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14, 2016

주 안에서 상전과 종 (에베소서 6:5-9)

주 안에서 상전과 종 (에베소서 6:5-9)
  
 
  6:5   종들아 두려워 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긋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1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원망꺼리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비웃음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싫어서 주님의 일을 안한다면 이 사람은 더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라, 참람(僭濫)한 말을 하는 자라 정죄당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다른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비방꺼리가 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다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욕을 당하고 원망꺼리가 되어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확실히 할 것은, 욕을 당하고 원망꺼리가 되되 자신을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원망꺼리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증거하다가 원망꺼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으니 욕먹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부커 워싱톤(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이란 사람이 있는데 19 세기 말로부터 20 세기 초를 산 흑인 교육자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하여 갔습니다. 그곳으로 이사하자 그는 대학교가 위치한 마을 주변을 어느 늦은 오후 시간에 산책하였습니다. 한 백인 여자가 장작을 패야 하는데 마침 한 흑인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릅니다. “이봐요 당신, 이리 와서 이 장작 좀 패주지 않겠어요?” 부커 워싱톤은 두말 하지않고 “그러지요” 대답하고는 열심히 그 부인이 가리키는 장작더미를 다 패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또 다른 잔일도 해달라고 명령쪼의 부탁을 합니다. 워싱톤은 군말하지 않고 성실하게 그 백인 여자가 당부한 일을 처리하여 줍니다.
그로부터 며칠 안있어 그 마을에 있는 대학교의 총장 취임식이 있다고 지방신문에 광고되고 그 백인 여자도 총장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궁금하여 취임식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연설하기 위해 단에 선 총장의 얼굴을 본 그 부인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인권이 신장되기 전인 20 세기 초반의 일이지만 저명한 흑인 교육자요 지도자인 총장을 흑인 노예 부리듯이 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지나친 일이라 생각되어 취임식이 끝난 다음에 워싱톤 총장을 찾아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행동을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총장님,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그 때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워싱톤 총장은 미소를 띈 얼굴로 “아닙니다, 부인. 그날은 덕분에 운동을 잘 한걸요.”
  
2
바울은 오늘 본문 상전과 종의 예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와의 세 번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주의 신학자들이나 북미의 흑인 신학자들은 에베소서 6장과 골로새서 3-4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한 권면을 싫어합니다. 이는 지배층의 횡포를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구절(句節)이라고 하여서 성경에서 제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글은 상전과 종의 관계를 당연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현 세상을 살고있는 나의 입장에서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관계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순종함이 참으로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내가 아내로서, 자식으로, 또한 종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나의 신세를 비관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남편을 대하되 그리스도를 대하듯 할 것이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므로 영의 부모인 하나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종으로서 상전을 대함에도 성실하고 기쁨으로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설교할 때 믿는 사람으로서 또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상전이신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떻게 함이 합당한 것인가 설교하고자 합니다.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상전에게 순종하되 “두려워하고 떨며” 하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다”는 말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어떤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또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의 권력이나 사단의 권세 앞에 두려움은 믿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요한도 계시록 21장 8절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들과 환경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며 싫어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두렵고 떨며”라고 함은 극한적인 경외함인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러한 마음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상전이신 주님을 대할 때 우리는 “성실한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ἁπλότητι)는 원어적 의미로는 “단순한 마음으로 (with simplicity)”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with single-hearted devotion)"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순종하되 이거 저것 재고 얻어질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님되시기에 정몽주의 시조에 나오듯이 “님 향한 일편단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심(丹心)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6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의 종으로 상전이신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함은 겉과 속이 같게 하여야 합니다.
체면치례(體面致禮)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 예배에 빠지면 목사님이 뭐라고 생각하실테지 해서 주일예배에 참예함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행하기 보다는 사람의 귀와 눈을 찡그리게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주인의 일을 나의 일처럼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교회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할 때 나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의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 속에 파묻은 그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자기의 일을 함에는 그렇게 게으른 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문제는 주인의 일을 경시 여기며 눈가림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7절: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바울은 사람의 상전을 섬길 때도 주를 섬기듯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믿는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서 만홀히 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되 “단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단 마음으로”(μετʹ εὐνοίας)라고 함은 “기쁜 마음으로” 혹은 “선한 마음으로”(with a good will) 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말씀합니다.
우리의 상전이신 주님을 섬길 때, “단 마음으로”--즉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뜻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되,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베푸실 것입니다.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앎이니라.

우리가 혹 아랫 사람을 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윽박지르거나, 협박하거나, 공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종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떠는 마음으로 아랫 사람을 선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삶입니다.
 
3
매 주일 정성스럽고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상전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단 마음으로” 하기로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Sunday, May 8, 2016

주 안에서 부모와 자녀들 (에베소서 6:1-4)

주 안에서 부모와 자녀들 (에베소서 6:1-4)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1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출전...회남자 인간훈편)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는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입니다.
국경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이웃 나라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낙담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몇 달이 지나자 노인의 말이 이웃 나라의 준마들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노인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렇게 크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재앙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리요?” 노인의 집에는 좋은 말들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어느 날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절름발이가 된 아들을 불쌍히 여긴 이웃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별로 좌절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찌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일년쯤 지나자 이웃나라가 국경을 침입해 들어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을 병사로 징병하고 이들은 전장터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불구라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크게 좋아할 것도 없고 또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들은 다만 환경일 따름입니다. 나의 앞에 주어진 환경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환경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요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함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6장 9절에 주 안에서 세 관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세 관계 모두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상전과 종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교할 때 이미 밝혔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도 그것이 궁극적인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려주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되시는지 알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내로서, 자녀로서, 혹은 종으로서의 자신의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러나, 현재 나의 처한 상황에서 태만하거나 불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불성실하거나 불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들은 아내요, 자녀요, 종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남편과 아내에게, 부모님께, 상전을 대함에 순종과 공경과 사랑함으로 하지 못한 사람이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공경하고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부모-자녀의 관계를 보면, 모세의 십계명 중 제 5계명에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도 밝히고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가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주 안에서”란 “주님의 뜻 안에서”란 말로 혹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도적질하라’ ‘우상숭배하라’ 명할 때 이는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것은 부모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되므로 “주 밖에” 있는 것입니다.
곧 “주 안에서”는 세상을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자식 사이의 순종의 한계를 설정하여 놓은 것입니다.
“순종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입니다. 훞(ὺπ)은 “아래”란 뜻이고, 아쿠오(ἀκούω)는 “듣다”란 뜻이므로, 후파쿠오(ὺπακούω)-“순종하다”는 “아래에서 듣다,”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다”란 말입니다.
 
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순종(順從)이 실천적(實踐的)인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공경하다”(τιμάω)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하다”란 의미로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되,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부모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할 때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 했는데, 모세의 십계명 중 제 2계명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2계명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약속이라고 한다면, 제 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제 2계명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 은혜(恩惠)’의 실제적인 예로서, 구체적인 약속-“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이 모세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광야를 행진하다가 시내 산에 1년 머물 때에 받은 계명이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가나안 땅은 아직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해서, 사실은 “여호와가 네게 줄 땅”이라고 미래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는 확실한 보증(保證)이므로 “내가 네게 준 땅”-곧, 6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이미 준 바 된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어기고 부모를 말이나 행동으로 치거나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과 기업을 받지 못할 것을 분명히 하셨는데, 출애굽기 21장 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고, 21장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咀呪)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경고하십니다.

3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네가 잘 되고”라 함은 하나님의 질적인 축복을 말함이며, “땅에서 장수하리라” 함은 양적인 축복입니다. 땅이라고 함은 “약속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장차 거할 곳-“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킬 뿐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땅-“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땅”도 포함합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장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4절에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가 두 가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했는데, 골로새서는 그 이유를 말할 때 3장 21절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들이 종종 자녀들을 소유물 취급한다든가 가볍게 대하며, 자기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때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며 그들에게 낙심(落心)을 줄 수 있으며 마음에 응어리를 남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형제간에 비교하는 것도 금물(禁物)인 것은 이로써 마음에 상처(傷處)를 받을 자녀도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오직 주의 교양(敎養)과 훈계(訓戒)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자녀를 격노(激怒)케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회초리와 훈계로 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모의 성냄입니다.
‘주 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는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훈계함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를 한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일입니다.

3
자녀로서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고 그 징계를 잘 받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시고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예에서 육신의 부모와 영의 부모에 대한 순종(順從)과 공경(恭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모친 마리아의 말씀을 들으심과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는 가운데도 모친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부탁하는 것과, 영의 아버지인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은 반항과 반역으로 혼탁되어 있는 현대 사회를 가정에서부터 정화(淨化)하려는 우리의 노력이며 이를 위한 출발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의 올바른 질서확립이 사회 전체를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때 자녀는 부모의 은혜와 수고와 사랑을 감사하며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땅의 유업을 얻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러나, 우리의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달아 알고자 함입니다. 육신의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에서 영의 부모인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공경의 예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일이나 신앙의 일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곳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는 참으로 쉽고 순식간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넘어지거나 추락함 없이 쉬임 없고 성실하게 한 단계 한 단계 믿음의 계단을 올라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받기에 합당한 우리 모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 (에베소서 5:22-33)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 (에베소서 5:22-33)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펴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保養)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1
셰익스피어(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햄릿(Hamlet)을 보면, “Frailty, thy name is woman! (약한 자여, 너의 이름은 여자로다!)”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그의 부왕이 죽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 모친 게투르드(Getrude)가 부왕을 독살한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Claudius)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절망하여 외친 말입니다. 여기서 ‘약한 자’로 번역된 frailty는 신체적 약함이라기 보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도덕관이나 절개가 허약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단의 대리자인 옛뱀이 먼저 이브에게 접근한 까닭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유혹에 빠지기 쉬웠던 까닭이었습니다. 남자는 먼저 흙을 취해서 만들어 모양에서는 덜 곱고 투박하지만 유혹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데, 여자는 남자의 귀한 부분이요, 뼈 중에 뼈인 갈비뼈로 만들어서 그 모양은 더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대신에 미혹에 넘어가기 쉬운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되 더 아름답고 좋은 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여자는 선악과 한 개로 인하여 그 우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위성을 상실할 뿐아니라 일생을 남자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여자의 실수로 인한 지위의 격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현대를 사는 여성들이 이 글을 대하면 적지 아니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브와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신 징벌을 보면, 창세기 3장 16절에서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장 17절에서 “아담(=남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절을 비교해보면, 여자에게 내려진 징벌이 남자에게 내려진 것보다 더 큼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함 없이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었더라면 해산의 고통 없이 다른 방법으로 아마도 하나님께 청하여서 원하는 만큼의 자식을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자식을 낳게 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처지로 낮추십니다. 해서,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후 남자와 여자는 때로는 서로 미워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되며, 또 때로는 그러면서도 서로 그리워하며 결합하기를 원하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뜻은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서로 도울 배필이요,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육체적 정신적인 결합을 통하여 그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커다란 창조의 섭리-주님과 하나되는 비밀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
바울은 5장 22절-6장9절에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유지하는 세 가지 예를 통하여 주님과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요, 둘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요, 셋째는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먼저 아내된 자들에게 권면하고, 그 다음에 남편된 자들에게, 그리고 이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합니다.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복종하다”(ὑποτάσσω)란 말은 ‘...의 권위(authority) 혹은 명령(command)아래 자신을 두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뜻은 남편의 권위아래 들어가 남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함은 철저히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복종은 노예가 그 주인에게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하는 복종은 아니며, 사랑하기에 남편의 말에 청종하고 행하는 자발적이고 기쁜 복종입니다.

23-24절: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를 설명할 때 머리와 몸으로 비유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을 몸된 성도의 연합인 교회가 준행하듯이, 몸된 아내도 범사에서--모든 일에서--가정의 머리된 남편의 뜻과 명령을 잘 받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그 몸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있는 골로새서 3:18-19에서 바울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주님 안에서 마땅한--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사랑으로 하듯이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함 역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물로 씻어 회개케 하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시며 흠과 티가 없게 하심과 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으로 이와같이 아내들도 남편들 앞에서 흠과 티가 없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발견되어지게 하고자 함입니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되 교회가 흠과 티가 없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신 것같이 남편도 아내 사랑할 때 이와 같이 할 것인데 이렇게 하여 아내가 아름답고 거룩하게 되게 하는 것은 남편이 그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아내를 사랑함의 결과이므로 결국은 자기 몸--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29-30절: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육체의 머리와 몸을 구성하여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를 보양하고 양육하는 원리를 우리가 알진대, 한 육체, 한 가정의 머리와 몸의 역할을 감당할 남편과 아내도 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보완하고 위하여주는 일을 감당할 것은 그 둘이 한 육체로 연합한 까닭입니다. 우리 말에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란 말이 있는데 매우 성경적입니다. 부부는 한 마음--같은 생각을 품고 한 육체를 이룹니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나님이 한 남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시고 한 여자에게 남편을 허락하시어 그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게 하심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됨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고자 함이며, 주님과의 연합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인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이 연합의 중요성을 고린도전서 6장 6-17절에서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아름답고 거룩한 연합에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음란으로 정욕을 따라 연합할 수도 있습니다. 곧,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사람의 삶은 연합은 연합이로되 음란과 정욕으로 인한 연합을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은 주님과의 연합을 알기 위해 우리에게 이 세상 살 동안에 허락되어진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같은 고린도전서 7장 1-4절에서 “너희가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연합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혼자 있음으로 외로와하며 음행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연합의 비밀을 가르치심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미국사회에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더욱 정결하고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독신으로 지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다양하게 파트너를 만나고 얽매이지 않는 관계를 갖기 위하여 독신자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결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 하면, 결혼하는 것도 좋으나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가까운 때에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합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7장 8-10절에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節制)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3세기를 산 위대한 교부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하신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거세하고 고자가 되어 일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이 꼭 그가 행한 것처럼 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같은 마태복음 19장 4-6절에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창세기 2:24)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정상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인데, 크리스챤 부부의 가장 중요한 연합의 의미는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함의 크고 놀라운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부의 육체적 연합도 쾌락이 일차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됨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결혼하여 부부의 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며 아내는 남편을 복종과 경외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남자나 여자 모두 우리의 영원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를 위하여 희생적(犧牲的) 사랑으로 죽으신 주님께 복종(服從)과 경외(敬畏)의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3
성경에 나타난 이 세상을 사는 남편과 아내의 역할과 관계를 보면, 복종과 사랑으로 서로 대하라고 하고 아내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여자가 좀 손해이요 열등한 입장에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온 우주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는 남자와 여자에게 차등을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게 하신 것은 여자의 범죄함이 남자보다 컸기 때문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게 하심은 남자 또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징벌에서 자유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징벌을 내리시되,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 연고로 그들을 서로 의지하게 하시며 서로 연합하여 위로하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하게 되는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동일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도 가하고 하지 않는 것도 가한데, 이왕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과 복종함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나 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동안에 믿는 사람의 집단인 교회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비밀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제도입니다.
그 이후에 천국에는 결혼하는 것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없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분도 없고, 종이나 자주자의 구분도 없이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연합한 거룩한 성도만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결혼관계에 있습니까?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심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혼자 지내시는 분이나 아직 미혼이신 교우님들도 이러한 결합을 놓고 기도하심으로서 궁극적으로 주님과 연합함의 크고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 아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