서 제외됨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세가지--땅과 민족과 복--의 약속을 주시고,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시므로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하면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부르지도 아니하던 자들이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하고는 무관하던 자들입니다.

다섯째로,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겉으로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고는 있었지만 기실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자이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이별할 날이 오면, 그의 생은 그는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그 이후에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못하는 소마없고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여섯째로,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니, 당연히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도 없이 살 소망과 목적없이 살아가던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사랑함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핸섬하고, 흠이 없이 온전하시고, 모든 이들로부터 흠모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신 분인데, 몸과 마음이 비뚤어지고 뒤틀리며 괴퍅하고 바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짝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못되어서 그와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나를 멀리 떠나 괴롭게 마소서” 하는데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게로 와다오” 하고 때로는 애원하시며 때로는 오래참으심으로 죄와 허물로 추하고 몰골이 사나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우리와 같은 모습을 입기로 작정하시고 그 자신의 아름답고 귀한 옷을 벗어버리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표현하는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이사야 55:2) 육신을 입으시고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참으로 기이(奇異)한 사랑입니다. 못생기고 부족한 사람이 잘 생기고 모든 것을 갖춘 상대를 죽자 사자 따라 다닌 사랑이라면 혹 이해를 할 것같은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정 반대의 경우입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닥아오시고, 우리 가운데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나?” 의심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멀리 있던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참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로 조심조심 가까이 닥아갑니다.

미녀와 야수(The Beauty and the Beast)에서, 미녀의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 야수의 죽어가는 몸에 떨어질 때 그 야수를 동여매고있던 마술이 풀리며 본래의 미남 왕자의 모습으로 변하듯이, 지고하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과 피가 야수보다도 더 괴물스럽고 마음까지 삐뚤어진 소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던 나의 몸을 적실 때 나는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그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닥아갈 때 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의 피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추하고 뒤틀린 모양이 되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몸과 마음에 떨어질 때 나는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이 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나 알게되고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나 같은 추하고 영혼의 병이 든 죄인을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멀어지고자 했는데 이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나도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14-15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의 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으셨습니다. 수평적 화목을 이루십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간의 질시, 율법을 맡은 자와 율법 밖에 있는 자의 갈등, 원래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물어내리셨습니다.

해서, 15절의 표현대로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한 새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 밖에 머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적인 의미로 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새사람”이라고 함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연합체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상전과 하인, 배운 자와 못배운 자,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분이 없이 한 새사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성도간에 서로 사랑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배운 것이 없어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저 사람은 천하여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저 사람은 못생겨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별하는 사람은 아직도 나같이 삐뚤어지고 추했던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아무리 오랜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한 부부라 할지라도, 헤어질 사람처럼 그렇게 심하게 다툴 때가 있지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을 이어온 끈끈한 사랑을 느끼기에 다시 서로를 감싸주고 어루만져주게 됩니다.
그들은 언제 싸운 적이 있었냐는듯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잉꼬 한쌍의 흐뭇한 아름다움을 선사해줍니다.

교인간에 갈등(葛藤)과 반목(反目)과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성격과 환경 가운데 성장하고 생활하는데 이러한 일이 없다면 오히려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지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과 발이 다르듯이 우리는 그렇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갈등과 반목과 다툼으로 나뉘어지고 영영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화합하고 우애하는 것이 한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인들이 구성하는 가족으로서의 화합이요 일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전혀 사랑받을 것이 없고 흠과 결점 투성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해 주어야 합니다.

16절: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수평적 화목을 이루어 우리로 “그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그 다음에는 “한 새사람이 된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실 뿐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간에 화목을 이루는 다리가 되고자 함이십니다.
Simon과 Garfunkel이 부른 노래의 가사,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에서와같이 인간으로 불화의 강을 건너가게하는 다리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남으로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불화(不和)의 강이 흐르고있어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육체로 다리가 되시고 나로 그리스도의 육체의 다리를 밟고 불화의 강을 건너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17-18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신을 좇으며 우상을 섬기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한 외침에 철저히 등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오래참으시는 중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형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시며 인간 사랑을 확증하시며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2,000년 전에 육신의 몸으로 인간에게 오신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우리에게 닥아오십니다. 해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도록 하십니다.

3
예수님께서 죽으신 형틀의 모양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두 통나무로 된 십자가입니다.
가로와 세로의 통나무 모두 다리를 상징하는데, 가로의 다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는 화목의 다리요, 세로는 나와 다른 사람이 화목하여 한 새사람이 된 다음에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시는 화목의 다리입니다.
성도의 하나됨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됨이 없습니다.
성도의 잘못을 용서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계명을 요약하면 두 계명 안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형제-자매-이웃으로 표현되는 성도간의 사랑인데, 두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첫째 계명을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같이 부족하고 추했던 죄인을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이 얼마나 큰지 경험한 우리는 성도간에 화목을 이루는 사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