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4, 2013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1-14)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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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보면 나이에 따라 주 관심사가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20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일이 30대에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고, 30대에는 그렇게 중요하던 일이 60대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해리스(Harris)는 “인간이 평생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가?” 알아보았는데, 그의 연구에 의하면, 10대에는 공부, 20대에는 이성(異性), 30대에는 일, 40대에는 자유(自由), 50대에는 여가(餘暇), 60대에는 건강(健康), 그리고 70대 이후에는 시간(時間)이 사람들의 주 관심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의 고하에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주요 관심사는 재물(財物)과 자녀(子女) 혹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자(配偶者) 또는 부모입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자녀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 년의 이민생활 끝에 본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더라도 자녀의 교육을 생각해서 돌아갈 것을 포기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녀를 하나만 두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서 그 자녀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일에 자녀가 무슨 콘서트(concert)를 한다거나, 타운(town)이 주최하는 무슨 운동시합이라도 있을라치면 교회의 장로나 집사인데도, 자녀의 일로는 교회를 빠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녀를 사랑함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고, 자녀의 콘서트에 부모가 당연히 참석하여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일로 인하여 번번이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 자녀가 하나님보다 우선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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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민족과 땅과 복의 세 가지 약속을 주시는데, 그가 갈대아-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칠십 오 세였고(창세기 12:4) 이삭을 얻은 나이는 백세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적어도 25년이 경과된 후에 얻은 약속의 자녀이므로 참으로 귀하고 사랑스럽고 자기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입니다.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그에게는 사랑스러웠지만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의 자녀요, 그나마 그는 사라의 등살에 못이겨 얼마 전에(창세기 21장) 내보내어 지금은 오직 이삭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현대의 젊은 부부에게 그들의 하나뿐인 자녀가 귀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귀한 것에는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25년의 기다림 끝에 그를 얻었을 뿐 아니라 사라의 경수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만일 이삭에게 사고라도 나면, 젊은 부부와는 달리, 또 다른 아들을 얻기란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분명히 그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셨고 약속의 자녀는 사라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삭의 나이가 십여 세쯤 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자녀를 내가 네게 지시한 곳에서 번제로 내게 바치라”고 명하시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의 번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아니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고 공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의심할 것입니다. 설령 그분이 하나님인 것이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제 정신으로 그런 명령을 하시는 것인지 반문할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틀림없고 또 제 정신으로 명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하나님을 안믿으면 안믿었지 자식을 절대로 번제물로 줄 수 없다고 다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기를 거부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에는 다른 생각이 적용되는 때였습니까?
그때에는 부모로서 자식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림이 아무렇지 않던 시대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도 자녀를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는 일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자녀를 태워서 바치는 일이 후에 행해졌지만,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서 11장 17절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믿음의 테스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인 줄 알았겠습니까?
만약 알았다면, 그의 마음에는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번민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 삼아 독자 이삭과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까지 동행하였을 것이며, 길을 가는 도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모리아 산 중턱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너를 붙잡아 매더라도 놀라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짐짓 너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시는 거란다. 내가 너를 죽일 듯 칼을 쳐들더라도 놀라지 마라. 하나님이 곧 멈추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고자 우리를 시험하실 때에 ‘자아, 이것은 내가 너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짐짓 주는 고통이란다. 고통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때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나 상실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참기 어려운 고통이나 상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는데, 어떤 영어성경은 이 소망을 "God's Approva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환난 중에 인내하고, 인내함으로 믿음이 연단되어질 때,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게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이삭 한 아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아들이 그에게 얼마나 귀중하였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요, 이를 통하여서 아브라함으로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할 아들입니다.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제까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왔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삭이 점점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하는 아브라함의 우상이 되는 듯 하였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생을 살펴보면 그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성정을 가진 사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우르 땅에서 부르시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란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그곳에 머뭅니다. 하란이 살기에 편한 땅이기에 거기에 안주하고자 함이 있었습니다. 머뭇거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나안은 너무 먼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데라를 취하여 가신 후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명하시어 그의 여정을 재촉하십니다.
죽음이 두려워 두 번씩이나 사라를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는 대신에 누이동생이라고 하여 외간남자의 품에 안기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 이전의 믿음’--곧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결정할 때 그 스스로 판단하여 이것은 해야겠고 저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반드시 순종함이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아니할 때도 순종함이 있었고, 잘못을 범하고 있는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그 말씀을 따르는 순종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순종을 매우 기뻐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필수요소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그의 동무들과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절).”고 명하실 때,
시몬은 예수님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라고 대답합니다.
베테랑 어부인 시몬이 목수 출신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고기가 많이 잡히리라고 기대하거나 믿은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이기에 의지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시몬이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지만 그의 최대의 장점도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라고 함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분명히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의논하였다면 사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요. 이 아이가 우리에게 어떤 아이인 줄 알기나 해요. 그건 아무리 하나님이 하신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어요.”
욥이 그의 열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고 했습니다.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머물던 곳인 브엘세바를 떠나 모리아 산에 도착할 때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그 사흘 길을 행하던 동안 아브라함 마음에 번민함이 없었겠습니까?
그의 마음에 번민함이 심히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삭을 주시고는 지금 와서 거두어 가시려고 하실까?’ 하나님의 심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아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궁리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있는 그곳에서 당장 이삭을 내게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왜 사흘 길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이는 하나님께 이삭을 드림이 경황이 없는 중에 시간의 촉급함으로 잘못 결정되어진 일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그의 중심에서 나온 결정임을 보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해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결정은 모든 것 위에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그의 독자 이삭을 포함하여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아브라함의 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5-7절: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사환 둘을 산 밑에 놔두고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산 중턱을 억장이 무너지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오르는데, 사정을 모르는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냐고? 바로 너란다. 아 글쎄 하나님이 너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고 하면서 원망섞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가히 믿음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는 대답을 합니다.

8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준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ראה)는 “보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현재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보시고 그를 준비하여주실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야 하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로 향한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faith of hope against hope)”입니다.
이 아들 이삭을 얻은 것도 사라의 태가 닫힌 상태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얻었는데, 이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하신 지엄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이 이삭을 죽이시더라도 다시 살리셔서 그 약속하신 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분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8-19절에서 이를 표현할 때,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오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노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상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고 할지라도 죽은 이삭을 도로 살려내시어 그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이 번성케 하실 수 있는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8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고 이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지 아셨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십니다.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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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산이 어디쯤 위치해 있습니까?
역대하 3장 1절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위치했던 솔로몬의 성전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단을 쌓았던 바위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후에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성전이 차례로 이 터 위에 다시 세워졌고, 헤롯 성전이 무너진 다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인 황금빛 돔을 갖고 있는 오마르 모스크(Omar Mosque)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오마르 모스크는 “Dome of Rock”이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큰 바위가 그 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슬픔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가 있고 그 길의 끝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갈보리 언덕이 있고, 또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수님의 돌무덤(Holy Sepulchre)이 위치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그 모리아산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희생제물로 드린 장소란 것입니다.
모리아의 한 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필요를 미리 보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수풀에 걸린 수양은 그로부터 2,000년 뒤 우리 인간의 필요를 미리 보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번제의 수양으로 준비하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로서 이삭을 죽게 하지 않으셨지만, 그 스스로는 우리 인간 사랑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리아의 한 산, 갈보리 언덕 위에서 죽이십니다.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의 찢기심이 아브라함보다 적지 않으시지만,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미련하고 불쌍한 인생에 대한 그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죽게 하십니다. 우매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직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혹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려고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상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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