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고후 11:16-33)
11: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노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21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성을 지킬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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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샴(Thomas Gresham, 1519-1579)은 16세기 영국의 무역상으로 런던 거래소의 설립자로 유명하고 재정에 밝았으므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재정고문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588년에 여왕에게 재정상의 충고를 담은 서한을 바쳤는데, 그 첫머리에 “악화는 양화를 구축(驅逐)한다”(The bad money drives out the good money)란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하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는 지폐가 없었고 화폐는 은화(銀貨) 아니면 동화(銅貨)였습니다. 왕은 재정상의 궁핍을 덜기 위하여 명목가치(face value)와 실질가치(real value)가 같은 은화(銀貨)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는 동화(銅貨)도 발행하여 함께 유통시킵니다. 그리하면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와 같은(혹은 때에 따라서는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앞서는) 양화(良貨)인 은화는 장롱 깊숙이로 자취를 감추고 실질가치가 형편없는 악화(惡貨)인 동화만 시중에 유통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정량의 화폐가 유통되지 못하므로 경제는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요즈음도 유효한데 화폐유통을 설명하는 법칙으로서가 아니라(요즘의 화폐인 지폐는 실질가치는 거의 없고 명목가치만 있음) 사회의 일반적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한 말입니다. 정치인들이나 행정관리들이나 기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부패하나 교활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청렴하며 능력 면에서는 뛰어나나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거나 줄이 없는 사람들을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욕을 먹고, 교사의 도가 땅에 떨어지고, 목회자가 거짓말쟁이처럼 여겨지는 것도 바른 정치인과 공무원, 바른 교사, 바른 목회자는 그 설 자리와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권모술수의 정치인, 부정한 교사, 삯군 목회자의 위치와 목소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대우받는 사회적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사회·정치·경제적 현상이 비단 16세기 이후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양화 중에 양화이신 예수님도 악화들(=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내몰림을 당하셨고, 양화인 바울 역시 거짓 교사들이란 악화들에 의하여 온갖 중상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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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악화인 거짓 교사들과 맞서 싸우고자 할 때, 스스로 양화로 남아 있기를 그만두고 악화의 모양으로 자신의 어리석은 육체의 조건과 수고를 자랑하겠노라고 선포합니다. 그 까닭은 그러하지 아니할 때 악화들이 온통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어지럽히고 그 가치관을 도착(倒錯)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제 어리석은 자랑을 담대히 하고자 함은 그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이리 떼와 같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16절에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따라 그의 겉모양을 자랑함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 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입니다. 그가 알고 자랑하기로 작정한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고전 2:2)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스스로 몇 번이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3, 17)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불의나 불이익을 당하는 문제라면 “차라리 속아 줄 수도 있지만”(고전 6:7 참조) 하나님의 교회가 어지럽힘을 당하는 문제라면 그대로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교활함과 농간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같은 어리석은 자로 자신을 낮추어서 그들의 어리석음에 호소합니다.
17절에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지금 육체의 모양대로 자랑하고자 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 줄 누구보다 바울이 더 잘 알기에 “어리석다”(ἄφρων, foolish, senseless, ignorant)는 말을 반복하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외적 조건을 자랑함이 주님 안에서 하는 자랑이 아니요, 주님을 따라서 하는 자랑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의 모양대로, 어리석은 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노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자랑할 때, 이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되는데, 육체를 따른 자랑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오직 씁쓸함과 무익함만이 있을 뿐인데도 바울은 이 일을 자신도 하겠노라고 합니다.
19절에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고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주님 안에서) “지혜로운 자”이었더면 “어리석은 자들”(거짓 교사들)을 “기쁘게 용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혜 있는 척 하나 그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진리와 거짓이 무엇인지 분별도 못하면서 얼마나 대중적인 인기와 성향에 따라서 몰려가고 있습니까?
정작 용서를 발할 때는 용서하지 아니하면서, 용납하지 말아야 될 불의와 사단의 그림자는 얼마나 많이 용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20절에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自高)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라고 탄식합니다.
“누가”란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자칭 “지극히 큰 사도”라고 하는 이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그들의 육체적 모양을 자랑하며 헤집고 다니는데도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너희로 종을 삼거나”고 함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데 유대주의자인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시 “율법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율법을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그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아니요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를 것임을 강조함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유자로서 그들이 기쁘게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잡아먹거나”란 험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잡아먹힌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의 행태를 살피면, 그들의 재산과 시간과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서가 사이비 교주를 위해서 온전히 바치고 있음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엉터리 같은 말을 믿고 따를까?’하며 옆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정작 본인은 죽자사자 하며 잘못된 것을 좇아갑니다. 이것이 “잡아먹힌 자”의 모습입니다.
“사로잡거나”고 함도 “잡아먹거나”와 비슷한 표현으로써 거짓 교사가 부리는 대로 고린도 교인들이 아무 이견도 달지 않고 복종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지시를 받는 것이야 잘하는 일이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의 지시를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거짓교사들에게 사로잡힌 자”가 된 까닭입니다.
“자고하다 하거나”라고 함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자신들의 세상 학문과 배경을 뽐내고 자신들을 높이는 모습입니다.
“뺨을 칠지라도”는 거짓 교사들이 그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고린도 교인들을 농락하고 주무르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답답하게도 은사가 있다고 은사를 자랑하고, 지식이 있다고 지식을 자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이 거짓 교사들을 진짜 “지극히 큰 사도들”인양 받들고 그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응큼한 이리들로써 호시탐탐 이 순한 양을 통째로 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21절에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라는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원문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영어성경을 번역한 현대인의 성경은 위의 구절을, “부끄럽긴 하지만 우리는 너무 약해서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헬라어 원문에 가깝습니다(κατὰ ἀτιμίαν λέγω, ὡς ὅτι ἡμείς ἠσθενήκαμεν).
바울은 자신이 너무 연약하여서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일들--“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치는”--은 도무지 할 수 없음을 부끄럽지만 인정한다고 말씀합니다. 풍자적(諷刺的)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적 조건을 자랑한다면, 그러한 외적 조건, 육체적 조건과 수고에 대한 자랑은 나도 담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했습니다.
“히브리인”이나 “이스라엘인”이나 “아브라함의 씨”가 유대인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인데 바울이 이와 같이 세 명칭으로 열거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그들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이 세 다른 명칭들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본래의 뜻은 “강을 건넌 자”라는 의미로 갈대아-우르(바벨론의 옛 명칭)를 떠나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이동한 아브라함의 후예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언어적인 구분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인”이라고 함은 야곱의 자손을 의미하는 말로 “이스라엘”이란 말이 “하나님과 씨름한 자”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고 하는 축복이 담겨져 있듯이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이요 축복을 주신 민족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약속의 자녀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를 생산할 수 없는 육체적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축복하셔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는데 바울은 그 자신이 바로 이 약속의 씨에서 이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가 소아시아 닷소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가 설령 유대인을 자칭한다고 하더라도 어줍잖은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언어적으로, 인종적으로, 또 약속의 자녀의 의미에서 유대인 중에 참유대인--정통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3-27절에서 바울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그의 외적 수고와 고난들을 열거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의 직임을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은 “정신이 없는 자처럼 어리석게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수고와 고통과 위험 등에서 더욱 더 넘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은 수고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신 25:3 참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행전 16:22, 23, 33, 37) “한 번 돌로 맞고”(행 14:19)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고”(행전 27:41), (전도) 여행을 다닐 때에 “강의 위험(=강의 범람이나 끊김으로 인한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유대인들의 방해로 겪은 위험)”(행전 9:23-25, 29; 14:5-7, 19)과 “이방인의 위험(=헬라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대항으로 인한 위험)”(행전 16:16-23; 19:23-41; 17:1-9, 13-15)과 “시내(市內)의 위험(바울이 전도하던 여러 도시에서 겪던 위험)”(행전 14:19, 16:2-22; 17:1-7)과 “광야의 위험(=여행을 할 때 지나던 광야에서 겪은 위험)”과 “바다의 위험(=수로로 전도지에 갈 때 겪은 바다에서의 폭풍 등)”과 “거짓 형제의 위험(=잘못된 복음으로 바울을 괴롭히고 중상하던 자들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그의 외적 고통을 열거하며 어리석은 자랑을 합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그가 겪은 수고와 고통과 위험과 헐벗음을 열거함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까? 내가 이런 엄청난 수고와 고통을 당하였으니 알아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그의 외적 수고와 고통을 열거함은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표가 무엇이며 이 모든 일을 겪음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내세움은 있었지만 그들의 “사도”와 “일꾼”을 자칭함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28절에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육신으로 당한 고통을 계속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염려하는 그의 내적인 수고요 고통입니다.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라고 함은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그가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들이 거짓 교사들과 이단 교리들로 인하여 혹시 잘못된 길로 빠지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바른 목회를 감당하고자 하는 목사님들에게 이러한 내적 고통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고통스러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일신상의 일이 아닙니다. 그의 개인적인 기도가 응답되어지지 않아서, 재물이 없어서 고통스럽고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아서, 교회가 숫적으로 영적으로 부흥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합니다.
바울이 새삼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내적 고통을 말하는 것은 혹시라도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하여) 바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나 오해가 있는 교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위에, 바른 목회자의 수고와 염려가 무엇인지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이제라도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29절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 사랑함이 얼마나 극진한지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의 약함이 곧 그의 약함이 됩니다.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의 넘어짐이 마치 자기의 잘못인양 그렇게 애타하고 가슴 아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에는 저의 신앙만을 생각하면 되었습니다. 좀더 나가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돌아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인) 부족함이 나의 부족함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교인의 믿음 없음이 나의 믿음 없음이 되고, 교인의 영적인 잠에 취해 있음이 나의 영적인 잠에 취해 있음이 되고, 교인의 게으름이 나의 게으름, 나의 탓인 양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진보하고 기도모임에 열심을 내면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 양어깨가 들썩해지지만,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기도모임에서 떠나 있으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요 나의 탓인 양어깨가 처집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자랑이요, 목회자의 염려요 고통입니다.
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맞서서 육체를 따라 그의 외적인 조건과 수고, 내적인 수고들을 자랑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하여서는 참으로 무익하고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고 무익한 자랑을 통하여서도 고린도 교인들이 누가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참 사도요 거짓 사도인지 분별할 수만 있다면, 그의 (무익한) 자랑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서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득불(=반드시)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약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함은 그리할 때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10).
그의 육체적 가시를 자랑하고, 유대인 동족들에게 복음을 갖고 나아갈 때 반대에 부딪히고 거부당함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31절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육체를 따라 외적인 조건을 자랑한 것도(22절), 외적인 수고와 고통을 자랑한 것도(23-27절), 사도로서 내적인 수고와 염려를 자랑한 것도(28-29절), 또 그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함도(30절) 듣기 좋으라고, 읽기 좋으라고 그저 겉모습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고백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진실된 사랑의 표현임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32-33절에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그의 구주로 영접한 뒤 그의 삶은 180도 변하였습니다.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행전 9:21-22).
이에 그는 다메섹에 거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고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공모하고 그들의 음모로 아마도 다메섹을 다스리는 아레다 왕(Aretas IV, 아라비아의 왕으로서 9 BC - 40 AD 동안 나바티아[Nabataea]를 통치함.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기도 함)의 방백이 그를 붙잡으려고 그의 거처로 군사를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성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행전 9:23-25; 수 2:15 참고).
바울이 이 이야기를 여기에 언급함은 그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은 그의 연약함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강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연약함을 더욱 더 자랑할 것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공의와 정직이 반드시 승리하는 곳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공평하고 거짓된 것들이 공평하고 진실한 것들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갈 것이 무엇입니까?
불공평하고 거짓된 것들이 만연(蔓延)하여 있다고 하여서 분별없이 그것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이 세상임금을 좇을 때(엡 2:2) 우리는 여전히 그의 노예요, 그에게 사로잡힌 자요, 그에게 잡아먹힌 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단에 속한 것을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자랑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세상에 속한 재물을, 명예를, 지위를, 학위를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의 주님을 자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어리석은 자랑일지라도 그 자랑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 가운데서도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바랄 것은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약함과 능력의 약함과 환경의 약함을 자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능력이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우리 안에서 온전하심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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