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8, 2013

“너희가 믿을 때에” (행전 19:1-7)

                                                     “너희가 믿을 때에” (행전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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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설교자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이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성령 안에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며, 우리의 본성과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이고, 우리의 고백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화 되는 것은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화 되지 않도록 하는 믿음은 부패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마귀의 믿음에 불과하며, 그것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여전히 전통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가 만약 성령의 다루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신실하고,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욱 더 훌륭해지고 더욱 능력 있고, 더욱 신실하고 더욱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이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삶은 늘 우울하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지하게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그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주장하시는지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부정적인 삶의 자세와 부정적인 말로 교회의 다른 사람들까지 낙담시키거나 언짢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흠이나 트집거리를 찾아내는데 귀재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 삶의 모습이 여전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언행과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에 교회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말과 행동이 부정적인 사람은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세상일에는 열심인데 교회 일에는 자신의 시간이나 열정을 쏟아 붓기에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자신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즐겁고 자원함으로, 열정적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면, 내가 도무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8:9).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내’게 의로와짐도 없고, 구원함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더 더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나’의 교회생활은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낭비(浪費)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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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의 목회를 감당한 설교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바울은 그의 3차 전도여행을 소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에베소에 이릅니다. 에베소는 그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잠깐 들러 전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9-21절에 기록된 대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더러 오래 있기를 청할 때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고 떠난 곳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제자들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도 그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을 통하여 1세기말 2세기까지 지속된 흔적이 있습니다.

2절: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우리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며,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은사가 나타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는 힘입니다.
교파에 따라서는 중생(거듭남)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기도 하지만(순복음교회 계통),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할 때 성령(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 입술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며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는데, 그리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는데도 내 안에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누구신지, 성령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성령을 시인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지 안 계신지의 첫 번째 증거는 내 마음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곧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께서 나를 이끌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올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나오신 여러분은 적어도 성령님이 이끄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이 아직 마음 속에 들어오시지 않고 문밖에 서 계신 사람에게도 성령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증거는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시지 아니하고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는데도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건성으로 하는 고백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입술뿐만 아니라 나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삶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최우선입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함에 예수님을 위한 일이 1순위요, 그 다음에 나나 나의 자녀를 위한 일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지로나 부담으로 여겨지지 않고 나의 삶의 자연적인 모습일 때 이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요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또 로마서 8장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네 번째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이 있음입니다.
세 번째 증거가 있는 사람에게는 네 번째 증거인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은사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요, 그 은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심은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열거된 성령의 은사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6-10절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있고,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사도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교사의 직분, 능력, 병 고침,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함”이 있고,
로마서 12장 6-8절에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이 있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 “사도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복음 전하는 직분, 목사의 직분과 교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외에 열거되지 않은 많은 성령의 은혜의 선물, 은사가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드리기를 원하고 하기를 원하는 모든 봉사와 수고와 열정이 은사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증거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권능에 해당하는 헬라어 두나미스(δύναμις)에서 다이나마이트(dynamite)나 다이나믹(dynamic)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내게 주어질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에 힘이 생기며, 전도할 열정이 일어나며, 그저 현재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섯 번째 증거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이기적이고 나와 나의 가정을 위한 신앙생활이었는데 성령이 내게 임하실 때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전에는 교회 일에 관계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거나 그저 마음에 내키는 일만 겨우 겨우 감당했는데 그리고 “예”라는 말 대신에 “아니오”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성령이 내게 능력으로 임하시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교회 일을 부탁하면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것을 맡아도 불평하지 않고 즐거움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증거는 삶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환경이 어려워지면 믿음도 아울러 식어졌는데, 이제는 환경이 어려워도 고통스러운 일이 닥쳐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으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고통 가운데도,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를 발하게 됩니다.
주위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과 평안과 축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합니다.

3-4절: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성령의 세례말고 무슨 다른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할 때 ‘요한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요 죄사함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생명을 주는 능력은 없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자체로서 온전한 것이 아니요 다만 장차 올 온전한 세례의 예비적인 세례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증거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증거 받은 요한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5-7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통하여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증거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과 예언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마가의 다랑방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46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놀임을 들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역에서 성령의 임하심이 이와 같이 주로 귀에 들리는 방언이나 예언을 통하여 임함은 기독교 사역과 전도의 초기이므로 쉬운 방법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되기 쉬운 증거로 임한 것은 좋은데, 그것을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방언과 예언의 문제로 그 안에 소란함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은 그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증하고 증거하기 위함이심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아울러 주심으로서 교회에 유익을 주고 주님께 영광돌리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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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성령을 받는 일이 왜 필요합니까?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구원과 영생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3장 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도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고 바울은 단언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생활 그 자체가 온통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명령 지킴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수고도, 우리의 노력도, 우리의 직분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다만 헛것일 뿐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자신들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며, 이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엡 5:18).
아직 성령 받음에 확신이 없는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입술과 삶의 고백으로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게 성령 받음에 확실한 증거를 주시옵소서. 성령이 나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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