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0, 2013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 (로마서 9:19-29)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 (로마서 9: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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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삽니다. 뚱뚱한 사람과 홀쭉한 사람,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백인, 흑인, 황색인등등...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외모와 조건, 인생항로에 만족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들과 정신박약아 및 지진아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우리 일행의 방문을 조금도 반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함을 알고 그들이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의 그늘지고 일그러진 표정뒤에 감추어져있는 아름다운 속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러앉아 같이 찬송하고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서로 간증하였습니다.
다음주일 저녁예배에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특송을 부탁하였는데 그들이 부른 찬송가는 세상의 어떤 유명한 합창단의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은혜스럽게 들렸습니다.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


그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의 손으로 그들의 고통받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계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저들에게 처소를 예비하여주시기 위해서 하늘로 먼저 올리우셨습니다. 하늘의 처소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정박아나 지진아보다는 형편이 낫지만, 참으로 어려운 환경과 사정을 가지고 이 생을 살아가는 성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거쳐가는 역려과객(逆旅過客)의 삶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 중에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모습은 감사와 찬송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흙 한덩이로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긍휼의 그릇의 삶입니다. 우리의 외모나 형편은 우리가 여행자로서 입고있는 옷에 불과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이를 영원한 가나안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한 옷으로 덧입을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모습과 환경속에서 맡겨진 달란트를 잘 경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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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다른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과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반박인즉 하나님은 이미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15-18절에서 하나님의 공평-불공평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긍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과 긍휼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렸다고 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히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이유없이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공평원칙(公平原則)에 따른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무언인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나에게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하면, 금방 원수가 되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대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어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른 아침에 포도원 집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품군들과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아침 9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이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합니다. 12시와 3시에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오후 5시에 다시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서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데려다가 일하게 합니다
날이 저물어 품삯을 계산할 때,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먼저 온 자들이 생각할 때, 그들은 더 많은 시간 일하였으니까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줄로 기대하였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은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자기네들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왜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와서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품삯을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는 약속을 어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처음 데려올 때 한 데나리온 주기로 약속하고 데려왔으니 약속대로 준 것이고, 늦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마음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방법대로 하자면, 분명히 잘못된 품삯계산 방법이지만, 이것이 심판날에 하나님이 우리와 하실 계산방법이라고 할 때,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의대로 하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세상의 윤리와 도덕 기준에서 착하게 산 사람이 사형 당하기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형수보다 우선적으로 천국에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던 한 유대인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옥행을 명하십니다. 그때 그가 눈을 들어 낙원을 쳐다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가 예수님 곁에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저 자는 사람을 죽인 강도인데도 낙원에 들어갔는데, 매주 공회에 나가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잘한 저는 왜 지옥행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너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느냐? 너희 인간은 불완전하여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데, 저 사람은 바로 그 길을 택한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워놓은 가치판단과 공평의 척도를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기준대로 이행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義)-불의(不義)의 기준은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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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에서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을 강조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그릇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공평-불공평, 의-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불평합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고, 어찌하여 사람들을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20절에서 반문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하겠느뇨?

바울은 하나님-인간, 즉,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그 진흙 한 덩이가 어떤 용도의 그릇으로 빚어질까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갖고있는 절대권(絶對權)을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을, 또 다른 한 덩이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더라도 이는 온전히 그의 소관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만든 그릇이 마음에 안들어서 부숴버리더라도 진흙 한 덩이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진흙덩이가 토기장이의 뜻을 거스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拒逆)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빚어지는 진흙덩이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의 용도(用途)에 따라 빚는 것이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이렇게 빚어달라 저렇게 빚어달라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10장 15절에서,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 있는 체 하는 우리의 모습이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내 뜻에 따라 오라 명하는 삶을 살려고 함을 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잘못된 믿음의 모습입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잇는 체 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와 다르신 것은,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이 귀히 쓸 그릇도 천히 쓸 그릇도 아닌, 볼품없이 잘못 만들어진 것일 때 그대로 부숴버리지만, 하나님은 그가 만든 인간이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아닌-- 긍휼의 그릇이 아닌--잘못 만들어진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했습니다 (22절).
                                                   
요나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하고 음란한 니느웨성의 사람들은 분명히 잘못만들어진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릇도 하나님은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사람들은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또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준비되었던 진노(震怒)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6-10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를 떠나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 긍휼을 거두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예비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야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27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란 적다는 뉴앙스를 줍니다. 해서, 몰몬(Mormon)이나 말일성도(末日聖徒) 교회 교인들은 자기네 숫자에 들어오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란, 숫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께  있는 믿음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구원에 합당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과연 얼마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통한 영광나라의 삶이 얼마나 확신 있게 실감됩니까?
설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믿음이 구원받기에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시더라도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도 어여쁘게 여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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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각각 진흙 한덩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의 목적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가진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시간이 많으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을 터인데 합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시간과 물질적 조건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물질이 주어져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 금액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의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를 주님의 용도에 따라 주셨습니다. 어떤 이는 좀더 많이, 또 어떤 이는 좀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히 쓸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뚝배기는 뚝배기 나름대로 특별한 용도가 있듯이 천히 지음 받은 그릇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지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아니, 우리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니느웨성의 사람처럼 주님께 회개하고 나아감으로서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어떠한 그릇으로 지음 받았든지, 우리는 다 약하고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면--가난, 소수민족, 달란트 적음 등등--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것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단 둘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던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20세쯤 되었는데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기에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의지하여 이제까지 그래도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오죽이나 딱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 홀어머니는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첫째는, “제가 외로울까봐 20년 동안 저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허락(許諾)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했고, 둘째는, 이 세상보다 더 평안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불러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고, 셋째는, ”아들로 인하여 제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식으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시험꺼리를 거두워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불평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불평을 하게되고 감사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감사꺼리가 넘친다고 합니다.
장미 꽃을 보면서 한 사람은 그 꽃이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찬미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가시가 많다고 불평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입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귀한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나 생각해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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