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4, 2016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1-6)


“그리스도의 비밀” (에베소서 3:1-6)
           
 
  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1
한 때는 많은 수도사들과 수도원을 찾는 사람으로 꽤나 북적거리고 헌금과 기부금으로 여러 가지 많은 사업을 펼칠 수 있었는데 세속주의 물결로 이제는 모든 지원이 끊기고 다섯명의 수도사만 남는 초라한 상태로 전락하고만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도원장을 포함한 다섯명의 수도사가 모두 70이 넘는 고령으로 몰락이 눈 앞의 일로 닥쳐왔습니다.
근처에 한 랍비가 은거처로 사용하는 오두막이 있었는데 이 랍비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가까운 도시에서 유대교 공회당 (Synagogue)을 수십 년간 이끄는데 비교적 성공적으로 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도원장은 그들의 수도원의 몰락을 생각하면 하도 답답하고 막연하여 궁여지책으로 날을 정하여 이 랍비를 찾아가서 수도원을 되살릴 방법은 없는가 조언을 얻기로 하였습니다.
수도원장이 랍비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랍비는 다만 동정을 표할 뿐입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랍비는 작은 소리로 탄식하며 말을 잇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영적인 문제로부터 멀어져있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도 현상은 마찬가지랍니다.” 둘은 함께 성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의견을 교환합니다. 시간이 많이 경과하여 수도원장이 일어나면서 아쉬운 듯 마지막으로 랍비의 조언을 기대합니다: “좋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제가 찾아온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가게 되는군요. 쓰러져가는 우리 교단을 살릴 조언이 없겠습니까?”
랍비가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전 아무 조언도 드릴 것이 없군요. 단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수도원에 계신 다섯 수도승 중에 한 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수도원장이 돌아오자 네 수도사들이 무슨 소득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수도원장은 별 도움말을 얻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다만 랍비가 이르기를 우리들 중에 메시야가 있다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했는데 무슨 뜻인지 통 알 수 없군요”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수도사들은 랍비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그가 헛튼 말을 한 것은 아닐터인데... 우리들 중에 메시야가 있다고? 그러면 우리들 중에 과연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그 메시야가 누구인지 가려내기 위하여 곰곰히 생각합니다. 수도원장이 아닐까? 그는 오래동안 우리들의 지도자이었으니까. 하지만 토마스 형제인지도 몰라. 그는 성스러운 사람이니까. 어쨋든 엘러드 형제를 두고 한 말은 아닐꺼야? 그는 이따금 변덕을 부리지. 하지만 엘러드가 가시같은 존재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주장이 항상 옳았어. 어쩌면 그가 메시야인지도 몰라. 빌립 형제는 확실히 아니야. 빌립은 너무 순종적이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그는 누군가 그를 필요로 할 때면 항상 나타나곤 하지. 마술이라도 부리는 사람처럼 어느새 옆에 와있단 말이야. 어쩌면 랍비는 그를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를 일이야. 난 절대로 아닐꺼야.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니까. 하나님 저는 분명 메시야가 아니지요. 제가 당신 앞에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제가 잘 압니다. 그렇지요?
그러는 사이에 다섯 수도승은 메시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을 갖고 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에 하나 혹시 자신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특별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이 위치한 곳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고있어서 이따금 사람들이 소풍삼아 수도원을 찾아와 잔디밭에서 놀거나 수도원 주변 오솔길을 산책하곤 합니다. 또 때로는 황폐해져가는 수도원에 들어가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단지 쓰러져가는 수도원으로 여겼는데,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에 사는 다섯명의 수도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경심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존경하는 그 마음들이 후광처럼 수도원 전체를 감싸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상한 매력과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더 자주 그곳을 찾게 되고 또 다른 아는 사람들에게 그 수도원의 아름다운 경관과 수도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매력적인 존경심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이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수도원을 찾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늙은 수도사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얼마 후에 한 젊은이가 수도원에 입문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뒤를 이어 또다른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들어오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몇 해 뒤에는 수도원이 예전처럼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를 방문해보면 그 교회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게 됩니다. 목회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있고,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돌봄이 있는 교회는 자연스레 찾고자 하는 이가 많고 따라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성도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불신과 멸시와 다툼, 사랑 대신에 미움이 있는 교회는 찾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 방문하였다가도 머물지 않고 이내 떠나버리고 맙니다.

2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을 위한 사도 직분을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1-2장을 간추린 것입니다.
 
1절: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 
 
“이러하므로”라 함은 앞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일이요 해서 이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로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 함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바 된 것은 유대인들에 의한 것인데 그들의 주장하는 바로는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인들을 데리고 거룩한 성전에 들어감으로 성전을 더럽힌다고 함입니다.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함으로 결국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이송되고 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을 위하여 한 은혜의 경륜(=경제계획) 곧 구원계획을 마련하시고 이를 먼저 바울에게 알게 하시고 해서 이 일을 위하여 그를 이방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3-4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란 이미 1장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1장 9-10절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가운데 보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시고 만물을 그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입니다.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2장 11절 이하인데, 곧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원래 육체로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의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이던 이방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등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이들이 한 새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과도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6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5-6절은 3-4절의 부연(敷衍) 설명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 신약시대에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증거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나타났지만,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입니다.

곧,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후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후사(後嗣)”란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란 뜻입니다. 이방인들이 이러한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데 이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지체가 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유대인은 유대인이요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물과 기름같이 서로 섞임이 없고 서로 사귐이 없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이 함께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교회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되었습니다.
해서,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여기서 약속이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입니다.
 3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란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닙니다. 알려져야 할 비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비밀이 무엇인지 알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른 주위사람들에게도 알리심으로 그들도 우리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Sunday, February 7, 2016

“교회의 하나됨” (에베소서 2:19-22)


“교회의 하나됨” (에베소서 2:19-22)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聖殿)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聖靈)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處所)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1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건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 나름대로의 교회에 대한 기대감 혹은 편견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교회가 이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인하여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란 사실은 제쳐놓고 ‘교회가 이러하기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저러하기에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싫다’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들 중에, ‘예수구원’ ‘천국구원’ 외치며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과 같이 취급되기가 싫어서; 말많은 전도사가 싫어서; 교회가 술, 담배 이해 못해서; 교회는 팔자 편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서; 교인 아닌 사람은 사탄으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문화를 사탄으로 매도하기 때문에; 타종교, 타 종파에 너무 배타적이어서; 각종 제약이 싫어서; 양보 모르는 압력집단이기 때문에; 개척교회 간에 지나친 과잉경쟁을 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교회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는 편견과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사람들의 교회 거부에 일리 있는 부분이 있기에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 눈에 우리 교회와 나는 어떻게 비칠까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혹은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한 사람의 ‘교회 가기 싫은 이유들’입니다: 기업화된 교회 위화감 싫어서; 빈민구제 외면하는 교회 이해 안 돼;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 메카니즘;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 볼 수 없어서; 양보없는 일등주의 세속성; 목사수준이 낮다, 엉터리, 사기꾼 목사들 때문에; 교회 종파분쟁 이해 못해; 이중인격자 많아 싫어; 헌금 따라 사람대접 달라서; 마음 터놓을 깊은 친구 없다; 예수님은 좋으나 교회사람들의 각종 행태가 싫고, 교회가 지능적으로 돈 밝히는 것이 싫어서; 아전인수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싫어서; 신분차별 때문에 벽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중에 어떤 것은 자신의 결점은 보지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또 상당부분은 교회의 잘못된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혹 이러한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면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성인 간디도 성경은 열심히 읽고 예수님은 그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교인되기는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영국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교인이라 하면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그들뿐 아니라 우리가운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자청하셨는데, 교회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장소가 되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헌물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한다고 스스로 여겨서 교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목사님이 부자를 특별 대우하는 곳이 교회라면 이도 또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화목과 일치를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교회가 반목과 대결의 장소이라면 이 또한 커다란 문제입니다.

복음서에 교회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머무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자기과시의 장소도 아니요, 누가 세상지식이건 성경지식이건 더 많은가 견주는 장소도 아니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귀고 놀 궁리를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또 한인교회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인끼리 모여서 생활정보를 교환하고 대화함으로서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장소도 아닙니다. 이러한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경배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획하고 힘쓰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로 표현된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육체로 이방인이었으며, 무할례당이었으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요,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화목의 제물로 죽으신 까닭에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의 막힌 담이 헐어지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화목의 제사가 있으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외인이 아니요 손도 아니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함께 동일한 천국시민이 되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속(household)"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머리되시는 하나님 가정의 식구란 뜻입니다. 1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자녀들)이 되게 하셨다”는 표현과 같은 뜻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우리였는데 이제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호적에 우리를 양자로 편입시키시어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하는 반석(=터)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터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터는 또한 영원한 반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11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터에 비유할 때, 예수님은 또한 모퉁이 돌이 되시는데 이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석으로서 벽과 벽을 연결하는 건물의 중심이며 또한 이 모퉁이 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겨넣어 건물의 소유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라고 하는 건물의 기초석이요, 중심이요, 소유주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는 이미 시편 118장 22-23절에서 예언된 바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28장 1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구절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갖고 오시기 800여년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돌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돌을 믿는 자는 죽지 않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그 당시 사람들이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을 기초돌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우리는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4-5절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건물의 모퉁이 돌, 기초돌, 산 돌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건물의 굳건한 터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건물의 벽과 지붕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벽과 지붕의 자료들입니다.
벽과 지붕을 구성하는 자료들이 변변치 못할 때, 그 건물의 벽과 지붕은 웬만한 비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게 되어 세상사람들의 비난과 조롱꺼리가 될 것입니다.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삼풍백화점이, 성산대교가 붕궤될 때 사람들은 건축자를 욕하고 자료를 변변치 못한 것을 썼다고 비난했습니다.
교회의 벽과 지붕을 구성하고있는 우리의 변변치 못함으로 교회건물에 구멍이 나고 깨어지면 우리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건축자되시는 주님에게까지 화가 돌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서 건물의 벽과 지붕인 우리에 대해서 표현할 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것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건물의 벽과 지붕을 구성하는 자료일 때, 우리는 쉽게 불타고 허물어져 내리는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자료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이 단단한 자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로 인하여서 주님을 욕보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건물인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하고 화목하여서 하나의 성전이 되어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건물이나 성전은 성전이라고 함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말함입니다. 믿는 사람의 연합이 건물이며 믿는 사람의 연합인 건물이 연락하여 커다란 한 성전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연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영광(榮光)이 나타나는 성전일뿐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우리의 건물은 현재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일생동안에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가 어떤 모양의 어떤 자료를 사용한 건물을 지었느냐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력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15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 교회가 주위사람들에게 “교회에 가기를 즐겨하는 이유”를 제공할 수 있는 교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님들은 모두 교회에 모여 찬송하고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주위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가 무언의 행동으로 가르쳐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갈리우고 반목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고, 기쁨이 넘치고, 서로 연락하여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하나됨” (에베소서 2:11-18)


                       “성도들의 하나됨” (에베소서 2:11-18)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어떤 이상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허구한 날 싸우는 데 싸울 때마다 끝장을 볼 듯이 싸웁니다. 서로 짐을 싸기도 여러 번 하면서도 그러나 갈라서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날이 밝으면 싸우고, 또 날이 어두워지면 싸웁니다. 심할 때는 치고 받고 할퀴며 싸웁니다.
여자가 다니는 교회 사모님을 찾아가서 멍든 몸을 보이며 호소합니다: “사모님, 제가 이래도 그 원수같은 인간하고 살아야 하나요. 아유, 분하고 치가 떨려서 더는 못살아요.” 하며, 눈물을 흘리며 코를 훌쩍거리며 웁니다. 사모님이 그를 동생 대하듯 측은한 마음으로 달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참고 살아야지.”

목사님이 그 남편을 만나봅니다.
그 남편이 자기 아내의 모자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목사님, 말도 마세요. 이제까지 창피해서 말씀드릴 수도 없었는데...  저도 그 사람 얘기를 하자면 울화통부터 납니다. 연애할 때는 전혀 몰랐어요. 얌전하고 말수도 적어서 결혼하여 살면 제 말을 잘 듣고 제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라올 줄 알았죠.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결혼하자마자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한 마디로 자기 주장이 너무 쎄요. 자기 분수는 모르고 값비싼 화장품 아니면 안쓰죠,  명품이 아닌 옷이나 핸드빽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리고, 여편네가 얼마나 게을러터진지 집안도 안 치우죠, 아침에 9시 이전에 일어나는 법이 없어요. 목사님은 이런 여자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 아예 갈라서야 겠어요. 동네에서는 이미 소문이 나서 그렇지 않아도 더는 못살 판이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까지 아시게 되었으니 이번 판에 이혼해야 되겠어요.” 목사님도 “참고 살아가 보라”는 말말고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후에 그 부부는 이 일을 갖고 또 싸웁니다. “그래, 이제 사생결단을 내자. 이제 더 이상 너같은 인간하고는 못살아.” 목사님이 한 이틀을 기도한 후에 사흘 째 되던 날 이들 집을 찾아갑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두 사람이 다 집에 있습니다. 얼굴의 표정으로 보아서 그 날도 한바탕 난리를 치렀음을 짐작케 합니다. 여자가 말을 꺼냅니다. “목사님, 마침 잘 오셨어요. 이제 도저히 저 인간하고는 못살겠어요. 사모님이 참고 살아보라고 하셔서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이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
남자도 질세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한 마디 합니다. “사돈 남 말하네. 누가 할 소리를 하나. 목사님, 우리 헤어지는데 말릴 생각은 아예 마세요. 저는 이미 결심이 확고해요. 이제는 정말 안되겠어요. 이 여편네가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제 욕을 하고 다니는 거 있죠! 정말 창피해서 이제 직장에도 얼굴을 들고 나갈 수가 없어요.”
목사님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두 분 모두 잠깐 앉아봐요. 실은 내가 보기에도 두 분은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두 사람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목사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까닭이 싸움을 말리고 계속 잘 참고 살라는 권면을 하시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않던 말로 시작하십니다.
“두 분이 잘 싸운다고 이미 교회에서 알 사람은 다 알고,  해서 교회 내에서도 덕이 안되고 차라리 이 참에 아예 갈라서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을 것 같군요.” 그리곤 한 수 더 떠서, “법정에서 증인이 필요하다면 제가 증인을 서줄 수도 있어요. 이 두 사람은 도무지 같지 살 수 없는 부부라고.”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목사님의 말씀이 지나치고 심히 부당하다는 표정입니다.
여자가 말을 꺼냅니다: “아니, 목사님, 어쩌면 그러실 수 있으세요... 헤어진다고 하면 말리셔야지. 아니 이러시는게 교인을 사랑하신다는 목사님으로서 할 말씀이세요?”
남자도 옆에서 거둡니다. “저도 이제까지 목사님을 그런 분으로 보지 않았는데, 참 이상한 분이군요. 제가 성경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도 이혼을 금하고 있는데 ...”
목사님은 묵묵히 그들의 항변을 듣고 있다가 말없이 그들의 집을 나섭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빙긋이 미소를 짓습니다. 그 후로 그 부부의 싸움은 현저히 줄어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며 잘못을 고쳐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흐뭇한 소문이 들립니다.

 2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기에 육체로 이방인이었으며, 해서 할례자이던 이스라엘로부터 무할례당이라고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절: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방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할례받지 못한 것뿐아니라 그외에 다섯가지가 더 있습니다.
둘째로, 혈통으로는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중 잃은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축복이 없는 상태를 의도적으로 “그리스도 밖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합니까?
에베소서의 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과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시고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1:4),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1:7),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통일되게 하시고 (1: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고 (1:12),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1:13),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시고 (1: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그 뿐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지역적으로도 “이스라엘 나라 밖에 거하던”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다스리시는 대상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습니다.

넷째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자이니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에서 제외됨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세가지--땅과 민족과 복--의 약속을 주시고,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시므로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하면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부르지도 아니하던 자들이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하고는 무관하던 자들입니다.

다섯째로,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겉으로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고는 있었지만 기실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자이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이별할 날이 오면, 그의 생은 그는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그 이후에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못하는 소마없고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여섯째로,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무할례당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니, 당연히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도 없이 살 소망과 목적없이 살아가던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사랑함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핸섬하고, 흠이 없이 온전하시고, 모든 이들로부터 흠모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신 분인데, 몸과 마음이 비뚤어지고 뒤틀리며 괴퍅하고 바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짝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못되어서 그와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나를 멀리 떠나 괴롭게 마소서” 하는데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게로 와다오” 하고 때로는 애원하시며 때로는 오래참으심으로 죄와 허물로 추하고 몰골이 사나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우리와 같은 모습을 입기로 작정하시고 그 자신의 아름답고 귀한 옷을 벗어버리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표현하는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이사야 55:2) 육신을 입으시고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참으로 기이(奇異)한 사랑입니다. 못생기고 부족한 사람이 잘 생기고 모든 것을 갖춘 상대를 죽자 사자 따라 다닌 사랑이라면 혹 이해를 할 것같은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정 반대의 경우입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닥아오시고, 우리 가운데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나?” 의심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멀리 있던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참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로 조심조심 가까이 닥아갑니다.

미녀와 야수(The Beauty and the Beast)에서, 미녀의 연민과 사랑의 눈물이 야수의 죽어가는 몸에 떨어질 때 그 야수를 동여매고있던 마술이 풀리며 본래의 미남 왕자의 모습으로 변하듯이, 지고하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과 피가 야수보다도 더 괴물스럽고 마음까지 삐뚤어진 소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던 나의 몸을 적실 때 나는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그 십자가에 관심을 갖고 닥아갈 때 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의 피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추하고 뒤틀린 모양이 되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몸과 마음에 떨어질 때 나는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이 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나 알게되고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나 같은 추하고 영혼의 병이 든 죄인을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멀어지고자 했는데 이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나도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14-15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의 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으셨습니다. 수평적 화목을 이루십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간의 질시, 율법을 맡은 자와 율법 밖에 있는 자의 갈등, 원래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물어내리셨습니다.

해서, 15절의 표현대로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한 새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 밖에 머무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적인 의미로 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새사람”이라고 함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연합체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상전과 하인, 배운 자와 못배운 자,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분이 없이 한 새사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성도간에 서로 사랑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배운 것이 없어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저 사람은 천하여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저 사람은 못생겨서 내가 사랑할 수 없다”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별하는 사람은 아직도 나같이 삐뚤어지고 추했던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아무리 오랜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한 부부라 할지라도, 헤어질 사람처럼 그렇게 심하게 다툴 때가 있지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을 이어온 끈끈한 사랑을 느끼기에 다시 서로를 감싸주고 어루만져주게 됩니다.
그들은 언제 싸운 적이 있었냐는듯이 다른 사람들 눈에 잉꼬 한쌍의 흐뭇한 아름다움을 선사해줍니다.

교인간에 갈등(葛藤)과 반목(反目)과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성격과 환경 가운데 성장하고 생활하는데 이러한 일이 없다면 오히려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지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과 발이 다르듯이 우리는 그렇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갈등과 반목과 다툼으로 나뉘어지고 영영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화합하고 우애하는 것이 한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인들이 구성하는 가족으로서의 화합이요 일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전혀 사랑받을 것이 없고 흠과 결점 투성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해 주어야 합니다.

16절: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수평적 화목을 이루어 우리로 “그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그 다음에는 “한 새사람이 된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실 뿐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간에 화목을 이루는 다리가 되고자 함이십니다.
Simon과 Garfunkel이 부른 노래의 가사,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에서와같이 인간으로 불화의 강을 건너가게하는 다리가 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남으로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불화(不和)의 강이 흐르고있어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육체로 다리가 되시고 나로 그리스도의 육체의 다리를 밟고 불화의 강을 건너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17-18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신을 좇으며 우상을 섬기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한 외침에 철저히 등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오래참으시는 중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형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시며 인간 사랑을 확증하시며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2,000년 전에 육신의 몸으로 인간에게 오신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우리에게 닥아오십니다. 해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도록 하십니다.

3
예수님께서 죽으신 형틀의 모양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두 통나무로 된 십자가입니다.
가로와 세로의 통나무 모두 다리를 상징하는데, 가로의 다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는 화목의 다리요, 세로는 나와 다른 사람이 화목하여 한 새사람이 된 다음에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시는 화목의 다리입니다.
성도의 하나됨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됨이 없습니다.
성도의 잘못을 용서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계명을 요약하면 두 계명 안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형제-자매-이웃으로 표현되는 성도간의 사랑인데, 두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첫째 계명을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같이 부족하고 추했던 죄인을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이 얼마나 큰지 경험한 우리는 성도간에 화목을 이루는 사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