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8, 2013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행전 13:1-3)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행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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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일들은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는 것을 장려합니다.
경기를 하더라도 우승을 해야지 준우승을 하는 사람이나 팀은 빛이 바랩니다. 마라톤을 해도 1등을 하는 사람은 두고두고 기억되지만 2등을 하는 사람은 0.1초 차이로 2등을 하더라도 금새 잊혀집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주연배우는 화려한 각광을 받지만, 조연배우나 엑스트라는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엑스트라나 조연이 주연배우가 되기 위한 한 과정으로는 몰라도 엑스트라나 조연에 만족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요즘은 어떤 영화에서는 조연배우의 뛰어난 연기로 영화가 사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조연배우의 개런티가 주연배우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고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합니다.

바울 주위에 많은 조연 또는 엑스트라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역할이 크든지 작든지 만족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소스데네, 더디오, 뵈뵈,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왔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주연배우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엑스트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평가기준에서는 모두가 다 중요한 인물들이요 인격들입니다.
세상에 글을 남긴 것이 없거나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사람들의 평가에서는 엑스트라 취급되거나 무시되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에 있어서는 사도들보다 더 칭찬이 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직분은 목사이고 설교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가대의 찬양도 중요한 것 같고, 대표 기도하는 일 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모든 직분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평가는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는 그 기준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직분이 목사이든지, 장로이든지, 권사이든지, 집사이든지, 아니면 아직 아무런 직분이 없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하여 내가 내 자신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스타 목사나 스타 장로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나있는 장로님이 있는 교회라든가 지식층이 많은 교회가 오히려 그렇지 못한 교회보다 성장하지 못하고 시끄럽기까지 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일인자나 주연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엑스트라나 2인자 되는 것에 만족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성장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금방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인들만 2인자나 조연이 되는 일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조연이나 2인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주연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심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달란트, 봉사를 드리기에 열심일 때 그 성도는 주님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시는 성도이며 그 교회는 주님이 축복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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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는 2인자가 되기를 즐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바울을 위해서 2인자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입니다.
만일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바울이 사도들과 교제하며 어떻게 주류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바나바는 중요한 신앙의 선배요 동역자요 친구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때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행전 9:27).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함으로 가이사랴를 거쳐서 다소로 피하여 갔을 때 다소까지 그를 찾아가서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나바입니다(행전 9:29-30, 11:25-26).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니라.”고 기술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good man)이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았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의미는 격려자(encourager) 또는 권위자(=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 comforter)입니다. 격려나 권면과 위로를 잘 한다는 것은 커다란 은사요 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나바의 격려와 권면과 위로가 사울을 바울 되게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쿠(加來國生)라는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성적표를 나눠줍니다. 가쿠의 차례가 되어 성적표를 받으러 나갔더니 선생님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에도 이처럼 잘하라.”고 말하고는 성적표를 건네 줍니다. 사실 그는 성적이 하위였기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날 따라 선생님이 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지 의아하여 성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성적은 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그에게 성적표를 보여달라고 졸랐지만 그는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요한 변화가 그의 신상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에게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나도 노력하면 상위성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이 즐겁고 학과과목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나중 믿음을 시작한 사람들을 칭찬할 때, 목회자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감사할 때, 교회는 아름다운 발전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증거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할 때 바나바의 격려나 위로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이지만, 주위에 나를 격려해주고 함께 같은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며 하나님의 길로 날마다 날마다 꾸준히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왔을 때, 그곳 안디옥 교회에서 둘이서 함께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일컬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만난 이래 그 둘은 거의 모든 곳을 함께 다니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들의 공동사역 초기에는 바나바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 힘대로 부조를 마련하여 바나바와 바울 편에 보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안디옥에 1년을 머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한 후에 그들을 파송하였습니다.
해서, 바나바와 바울과 또한 바나바의 조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함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의 전도지는 소아시아의 남부 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밤빌리아에 이르렀을 때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소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끝까지 전도여행을 잘 마쳤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이방인 크리스천의 구원문제로 시비를 걸어왔을 때에도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에 함께 참석하여 그들의 이방인 전도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변론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그들의 변론을 옹호하여 좋은 성과를 갖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의 말씀 가르치는 일에 힘씁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들이 전에 전도 여행한 지역을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지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일차여행 때에는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나 먼저 예루살렘으로 간 마가이지만 다시 한번 그에게 함께 일할 기회를 주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반대를 합니다. 그와 같이 자기 육신만을 생각하는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팁니다. 해서, 이 일로 둘이 심히 다투고 각각 다른 길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수로로 여행을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육로로 여행을 떠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 중에 누구의 것이 맞습니까?
둘 다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바나바가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마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나중에도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삼촌인 바나바가 자기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줌으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고 후에 베드로와도 교제하여 베드로의 영적 아들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변변치 못한 믿음을 보인 사람일지라도 그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음을 봅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과 헤어진 바나바가 어떤 전도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 이 사람 저 사람을 격려하며 위로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꾼 되게 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후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다시 협력목회를 한 것을 보면,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판단이 옳았음을 더욱 알게 합니다.
바울의 후기서신인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니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골 4:10-11)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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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정해진 직무가 따로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띄는 일로 봉사할 수도 있고,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일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기관이나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보조적인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맡든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감당하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마음으로 하느냐 하지 못 하느냐입니다.
우리가 맡은 바 어떤 일을 감당하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마음으로 감당할 때 하늘에서 우리 상급이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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