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7, 2015

“거짓 사도와 참 사도” (고후 11:5-15)


“거짓 사도와 참 사도” (고후 11:5-15)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함이로라.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1
공자(孔子)는 군자인 체하는 사람을 향원(鄕原)이라 하여 ‘덕을 훔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제자 만장(萬章)이 향원에 대하여 맹자(孟子)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어딜 가더라도 성실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자님은 그를 ‘덕을 훔치는 자’라고 말씀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자는 대답합니다. “그를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지만, 그는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혼탁한 세상에 담합한다. 집안에서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듯 하고 밖에서의 행실도 청렴하고 고결한 듯하여,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긴다. 하지만 그와는 함께 요순의 도(堯舜지之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그를 ‘덕을 훔친 자’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나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들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은 곡식의 싹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간사함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구변이 좋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정나라 음악(鄭樂: 음탕한 노래를 뜻함)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음악(正樂)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 색과 혼동할까 걱정해서요, 향원(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덕있는 군자와 혼동할까 걱정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맹자(孟子)》「진심장구(盡心章句)」下).
원래 향원(鄕原)은 한 마을의 성실한 사람인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거나 들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성실함이 자신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겉모양만 덕 있는 군자인 체 처세하기 때문에 공자가 ‘덕을 훔친 자’라고 비판한 것이며, 사이비(似而非)--비슷한 것 같지만 아닌 것--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사이비(似而非) 목자가 있고 사이비(似而非) 신자가 있는데 참 목자와 참 신자와 혼동되어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이비 목자가 참 목자보다 목회에서 더욱 잘 하는 것같이 보이고, 사이비 신자가 참 신자보다 더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에서도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좋은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면 원수(=사단)가 곡식 가운데 혼동을 주기 위하여 덧뿌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묻는 종들의 질문에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대답합니다.
가라지가 아직 충분히 자라기 전에는 곡식과 비슷하여 혼동을 주기에 가라지를 뽑는다고 하다가 곡식을 다칠까 염려함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 자라서 추수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곡식과 가라지는 확연히 구분되기에 이제 가라지만 뽑아 불사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참 사도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거짓 사도인 자들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인물인양 행세합니다. 그들의 가르침만이 옳고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요 진리가 아니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침의 보수를 요구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시시한 선생이요 사도인지 알 수 있다고 바울을 비하(卑下)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그들의 언변과 수사와 논리가 그럴 듯 하고 위대한 선생을 자처하여 높은 보수를 요구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대단한 선생이요 사도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그들은 사이비(似而非) 거짓 사도들이라는 것입니다.

2
5절에서 바울은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극히 큰 사도들(these superlative apostles, RSV)”을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성경학자들도 있지만 문맥상 어색합니다. 그보다는, ‘지극히 큰 사도인 체하는’ 거짓 선생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현재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들이 그들의 헬라 철학과 수사학을 내세워 위대한 척하지만 바울은 그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씀함입니다.

6절에 “내가 비록 말에는 졸(拙)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 말씀합니다.
10장 10절에서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공격할 때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한 것과 같이 바울도 그 자신이 ‘말에 능숙하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헬라의 웅변술을 배운 거짓 교사들에 비하여 언변이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말을 번드르하게 잘 하는 것은 다만 외모일 따름입니다(고후 10:7).
혹은 양보절로 해석하여 “너희가 주장하는 대로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다고(능숙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εἰ δὲ καὶ ἰδιώτης τῷ λόγῳ)”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물론이요 세상지식에서도 그들에게 뒤질 것이 없다는 변론입니다. 그 자신이 유대인 랍비들 중에 당대의 일인자였던 가말리엘의 수제자인지라, 그가 철학, 논리, 윤리 기타 무엇에서도 거짓 교사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말함이 어리석은 일이지만(고후 11:1), 거짓 교사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자랑하니 나 바울도 그들에 못지 않다는 것을 어리석은 말로 자랑하겠다고 합니다(고후 11:16-18 참조).

7절에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 반문합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라고 함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주님 안에서 높아졌습니다.
복음을 전한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의 학문적인 배경으로 따지자면 세상에서 높임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이지만 스스로 낮아져서 그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장막 깁는 일(tent-making)을 감당함으로써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이로써 바울을 싸구려, 엉터리 선생이라고 비난하고, 그런데도 그가 사도를 칭한다고 하여 그가 마치 무슨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거짓 교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값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이 죄를 진 일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8절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하여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 자진하여 바울의 선교사역을 물질로 도왔으며 바울은 이에 참으로 감사하고 기쁨으로 여겼습니다(빌 4:14-18).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하는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마게도냐의 몇몇 교회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가 무슨 거짓된 것을 가지고 그들을 속여 빼앗았을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고후 7:2, 또한 8:20 참고). 왜 이러한 비난을 하는가 하면 현재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많은 물질로 바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우면 도울수록, 거짓 교사들에게 돌아올 몫(=보수)이 적어질 것인 까닭입니다.

9절에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1년 6개월간 사역할 때에 그는 장막 깁는 일을 감당하였지만 일 자체가 부정기적인 것이고 본업(本業)이 복음 전하는 일인지라 전적으로 장막 깁는 부업(副業)에만 매달릴 수도 없어서 바울은 늘 생활비의 부족을 겪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마게도냐 교회들이 물질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마게도냐 교회들의 도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그 자신의 생활비를 위해서는 인색한 고린도 교회에 손을 내밀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언급한 대로, 신령한 것(=복음)을 뿌리는 사도로서 육신의 것(=생활비)을 거둘 권리가 그에게 있었지만 그는 이를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다(고전 9:11-12)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에 장애를 주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그리하지 않는다”(고전 9:15)고 했습니다.
이제까지도 생활비 문제로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였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로 폐가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물론 그러함에도 악의로 가득찬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사기꾼으로 몬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10절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유와 구원의 도가 바울과 함께 하는데 육신의 것으로 구차하여지지 않는다는 바울의 삶의 자랑이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서 항상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앞으로도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섭섭하게 여기거나 사랑치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님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그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반문을 하는가 하면 거짓 사도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바울이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 엉터리요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생활비를 받지 않겠다고 말함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음은 고린도 교회와 아무런 결속(connection)을 갖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에 이는 그가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비방입니다.

12절에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가 현재까지 해온 대로 아가야 지방에서 보수를 요구하지 않고 자비량 전도를 계속해 갈 것인데, 바울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거짓 사도들도 비울이 자랑하는 이 자랑--보수를 받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비난과 공격이 잘못되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바울을 비난하고 그들이 전하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야말로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자기의 이익을 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거짓 사도들(false apostles)이요 궤휼의 역군(deceitful workmen)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아무리 참 사도인 척 가장하더라도 거짓 사도요 사단의 하수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한 표현을 썼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광명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면 이는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 또는 그에 속한 자일뿐입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미혹할 때에 몇 가지 사용하는 말이 있는데,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작은 일이니까”, “아직 젊기 때문에”, “딱 한 번만 하는 것이니까“ ‘해도 좋다’고 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그 사람과 그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위하는 척 그리 말하지만, 결과는 그를 넘어지고 망하게 할뿐입니다.

15절에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경고합니다.
사단의 일꾼이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미혹할 때 나는 사단에게 속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단의 일꾼인 사람도 자기가 사단에게 속한 줄 알지 못합니다. 그도 자신을 의의 일꾼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방해하는 일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사단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 사단의 일꾼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과 복음이 잘못된 것일 때 그는 이로 말미암아 사단의 일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구원을 전하는 자는 그 행위대로 심판에 이를 것입니다.
 
                                                                             3
바울은 교회 안에 참 사도가 있는가 하면 거짓 사도도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참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 그의 생활의 온전한 것을 드리고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는 주님의 의와 영광을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있습니다. 거짓 목자는 교인을 위하는 척하나 기실은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요 자기의 받을 몫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참 목자는 때로는 교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으나 회개함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안전한 피난처로 인도합니다.
교회 안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있습니다. 거짓 신자는 때로 자신을 포장하여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좋은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보다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온갖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이간함으로써 분열을 가져오고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무너뜨려 내리는 일을 서슴없이 감당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목자와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까?
주님을 향하여 날마다 좀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시간과 삶을 더 많이 자원하여 드림으로써 참 목자와 참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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