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 2013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 (사도행전 4:5-12)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 (사도행전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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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는 세 자음으로 구성된 어근(root)으로 그 뜻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윗은 다바드(דוד)에서 온 이름입니다. 다바드에는 일차적 의미로는 ‘흔드는 것’과 관계된 의미들--흔들다(swing), 흔들어 움직이다(rock), 안고 어르다(dandle)--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사랑하는 것’과 관계된 의미들--귀여워하다(fondle), 사랑하다(love)--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1절에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도디’이고 ‘사랑하는 자’라고 할 때는 ‘도드’(דּוֹד)입니다.
해서, 다윗의 이름도 ‘사랑하는 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윗의 이름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다윗의 이름은 이중적 의미로 ‘흔들다’와 ‘사랑하다’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들다’와 ‘사랑하다’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가장 직접적인 연관은 엄마가 사랑하는 어린아이가 무엇이 불편하여 보챌 때 ‘흔들면서 어릅니다.’ 해서, ‘사랑하는 아이를 귀여워하되 흔들며 어르며 귀여워하는 모습’에서 ‘흔드는 것’이 사랑하는 표현임에서 ‘흔들다’와 ‘사랑하다’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흔들다’와 ‘사랑하다’의 더 중요한 영적 연관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그 자녀를 온상에서 키우려고 하지 않고 거친 들판으로 내모는 이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격언에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여행을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쉽고 편안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험한 인생을 경험하게 합니다.
독수리는 그 새끼의 집을 벼랑 끝에 짓고 또 나는 훈련을 시킬 때 새끼를 물고 높은 공중으로 치솟아 그대로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날개짓을 못하고 그대로 떨어질 것 같으면  쏜살같이 내려가 그 새끼를 받기를 되풀이하며 그가 제 힘으로 날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러는 동안, 날지 못하는 새끼는 얼마나 위태롭게 느끼겠습니까?
사자는 사랑하는 새끼들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낭떠러지를 기어올라오는 새끼들만 강하게 키웁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내 종 다윗’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아홉 번(왕상 11:36, 38; 대상 17:4; 시편 89:3, 20; 렘 33:21, 22, 26; 겔 37:24) 나옵니다.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을 사울 다음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다윗의 혈통과 고향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종 다윗을 온실 안에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마구 흔드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평안 가운데 있은 때가 드문 왕입니다.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그의 장인 사울과, 아들 압살롬과, 그의 부하들과 전쟁을 합니다. 전쟁에서 그들에게 쫓겨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흔들림과 쫓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거의 절반인 73편이 다윗의 기도시입니다.
주여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나의 모든 죄를 사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부르짖음은 그가 당하는 곤고와 환난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구입니다.

성경에서 “구원하다”란 말은 다윗의 시편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위험한 상황이나 그물에서 벗어나다,’ ‘깊은 구덩이나 수렁에서 빠져나오다,’ ‘죄와 허물의 사함을 얻다,’ ‘병이 낫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모세’(Moses)의 이름도 '건지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인들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하였기에 어린아이인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는데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를 물에서 건져내었기에 ’모세‘라고 이름하였습니다(출 2: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과 고통의 땅 애굽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그 고통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마련하십니다.
‘건짐’이란 의미의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어 광야 40년 동안 가나안 땅을 향하여 광야에서 행진하다가 요단강 동편 느보산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에 올라 거기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할 지도자로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를 택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란 하나님은 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세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완성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은 죄와 허물과 고통의 땅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벗어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애굽은 무엇이며, 홍해는 무엇이며, 광야는 무엇이며, 요단은 무엇이며, 가나안 땅은 무엇입니까?
애굽은 우리가 아직 크리스천이 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홍해를 건넘은 신앙생활의 시작을 말하고, 광야는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말하고, 요단강을 건넘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요단강을 건넘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의 육적 죽음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거기에 영적인 가나안 땅인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에게 구원이란 영적인 가나안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미치는 영역입니다.

성도는 이 지상을 살 때에도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며 살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명령하심에 온전히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할 때, 그의 마음 속에, 그의 가정 안에, 그가 속한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수아를 통하여 육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해서 육적인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가나안 땅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므로 영적인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란 이름인 헬라어적인 표현으로 히브리 이름으로는 ‘예수아’ ‘여호수아’입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그의 자녀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주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이미 이사야서 61장 1절에 예언되어 있는데,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 받는 것,’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는 것,’ ‘갇힌 자가 놓임을 받는 것,’ ‘병든 자가 치료받는 것,’ ‘눈먼 자가 눈 뜨임을 받는 것,’ ‘귀신들린 자가 귀신에게서 자유로와지는 것’ 등등 이 모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받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의 구원의 표적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구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구원--고통에서 잠시 벗어나며, 병에서 나음을 얻으며, 마음의 번민에서 평안을 얻는 것--은 다른 종교와 철학과 명상을 통하여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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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절: 이튿날에 관원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즉 오후 3시 경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미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전 3:6)고 할 때에 그 앉은뱅이가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행전 3:1-8).
이에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랄 때 베드로는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그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말씀을 들은 자들 가운데 믿는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 몇을 붙잡아 그들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질문함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며 그들이 잡아 빌라도에게 넘기고 죽게 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일을 무슨 권세로 증거하였느냐는 질문입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가 제사장들이나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까닭입니다.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는 아직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기 전이라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이 있었기에 그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나음에 관하여 증언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앉은뱅이의 나음을 ‘구원’(9절)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원의 보편적인 의미입니다.

바울도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는데,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행전 14:9)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전 14:10)고 명합니다.
그리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뛰어 걸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종종 말씀하시는데, 병에서 나음을 얻었다는 의미로 구원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 나음은 영원한 구원의 예표이지 최종목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으로 옮겨갑니다.

11-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에게 버림 당하심을 가리킴입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사야서 28장 16절에서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초돌이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죽지 아니하리라, 곧 구원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지 않고 살림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케리그마’ 즉 선포입니다.
여기에 토를 달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복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아버지께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구원인데 오직 길 되시고 생명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만 가능합니다.

천하에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의 서적을 읽음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연구함으로 이 세상을 사는 인생의 지혜와 덕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가게 하는 구원을 베풀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며,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시요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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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얘기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행한 한 특강에서 "나처럼 평범한 목사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로 말문을 열고, 자신의 지난 목회여정에 대한 간증을 주로 이야기했다. 조 목사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이며 마음 속에 있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서 지나쳐서 베푸는 자신의 생각에 관용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너무 편협하다’란 비난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을 지키고 믿고자 하는 것이라면, 비난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12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상 삶을 살 동안에도 기뻐하고 또 나가서 그를 증거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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