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0, 2013

“약속(約束)의 자녀” (로마서 9:1-18)

                                             “약속(約束)의 자녀” (로마서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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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는 65세이상의 연령층(年齡層)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을 것으로 전망(展望)합니다. 현재 사회가 조기은퇴(早期隱退)를 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21세기를 살 사람들이 해결해야할 커다란 사회문제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정된 일자리로 인한 조기은퇴를 장려할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와 환경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할 줄 믿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쇠약한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만 주어지면 70세 이상이 되어서도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12장에서, “너희는 청년의 때--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아직 기력이 있을 때에 그를 위해 힘써 일하라”고 권면하듯이, 우리의 청년 됨은 육체적 나이로 인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의지적 나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가 노인이라도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 작정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르는 청년의 삶을 사는 사람이요, 내가 젊은 사람이라도, “나는 주를 위해 살만한 의지와 시간이 없다”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대로 청년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로마서 12장 4절이하와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됨을 업수이여기고 전혀 일을 아니 하거나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할 때에 나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구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일을 감당할 때 자긍(自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는냐는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우님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있다고 하면,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교회가 감당 못할 일이 없음”을 인정하게될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연세가 많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아시고 담임목사님의 심방을 청합니다. 그리곤, 그 목사님께 작고 쇠약한 목소리로 말씀합니다: “목사님, 내가 매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여 우리 교회가 이만한데, 내가 이제 부르심을 받고 가야하니 교회가 걱정이 되는군요. 나를 대신하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기도의 용사를 마련하셔야 됩니다.” 이 권사님은 그 교회의 성장과 유지가 자신의 끊이지 않는 기도로 인함이었다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잘하여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한 줄 알았는데 그 권사님 말씀을 들으며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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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8장은 교리적 부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즉,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교만의 마음으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심판과 죽음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었는데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의 육체를 지배하는 죄의 법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우리 앞에 고난이 놓여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위의 피조물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를 대적하거나, 송사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고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제외(除外)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장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권면하는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나의 형제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는데, 바울이 이와 같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함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흩으심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심이 아님을 바울이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비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가운데는 늘 그의 민족에 대한 기도와 간구로 가득 차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가까운 형제·친척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을 때, 이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모색하여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믿지않는 사람인데도 나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다 하면 나의 믿음 역시 잘못된 믿음이요 구원에 합당한, 영광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약속의 자녀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자녀 이삭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약속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민족의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75세쯤 되어 나이 많음으로 자녀를 잉태할 수 없을 줄로 알고 사라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육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자손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를 바울은 본문 11-12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보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의 역사로 받아들입니다. 곧,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 중 어리숙한 형 에서가 약삭빠른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됨은 에서가 장차 그 행위에 있어서 야곱보다 불의하기 때문에 그렇게 됨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들의 일생을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가운데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혹 이르되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하거나 불의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14절에서 반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의 기록이 아닙니다. 말라기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신 축복과 보응을 보고 기록한 결과적인 표현입니다.

주권적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더라도 다른 민족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왜, 하필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내가 보기에는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보다 내가 더 나아보이지만 못한 이스라엘을 택하였다고 내가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엿장수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엿장수가 같은 돈을 받고 엿을 줄 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준다고 해서 내가 돈을 낸 분량의 엿을 산 사람이 항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누구를 불쌍히 여기든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린 주권적 역사(役事)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간구하매 그에게 그의 등을 보게 하실 때, 출애굽기 33장 19절에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함대로, 또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달음박질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은혜와 긍휼을 베풂이 오직 주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과 생각대로 달음질한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함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1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자를 강퍅케 하시는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矜恤)히 여길 자만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퍅(剛愎)케 여길 자도 마음대로 결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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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은 우리 편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의미없는 존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 하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에서 떠난 삶을 살면서 아무리 달음질하고 아무리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원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신 계획과 섭리가 다른 것이었을지라도 우리의 겸손함과 간구를 보시고 혹시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실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돌이키시는 것도 주님의 권한 속에 있습니다. 해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8-19절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그릇이요, 악인은 심판을 베풀고자 작정하신 그릇이지만, 이들이 그에서 떠나 다른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시는 식언(食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약속에서 떠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든지 심판하시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미리 보시고 미리 아시는 주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뜻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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