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중매(仲媒)” (고후 11:1-4)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1
술을 마시지 않는 크리스천으로서는 중매를 잘 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잘 못 할 경우에 욕을 먹는 일만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청년 남녀들을 보면 중매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제가 요즘은 중매서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생들 크리스천모임 지도자로서 활동할 때는 가끔 신앙이 좋은 남녀 학생들 사이에 들어서서 둘을 연결시켜 주는 (별로 득 되는 것이 없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나이 20살을 갓 넘긴 대학생들이기에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기보다는 좋은 사귐을 위한 중매였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둘의 신앙이 좋아서 같이 가까운 교제를 가지면 좋을 것같아 사귀어 보라고 하면 몇 달 동안은 잘 지내가다가도 성격 차이로 갈라서는 예를 종종 봅니다. 해서, 중매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남녀간의 사랑이란 크리스천의 좋은 믿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깨닫게 됩니다.
한국에서 1970-80년대에 한창 직업적인 전문 중매쟁이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마담 뚜’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수첩에 몇 백 명씩의 남녀 결혼적령자들의 이름과 신상을 갖고 다니면서, 좋은 조건의 남자나 여자를 소개해 주고는 소개비를 챙기는데 그 수입이 엄청났습니다. 그들은 소개하는 남자나 여자를 상대방 집에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상품'을 과장해서 선전합니다. 듣고 또 보기에 좋음 직하여 결혼을 하지만, 마담 뚜의 중매와는 다른 품질로 인하여 결혼생활이 조기(早期)에 파경에 이르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중매쟁이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입니다. 그가 중매하는 남성(=신랑후보)은 누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시요, 여성(=신부후보)은 '교회'(여기서는 고린도 교회)라는 믿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신랑후보이신 예수님은 흠과 티가 없으며 거룩하고 성결되고 온전하셔서 바울이 자신있게 어떤 신부후보에게나 천거할 수 있는데, 신부후보인 이 교회가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잘 받아들이고,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고, 믿음의 순결한 생활을 잘 하고 있으면, 중매쟁이로서의 바울이 이 신부를 떳떳하게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소개할 수 있습니다. “이 신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믿음의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는 일이 거룩하고, 성결되며, 순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되기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그러나, 신부인 교회가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일 때 중매쟁이인 바울은 참으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시며, 그와 혼인함에 어떤 유익이 있으며, 그 신랑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부후보인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본문을 통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부가 될 현대 교회를 향한 원하심도 이와 같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부인 교회(Church universal)는 공중에서 신랑과 함께 7년 혼인잔치를 가질 것인데,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 신부의 자질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합니다. 우리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거룩한 교회--신부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 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자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2
1절에서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함은 그가 11장과 12장에서 잘못되어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바울이 개인적인 배경을 말하며, 개인적인 어리석은 자랑을 하더라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참으로 딱하게, 참으로 어리석게도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의 외적 조건을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붙어 있는데 “다른 예수”를 좇고 있으면서, “성령”이란 이름은 붙어 있는데 “다른 영”을 좇고 있으며, “복음”이란 이름은 붙어 있는데 “다른 복음”을 좇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입니까?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스'(ζήλος)는 열성적임(zeal)과 질투함 혹은 시기함(jealousy)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시기함에 가까운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신 5:9)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부(新婦)인 이스라엘이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되 정결되고 거룩한 몸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질투하심 혹은 시기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질투함과 시기함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짐에 대한 대리 질투요 시기입니다.
“정결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노스'(ἁγνός)는 순결하다, 거룩하다, 순진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의 혼인절차를 보면, 약혼, 혼인식, 혼인잔치, 그리고 신부의 처녀성(virginity) 확인의 순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결혼한 신부는 처녀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쫓겨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신부가 처녀인데도 신랑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되면, 신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처녀인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신랑이 억지를 부리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신부의 정절(貞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부인 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절차를 보면 현재는 약혼한 단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7년 혼인잔치가 있을 것이고 처녀성 확인이 있을 것인데, 그 확인이 없더라도 신부인 교회가 순결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이미 그 교회가 잘 알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연합으로서, 또는 한 개인으로서 과연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시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그 거룩함, 정결함을 잃어버리면 그리스도께 버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순결을 잃어버린 교회는 모임은 될지언정 더 이상 순전한 의미에서 교회라고 불릴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서에서 호세아와 음녀 고멜의 결혼관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부요 아내인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하여주고 계십니다. 고멜이 호세아에게 세 자녀(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고도 음란한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남자들을 연애하고자 따라가지만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심에도 여전히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좇아가는 교회와 교인의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신부로서 정절과 순전함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의 대상인 신랑 또는 남편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중매쟁이가 될 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원하는 것은 그를 사랑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정결되고 온전히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고린도 교회가 이에 동참하는 것도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앙의 대상이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목회자가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에 따라서 신앙에 현격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일차적으로 눈에 들어오매 그에 의하여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영적인 남편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러한 한결같고 신실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믿음생활에 급격한 높낮이가 점차 없어지게 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신랑이신 예수님께 연결시키는 중매쟁이의 노릇을 하는 대신에 그 스스로가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인 남편 노릇을 하고자 할 때, 이러한 사람은 이단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아 철저하게 중매쟁이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 앞에 드러내고자 함이 없었습니다. 하기에,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드러내어 자랑함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11:1).
3절에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접근할 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부정하면 하와가 금방 알아차리고 경계할 것이므로 간교한 옛뱀은 하와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의로 해석하고자, 높아지고자, 잘 되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시킨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의 질문에 들어 있는 간계(trick)가 무엇입니까? 뱀은 일부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더냐?”라고 질문함으로 여자로 하여금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 분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 대답을 할 때, '예-아니오'라는 대답 대신에 서술하는 대답을 유도한 것입니다.
'예-아니오'의 대답에는 속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설명하는 대답 가운데는 그 사람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이 속마음을 읽을 줄 아는 뱀은 그 다음에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에 나오는 여자의 대답에 허점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2절에서 여자는 뱀에게,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하와의 속마음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17) 여자는 “만지지도 말라”를 덧붙임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엄격하다는 그의 반감을 드러냈고,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17) 여자는 “죽을까 하노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판결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간교한 뱀이 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단호하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2장 17절에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뱀은 이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否定)합니다. 이제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지 뱀의 말이 옳은지 판단을 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3장 1절에서 뱀이 여자에게 처음 접근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부정함이 없이 다만 그 마음의 틈새를 엿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4절에 이르러서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정면적인 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여자의 마음에 있던 원망과 불평과 의심의 마음이 옛뱀이 그 정체를 드러내도 좋다고 판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5절에 뱀의 논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부연합니다.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고 그 자신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안 이상 뱀은 망설이고 거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여자의 사이를 확실하게 갈라놓고자 합니다. “너희의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 걱정하셔서 먹지 못하게 금하셨다”고 말함으로 '선악과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을 망설이고 있는 여자에게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공합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과연 눈이 밝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도달하는 밝아짐'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는 밝아짐'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살고자 하면 세상에서 많은 손해를 볼 것 같이 여기는 사람에게, 때로는 자신의 귀한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사단은 그리하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바라고 갈망하는 것들을 잽싸게 알아차리고는 그것을 갖고 와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이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세상 복을 듬뿍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이것이 바른 성경말씀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귀에 솔깃합니다. 그리하여서 많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갑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하와를 미혹한 뱀과 같은 간계로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부추기고 미혹할 때 그들(=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여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날 위험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이리할 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의 낙원에서 떠났던(=쫓겨났던)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도 그리스도로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멀어져서) 썩어짐의 종노릇할까 염려가 됩니다.
현대의 교회가 진리의 복음에서 떠나 그 내용물이 변질될 때, 이는 또한 현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4절에 “만일 누가 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풍자적으로 말씀합니다.
바울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많은 교회들 안에 성경말씀과는 상관없이 이와 같은 잘못된 하나님, 잘못된 예수님, 잘못된 영과 잘못된 복음이 만연(蔓延)하여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그것은 그렇게 잘 받아들입니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의 인간적인 웅변술과 논리가 바울이 전한 것보다 인간적인 마음과 바람으로 듣는 사람에게는 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수”라고 함은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생이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실 뿐이지 인간은 아니다' '예수님도 단지 한 인간일 뿐이지 하나님은 아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지 부활하지는 않으셨다' 등등입니다. (참하나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님의 속성과 역할과 능력에 대해서 왜곡하여 그리는 모든 모습의 예수님은 비록 “예수”에 관하여 말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예수”입니다.
“다른 영”이란 성령 이외의 영을 말합니다. 다른 영의 역사와 능력이 성령과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을 때, 이는 “다른 영”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장 1-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靈)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에 어느 하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영이 “다른 영”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고 무너뜨려 내리는 영이 “다른 영”입니다.
“다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함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행위가 바로 되어야 한다든지, 할례(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든지,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든지, 정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든지 토를 달아서 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 온전한 구원의 효력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즈음에는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복음의 진수(眞髓)를 전하는 대신에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승진시험에 합격하고, 고시에도 합격하고, 장사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법니다.”고 하는 식의 변질된 복음을 전파함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복음 전도가 참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7-8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3
바울은 흠이 없으시고 티가 없으신 신랑되신 그리스도께 고린도 교회를 신부로 중매하기를 원하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서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도 여러분에게 권고하되, 우리의 흠 없고 티없으시며 정결하신 신랑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의 모습을 가꾸어가라고 말씀드립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 갈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그럴 듯해 보이고, 현세에서 더욱 평안하고 쉬운 삶을 살게 하는 것 같아서 그리로 갈 것이 아닙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
“참 예수”, “참 성령”, “참 복음”을 사모하며 분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