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 곧 강함이라” (고후 12:1-10)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트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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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老子)는 그의 제자들에게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게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한 제자가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것보다 강한 것이 낫다고 하는데요?” 노자가 대답합니다. “강하면 쉽게 부러지나 연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세찬 바람이 불면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 뿐 부러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쁘다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다시 대답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남의 미움을 받기 쉬우나, 어리석은 듯이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하느니라.” 그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합니다. “그렇군요.”
공자(孔子) 일행이 위(衛)나라에 들렸을 때, 위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진법(陣法)--전쟁을 잘 하는 법--에 대하여 묻습니다. 공자는 자신은 인의 도덕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전쟁하는 법은 배운 것이 없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영공의 푸대접이 시작되고 그의 무도(無道)함에 실망하여 급히 위나라를 떠나 진(陣)나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는 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곤경을 당합니다.
그 당시의 제후(諸侯)들은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과 정보를 얻는 댓가로 이들의 여비를 보조했고, 다른 유지들도 평소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여비를 보조하는 것으로 예(禮)를 표시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는데, 공자의 일행은 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공자의 제자 중 자로(子路)는 누구보다도 최고의 학문과 인품을 지닌 군자임을 자부하는 스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토록 곤경에 빠지게 한 세태에 분개하여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군자 역시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합니다.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그러나 소인은 곤궁하면 그릇된 일을 범하느니라.” 군자는 늘 곤궁하기 마련이지만, 소인과 다른 것은, 곤궁함에 처해서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편)
위대한 문학가나 예술가의 삶을 보더라도, 그들의 생전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고통의 약함 속에 살다가 간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바울도 신약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주위에는 늘 많은 반대자가 있었고, 그의 복음은 동족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주님을 위한 삶은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핍박과 가난과 약함의 연속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세계 복음화의 큰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2
바울은 12장 1-4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자기가 본 환상을 남의 이야기하듯 하고 있습니다.
그 환상을 말함이 아무 유익이 없지만,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간 그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경험인양 기술한 것이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어떤 사람이 바울인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그 경험이 누구의 경험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3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그가 경험한 이 신비의 체험을 14년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데 있는데, 이러한 경험을 새삼 지금 “부득불 자랑함”은 고린도 교회 내에 교인들을 선동하는 거짓 교사들이 환상과 계시를 자랑하기에 그가 체험한 환상과 계시가 그들의 것보다도 더 신비하고 큰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은사의 체험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에 그치는 것은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14년이 지난 지금 3인칭의 표현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신비한 은사체험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이 신비적인 체험을 한 바울을 마치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도 이와 같은 신비체험에 몰두할까봐서입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보는 하늘(=공중)이요, 둘째는 그 하늘 밖에 있는 무수한 별들이 존재하는 하늘(=우주)이요, 셋째는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거하시는 하늘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혼이 몸과 함께 갔는지 아니면 몸은 말고 영혼만 갔는지 그 자신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셋째 하늘에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낙원”(παράδεισος)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예수님께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고, 두 번째는 오늘 본문(12:4)에 나오고, 세 번째는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낙원의 의미는 성도들이 육신으로 죽은 후 세상의 끝이 이르기 전, 곧 천국(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영혼으로 머무는 어떤 장소(눅 23:43과 고후 12:4 참고)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천국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재를 볼 수 있는 곳(계 2:7)이라고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하늘나라에서는 두 개념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으로 낙원에 이른 성도는 바로 그 순간에 거룩한 몸을 덧입고(지상의 시간으로는 대기하는 상태이지만) 눈물이 없고, 애통함이 없고,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낙원은 영혼의 대기장소일 뿐 아니라 영혼이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계 2:7 참조)에 낙원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제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말”(ἄρρητα ῥήματα)이란 ‘너무나 거룩하고 성스러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너무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기에 글로 기록할 때에 넉자로 된 말(tetragram)인데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점 네 개(....)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이를 읽는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은 그 점 네 개(....)가 야훼 하나님을 뜻하는 것임을 알므로 그 글자를 읽을 때 옷매무새를 바로 잡습니다. 또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발음할 수도 없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이름이기에 “야훼” 대신에 “아도나이(=주님)”라고 발음하고 앉아서 성경을 듣던 모든 백성들은 이 이름이 나오는 곳에서는 모두 일어나서 경외감을 표시합니다.
바울이 낙원에서 들은 말도 그와 같이 거룩하고 경건한 말이라 감히 표현하거나 발설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ἃ οὐκ ἐξον ἀνθρώπῳ λαλήσαι)이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말로 누설함이 허락되어지지 않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하니 바울도 그들에 맞서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할 것이나 이것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인지라 어리석은 자랑을 더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하는 입장에서는’ 자랑을 더 계속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모양으로) 익명(匿名)의 자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약한 것들”외에는 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11:30 참조).
6절에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을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본 것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고 경험한 것 이상의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하는 모든 말이 참말이라고 했습니다(11:31 참조).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말하지 않고 그만 두고자 함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환상과 계시 등 신비적인 은사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몰두하여 교회 안에 불건전한 (자기 자랑과 신비주의에 치우치는) 은사의 사모함이 있을까 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혹은 더욱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사단을 통하여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을 주십니다. 사단의 시험으로(욥 1:6-12)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러하고, 다윗이 사단의 격동으로 인구조사함(대상 21:1)과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그의 낮아짐이 그러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과정 중에,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사단의 시험이 또한 그렇습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한 이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바울이 갖고 있던 육체의 병이라고 말합니다. 안질, 말라리아, 언어의 장애, 간질 등 다양하게 추정합니다.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함, 그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방인의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 유대인 형제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이냐?’ ‘그로써 그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나?’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울이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함입니다.
8절에서 “이 육체의 가시가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이 이 문제를 놓고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매어 달렸는가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웬만한 문제 같으면 한 번의 기도로써 주님의 응답을 얻었을 터인데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도 (긍정의)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의 위대성은 하나님의 부정의 응답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습니다(모세, 다윗, 예수님, 바울).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매어 달릴 때 이를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바울은 그가 간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즉,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항상 ‘Yes’ 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No’ 도 있습니다. 바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No’ 이었습니다.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지라. 이러므로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연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육신이 약하고, 받은 바 은사와 능력이 적은 반면, 어떤 크리스천들은 부하고, 건강하고, 받은 은사와 능력이 많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데, 정작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으며 그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2-4절에서, “또한 그(=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음은,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가 벼리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온전하여집니다. 우기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때는, 내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이기보다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와 세리, 그밖에 세상의 눈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12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미련함과 약함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보다 지혜롭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에 ‘No'로 응답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케 하시는데 이는 바로 우리가 연약할 때에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온전하다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그렇게 절실하게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기의 온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고 나타납니다.
따라서, 10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 모든 일이 잘 되어나갈 때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 것 같은데, 성경 속의 예들에서와 실제 주변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더라도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어려운 환경과 고통과 궁핍과 약함 가운데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기도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형편이 좋아지면 쉽게 간구함과 감사의 생활에서 떠남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간교함이요 약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강하심이 우리의 약함 가운데 나타나시니까 우리가 일부러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자청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과 형편과 위치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강하심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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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사람으로서는 온전에 가깝고 성령충만한 분이었지만 그에게도 미치지 못함이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Yes”로 응답되어지지 않음이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 원함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믿음의 사람 바울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재 형편이 고통이요, 궁핍이요, 수치일 때 또한 바울을 생각해보며 위로를 얻습니다. ‘바울과 같은 하나님께 참으로 가까이 간 사람도 고통과 궁핍과 능욕과 곤란의 삶을 살았는데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 것이지’ 자족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였던 것같이 현재의 약함과 곤란과 고통을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강함과 온전함과 지혜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미련함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