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9-21)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9-21)
          
 
 12: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의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1
목회자나 성도나 각자의 입장에서 원함이 다릅니다. 그 원함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서로 맞아떨어지거나 조화하는 교회는 성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다툼과 분냄과 수군수군함으로 내적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곧 다른 사람이 자기와 자기 하는 일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에 약함이 때로는 그 사람으로 자고(自高)하여지게 하고, 또 때로는 믿음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은 삶 중에 나타나져야 하는 것이지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 다른 사람의 뒤에서 그 사람을 비방하고 수군수군하는 것 등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더라도, 그리고 그것들을 금함의 유익이 어떠한 것인지도 잘 알면서, 여전히 다툼과 시기가 있고 비방과 중상과 수군수군함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교회 새벽기도에 나가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이 바르지 못함을 눈물을 뿌리며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주여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을 도와주소서. 저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하소서.” 그렇게 한참 기도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여집니다. 교회문을 나서서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집으로 향합니다. 얼마쯤 오니 어느 초가집 처마 끝에 잘 익은 호박들이 열려 있는데 먹음직스럽습니다. 주위를 살피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지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른 하나를 따가지고는 성경-찬송가가 들어있는 큼직한 가방에 감추듯이 집어넣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차마 양심이 저려서 바로 찬송을 부르지는 못하고, 얼마쯤 가서 다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2
1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10-12장에서 자칭 “지극히 큰 사도들”에 관하여 말하고 자기의 육체적 조건들과 경험한 수고와 환난을 말하고 또 오래 전에 체험한 셋째 하늘에 관한 계시를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그로부터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자기의 가르침의 대가인 요(料)를 다른 교회에서는 받으면서 왜 고린도 교회에는 요구하지 않았는지(고후 11:7-9, 12:14-16; 고전 9:12, 15 참고), 또한 그러하면서도 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서는 모금하라고 하고 그 모금한 연보를 어떻게 다루었는지(고후 8-9장, 12:16-18)에 관하여 설명함은 그가 저지른 잘못된 일에 대하여 옹색하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귀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바른 말을 하여도 바로 듣지 못하고 삐뚜름하게 듣습니다. 삐뚫어진 귀로 듣고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해석하여 판단을 내리고는, 또 다른 사람에게 공교하게 잘못 전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함께 잘못 판단을 내리게 만듭니다(롬 1:32 참고).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바울에 대하여 한 일이 이와 같으며 그들을 따른 고린도 교인들이 내린 판단이 이와 같은데, 요즘도 교회 안에서 교묘히 남의 말을 하거나 옮기는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육체적 모양으로 어리석은 자랑을 한 부분도 있지만 그 모든 말들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바른 것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랑을 한 것과 너희가 변명이라고 여기는 연보의 착복 혐의에 대한 해명까지 나 바울의 모든 말들은 너희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희와 너희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궤계로 인하여 교회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것에서 돌이켜서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른 교회와 교인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20절에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근수근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상대방에 대하여 원하는 바가 다를 수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이민 한인교회에 있어서는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질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는 그 성도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 교육수준이 높든 낮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모이고 찬송하고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외로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평균의 성도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전달함으로 자기가 행하고 있지 못한 사안에 대하여 지적받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사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자기의 말(세상적인 이야기라도)을 청종해주고 자기가 내는 의견대로 목사가 따라서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모습을 고치기보다는, 그것을 목회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괜찮은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민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목회자와 교인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생각하기를 원치 아니하며, 목회자는 교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말을 들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성도를 위한 종(servant)' 정도로 (사실은 ’하나님의 종‘인데)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입장이 원만히 절충되거나 이해되지 못할 때 목회자와 성도의 갈등이 심화(深化)됩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역할이나 입장이 상대방에게 서로 다릅니다. 바울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라고 함은 두 번째 방문에서 그가 경험한 아픔과 후회감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적인 문제에 관하여 권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지만 그의 권면은 받아들여지는 대신에 심한 반대와 사도로서 모멸감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한 만족감으로 돌아오는 대신에 근심함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고후 2:1).
이제 그들을 세 번째로 방문을 해야 할 것인데 그 방문에 앞서서 이와 같이 편지함에도 바울의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자의 비방에 여전히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연보를 할 필요성을 그렇게 장황하게 역설했는데 바울의 말이 무시당한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능력과 권위는 교인들이 그를 얼마큼 인정하고 그의 말(혹은 그의 입술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인들을 통하여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보기를 원함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뒤에서 바울을 욕하고 수군수군하지만 바울은 항상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의 도리에 맞는 삶을 살지 못함도, 음행을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이 세상 일에 탐닉하는 것도, 얼마간의 실수를 하는 것도 그저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사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쳐서 주님께 복종케 하는 삶을 사는(고전 9:27) 바울의 입장으로는 그것은 사랑의 바른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는 그들을 안락하게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에 그들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직설적인 바울에게는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곁길로 간 것을 곁 길로 갔다고 지적하여주는 것이 사랑의 바른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고린도 교인들의 바른 결단을 촉구하고,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歸正)하리라”고 그의 단호함을 보이고, 갈라디아서 4장 20절에서는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결연(決然)한 마음을 표시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2절에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가면 다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아주 강한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지 자기의 화를 못이기는 징계를 가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모습 그대로를 드러냄으로써 바울 자신이 원치 않는 나무람으로 그들을 대하고, 출교(黜敎)를 명해야 하는(고전 5:4-5 참조) 사태가 발생할까봐 두렵고 염려하는 마음이 듭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교인들 중에서 여전히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다툼(quarreling)"은 각자의 생각이나 주장이 너무 세고 이를 굽히지 아니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에서는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시기(jealousy)"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고 헐뜯게 됩니다.
"분냄(anger)"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노함(wrath)과는 다른 것으로서 자기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서 터져나오는 무익한 화를 말합니다.
"당짓는 것(selfishness)"은 영어 단어 ‘selfishness'가 나타내듯이 이기적인 마음의 소산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하는 대신에 자기의 주장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중상(slander)"은 상대방의 한 말과 행동이 아닌 사실무근(事實無根)한 것을 갖고 사실인양 상대방을 모함하거나 넘어뜨리는 일입니다.
 
“수군수군하는 것(gossip)"은 어떤 사람의 뒤에서나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거나 왜곡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거만함(conceit)”은 세상에 속한 쓸 데 없는 것을 과시하거나 뽐내는 일입니다.
“어지러운 것(disorder)"은 교회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멋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며 그로 인해 교회를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이 여덟 가지는 고린도 교회에만 존재하던 문제꺼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많은 교회들 안에 내재해 있는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고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성도는 입으로는 아무리 교회를 염려하는 것 같으나 그들의 행함은 교회를 세우고 유익을 가져오기보다는 교회를 무너지게 하고 해를 끼치게 됩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바가 이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서 바울의 글을 통하여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경계를 주십니다.

21절에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할 때 그의 두려워할 것들에 대하여 계속 말씀합니다.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낮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노오(ταπεινόω)’는 ‘낮추다, 겸손케하다, 수치를 당하다, 모욕감을 느끼다(humble, make ashamed, humiliate)'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중에서도 사도의 권위가 서있고 사도로서의 권면이 받아들여져야 할 것인데, 바울이 2차 방문할 때 그가 당했던 모멸감과 수치를 다시 당하게 될까봐 염려함입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도인 바울에게 뿐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는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할 수 없게 되며, 고린도 교인들은 이제 다시 그들의 잘못에서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바른 권면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다보면, 그의 권면이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의 권면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목사의 권고와 조언을 듣던 사람이 가슴을 닫고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할 때, 이 목회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교인을 향하여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도 그의 말은 다만 췌사(贅辭)--‘쓸 데 없는 소리’만 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또한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의 또 다른 편지에서도 강력하게 권고한 것이 있는데, 즉 고린도 교회 내에서 얼마간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더러움(ἀκαθαρσία: impurity)과 음란함(πορνεία: immorality)과 호색함(ἀσέλγεια: licentiousness)을 회개하고 내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르고 신령한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여전히 이와 같은 죄악상을 발견하게 될까봐 바울은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하거나 넘어뜨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이제라도 그들이 잘못된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원함입니다.

3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세 번째로 대면할 시간이 점점 다가옴에 그 마음에 기대감이 있고 설렘이 있습니다. 그들의 바른 모습을 보기를 원하기에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하고 나무람의 말도 하고, 눈물을 뿌리며 호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그 자신을 인정해 달라거나 변명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고 참으로 칭찬이 많은 성도로 만들기 위함에서 한 것입니다.
사도와 교인들이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원치 않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기쁨의 만남이 되어야 할 것이 상처와 고통과 부끄러움의 만남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잠시 잔간 후이면 두 번째로 이 땅을 방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되 근심함과 두려워함이 아니라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모습은 벗어버리고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구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4-18)


“바울이 구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4-18)
           
 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
이집트를 여행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거대한 스핑크스(Sphinx)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사람의 여자얼굴과 사자의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 스핑크스라고 하는 괴물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는 수수께끼를 내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면 무사히 보내주지만 풀지 못하면 죽여 버립니다. 수수께끼를 푼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 괴물과의 만남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오이디푸스(Oedipus, 테바이 왕 라이오스의 아들)라고 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젊은이는 스핑크스의 이야기를 듣고도 겁을 내지 않고 오히려 대담하게 그 괴물과 대결하러 찾아갑니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프스에게 묻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슨 동물이냐?“
오이디푸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사람이지. 갓난아기 때는 두 손 두 무릎으로 기니 네 발이요, 자라면 서서 다니니 두 발이요,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 세 발이지.”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명쾌한 대답에 굴욕을 느낀 나머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서 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늙지 않고 영원히 강건한 기운을 유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육신이 늙고 정녕 죽는 징계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어릴 때는 두 손 두 무릎으로 기고, 장성한 후에는 두 발로 걷고, 나이 들어서는 두 발 이외에 지팡이(혹은 자녀)에 의지하여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장성하여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전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양육합니다. 장성하여 경제적 능력이 생기게 되면 자기의 아이를 양육하고 또 연로하신 부모를 부양합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면 이 제는 그가 양육했던 장성해진 자식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기본 가정 위에 거시경제(macroeconomy)의 현상을 예측하는 모델을 경제학에서는 OLG(Overlapping Generation) 모델(Model)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밖에서 살게 된 인간에게 지워주신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장성하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할 때 자식의 부양을 받아야 마땅한 연로한 부모가 자식을 계속 돕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마련하여 주신 인륜의 법칙에서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요즘은 (경제 능력이 있는) 장성한 자식이 연로하신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따라서 부모도 자식 신세를 지지 않는 방편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는 인륜의 법칙에서는 다소 벗어난 경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찬송(=찬미)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엡 1:3, 6, 12, 14 참고).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세상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세상축복이라는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도에 있어서는 세상축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세상 복을 구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장성하여져서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와 긍휼을 찬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주위를 돌아보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쁨으로 나누어주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연륜이 오래된 교회요 오래 믿음생활을 한 성도인데도 여전히 젖을 빠는데서 벗어나지 못함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성도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요 신앙생활의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를 보는 목회자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장 12-14절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믿음의 연조가 짧아서 아직 어린아이인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고 감당할 힘과 여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복만을 생각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생활을 한지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는데 여전히 교회에 출석하되 ‘세상 복만을 주시옵소서’ 하고 그 외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에는 무심한 사람은 자라지 않는 지진아(遲進兒)적인 교회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미의 삶이 세상 교육을 받지 못하여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과 심령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을 때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하면, 2,00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중적인 교회가 그래왔듯이 자라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은사 사모함이 있었지만 그 은사 사모함도 하나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함이기보다는 자기 자랑과 세상 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5년이 지나도 자라나지 않는 지진아적인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젖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지만, 이제 바른 목회자를 도울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온전히 감당하여야 마땅할 것인데 영적으로 여전히 어린아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2
14절에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 지방을 방문한 것은 사도행전 18장에 보는 바대로, 그의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1년 6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면서 목회하였습니다.
두 번째 방문한 것은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는 대로 고린도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방문한 것인데 그의 권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비난과 불의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세 번째로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비난하고 중상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는 고린도 교회에 가야 할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함이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마무리짓기 위함입니다.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생활비를 요청할 권이 없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12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함으로 그가 고린도 교회에 왜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는지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장성한 교회라고 한다면, 바울이 생활비를 요청하기 이전에 그의 육신의 쓸 것을 알아서 마련하여 주었을 것이며 바울은 이를 기쁨으로 받았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과 같은 시기인 그의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행전 16장)는 바울의 쓸 것을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조달하여 주었는데, 이때 바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빌립보서 4장 10-20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구하는 것이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전히 증거되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함이 바울에게 있었기에 다소 생활의 곤란함이 있더라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늘 바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그들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현재는 (거짓 교사들과 내적인 문제로 인하여) 다소 거칠은 환경 가운데 고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아이에, 자신을 부모에 비유하였습니다. 재물을 요구하지 않음을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한다’는 세상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장성하여야 할 것이며 그의 영적 부모에게 재물로 봉양함이 마땅히 할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못함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리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영적 부모로서 바울의 심중에는 자신을 위한 생활비 문제는 아무래도 좋고 다만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되어지기만을 갈구합니다.

15절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장성함에 이를 수만 있다면 나의 없는 재물을 다 내어놓고 또 자신의 시간과 삶 전체를 다 드려서까지 이제까지 그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쏟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할 각오가 되어있는 바울입니다.
“허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파나오’(δαπανάω)는 온전히 부담하다, 소비하다(spend)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재물과 자신을 허비하면서까지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영혼을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의 상급을 쌓아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허비함은 그들이 이 세상을 살 때에 재물을 많이 얻어 부유해지고,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출세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교회에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이 오직 성도들의 세상 축복과 성공을 빌어주기 위한 것인 양 성도들과 목회자가 생각할 때에 그 교회에 속한 목회자와 성도들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랑은 참으로 큰 데, ‘너희들은 어찌 나 바울을 덜 사랑하려고 하느냐?’고 안타까운 반문을 해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사랑을 요청하는 일조차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을 사랑함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당부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에 열심을 보여달라는 의도입니다.

16-17절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고 또 반문합니다.
바울을 중상하는 거짓 교사들은 끊임없이 반대의 목청을 돋굽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자기의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기실은 생활비보다도 더 큰돈을 그가 챙긴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겉으로는 진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간교하고 음흉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성도를 빙자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방함은, 8-9장에서도 강조되어 있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도 서둘러 모금하는 일을 마무리짓되 할 수만 있으면 풍성한 연보를 드림으로 그리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의 말을 타겟(target)으로 삼은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에게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금의 문제를 독려하고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는 것도 못마땅합니다. 바울이 모금한 돈을 직접 다루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의 수중으로 다 떨어질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바울이 설령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모금한 돈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교회의 것들을 모아서 (그 당시에는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어떤 교회가 얼마를 모금하였는지 확인하기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부만 전달하고 상당한 부분은 자신이 착복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주장함은 그들이 차지할 재물이 다른 용도로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불의한 자의 간계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비방의 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은 모금의 순정과 공정을 위하여 이 모금한 돈을 취급하는 사람을 선정함에 엄격함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 그가 파송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잘못 다루거나 유용하는 일이 없음을 확신합니다.

18절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연속적으로 반문합니다.
바울의 사신으로 디도가 두 차례(고후 2:13, 8:16)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디도의 정직과 청렴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3-15절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도 디도가 그곳에 처음 이르렀을 때 그의 인격에 감동하여 그를 영접하고 순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형제(고린도후서 8장 18절과 22절의 기록에 의하면 디도이외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형제가 두 사람인데 본 절에는 한 사람으로 되어 있음)도 재물의 문제에서 깨끗하고 자유로운 사람이기에 바울은 결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한 돈이 잘못 사용되어질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디도, 그리고 바울과 함께 하는 일행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는 “동일한 성령으로”(τῷ αὐτῷ πνεύματι) 하기에 전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강조입니다.
또한 “동일한 보조”(τοίς αὐτοίς ἴχνεσιν)라고 함은 바울의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뜻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순전하게 감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정경기(boat race)를 할 때 선수들이 보트 좌우의 노를 빨리 젓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들이 좌우의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배가 삐뚜로 나가거나 돌게 됩니다. 따라서, 선수들 중 한 사람은 노를 젓는 대신에 배의 맨 앞쪽(=이물)에 앉아서 선수들이 동일한 보조로 노를 젓도록 독려합니다. 동일한 보조로 협력하여 노를 열심히 저을 때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교회의 일도 동일한 보조로 서로 협력할 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3
바울의 마음에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장성하기를 원함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고 간구하고 있음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줄 것을 주지시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미성숙이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전력을 다 하기 보다는 세상의 일들로 교회 안에 비난과 중상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성숙한 교회와 성도로서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며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협력하며 잘 해 나가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회와 교인들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라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께 세상 복 달라고만 매어 달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돌려야 할 것이며, 우리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신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감당함에도 각자 다른 주장과 생각으로 인한 불일치와 충돌로써 행할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로서 동일한 성령과 동일한 보조로서 아름답게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 12:11-13)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 12:11-13)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1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도경(道經)」 제 24장):
   발뒤꿈치를 들고 서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企者不立)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다 (跨者不行)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自見者不明)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고 (自是者不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이 없고 (自伐者無功)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自矜者不長)
   도(道)의 관점에서 이러한 것들은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만물이 혹 그것들을 싫어하는 바니, (物或惡之)
   그러므로 도(道)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것들에 처하지 않는다. (故有道者不處)

남보다 커보이고 싶고, 더 잘보이고 싶고, 나아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어서 발뒤꿈치를 드는 사람은 잠깐동안은 그렇게 보이도록 서 있을 수 있지만 오랫동안은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동안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 신앙이 좋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더욱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이런 사람은 인정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큰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큰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그 걸음을 멈춰버립니다. 계단을 두 세 계단 한꺼번에 뛰어오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디게 보이더라도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고 자기의 세상 자랑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드러나집니다.

저는 40세가 되어서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평신도(3년의 전도사)의 삶을 살았기에 안수를 받은 초기에는 제가 목사란 느낌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제가 목사임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목사전용 검은 셔츠(Clergy shirt)를 착용하곤 했습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즐겨 입기도 했지만, 그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목사로서의 몸가짐을 조심하고자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크리스천의 표시가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보증으로 보여 주십니다(고후 1:22, 고후 5:5; 엡 1:14, 엡 4:30). 성령의 역사가 어떤 사람이 과연 크리스천인지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크리스천인가?’ ‘나에게 과연 크리스천의 표시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 방법이 있는데, 우스개 소리같지만, 용하고 영험(靈驗)이 있다는, 신내림이 확실하다는 무당의 굿판에 가보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내가 거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잡신(雜神)을 부리는 무당의 굿이 잘 되지 않는다면, 이는 나에게 크리스천의 표시--곧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과 영의 세계는 통하는 법인데,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무당의 잡신이 옴작달삭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그에게 여러 가지 희한한 기사(奇事)들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날 정도의 대단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행전 19:12).  그러자, 떠돌이 유대인 무당(=마술사)들까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능력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도 바울이 행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逐邪)을 행하고자 합니다(행전 19:13). 스게와(Sceva)라고 하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이 바울의 능력이 부러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는데 믿음이 없이 행하는 고로 악귀의 힘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가지고 놉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전 19:15)고 하며 악귀들린 사람의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억제할 때 그들은 상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표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이런 일이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에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믿는 마음으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할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의 표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자 하지 않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표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신도로서 학원목회를 하거나 교회의 직분자의 생활을 할 때에는 저에게 말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거치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말하는 일에서나 행하는 일에서 자제하고 조심을 하게 됩니다. 이는 목회자의 말과 행동은 쉽게 그리고 왜곡(歪曲)되어서 비난과 비판의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그의 책, 「새들백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n Church)」에서 말한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파도)이 우리 교회와 교우님들에게 밀려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도가 마침내 여러분 앞에 이르렀을 때 파도타기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여러분이 은사로나 열매로든지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부담스럽던 교회생활이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의 교회생활이 되고, 전에는 여러분의 삶의 한 변두리에만 머무시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11절에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함은 그가 육신의 것--그의 외적 조건들과 그가 수고한 일들을 부득불 나열하였음을 가리킵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도요 사람인 것을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와 같이 말함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렇게 한 것은 너희 고린도 교인들의 연고란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고 허황된 말과 가르침을 좇지만 않았더면 굳이 나의 외적 조건들과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고난을 열거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희가 거짓 교사들이 훌륭하니 그들을 좇는다고 말하므로 내가 나의 어리석은 자랑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의 조건과 행함으로 그들을 칭찬하니,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더욱 더 커다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하심과 선하심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교회를 선동하고 어지럽히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들 자칭 “지극히 큰 사도들”(고후 11:5)과 비교하여서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12절에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자칭 “지극히 큰 사도”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이 뛰어난 웅변술과 사람의 철학과 논리로 교회를 선동하고 미혹하고 자극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바울에게는 그들과 구별되는 진정한 사도의 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참음(all patience)과 표적(signs)과 기사(wonders)와 능력(mighty woks)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행하는 이 사도의 표들--모든 참음, 표적, 기사와 능력--은 사람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마술을 행하는 사람과 비슷한 능력과 기사인 것 같지만, 다른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과 모든 참음 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하여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크고 작은 표가 나타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에 더하여서 그리스도의 제자--곧,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표시는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보여준 확실한 사랑의 증거가 모든 참음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선동과 미혹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바울에게서 돌아서서 그를 비난하고 중상하는 일에 가세하였지만,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그들을 향한 아픔의 나무람도 사랑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도의 표시인 것입니다.

13절에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고자 하면 그가 이 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저 말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비난꺼리를 삼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하고 미혹하여 바울을 비난하고 중상한 거짓 교사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 운동을 벌리는 일을 갖고는 그가 돈을 거두어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한다고 비난-선동하던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생활비를 위하여서는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지고는, 바울이 그의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마게도냐 교회들은 더 사랑하고 생활비 요구를 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는 덜 사랑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고후 11:7-9 참고).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형편이 다른 교회들과 달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생활비를 받지 아니하고 재정적으로 다른 폐를 끼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서 너희들을 다른 교회--바울은 적극적으로 도운 빌립보 교회--교인들보다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생활이 넉넉하여서 부모에게 쓸 돈을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자식도 있고 빈궁하여서 오히려 연로하신 부모의 도움을 여전히 받기만 하는 자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넉넉한 용돈을 주는 자식이나 아직도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자식이나 다 한결같이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더 비근(卑近)한 예로, 여러 자식들 중에 형편이 못한 자식은 부모의 쓸 것을 공급하여 주는데 형편이 넉넉한 자식은 무심하게 부모의 쓸 것을 전혀 생각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부모를 생각하여 주고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는 자식이 더욱 자랑스럽고 대견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돕지 않는 자식에 대하여 더욱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에 느끼는 사랑이 한결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문제가 많기에 더욱 신경이 쓰이고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그를 욕하고 중상하지만, 그가 가르친 영적인 자녀들이기에 더욱 사랑을 쏟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함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공평의 법칙대로라면, 그에게 잘 대해 준 대상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문제 삼고, 그에게 생활비를 공급하기에 인색하여 아예 생활비를 도와주지 않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다른 교회들과 성도들 사랑에 못지 않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양대로는 참으로 공평치 못한 일이지만, 이러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너희들을 향한 공평치 못하고 지나친 사랑을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갖고 있는 모든 참음이요 사랑이요, 진정한 사도됨의 표시입니다.

3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표가 여러분에게 나타나 있습니까? 일시적으로, 인위적으로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성경을 읽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얼마 지나면 싫증을 느끼고 그만두는 것은 확실한 크리스천의 표시가 아닙니다. 남이 나의 하는 일을 알아주고 칭찬하면 만족해 하지만,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비난꺼리가 되면 쉽게 실망을 하고 집어치워 버리는 것도 뚜렷한 크리스천의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기쁨으로 감당하고, 신실함과 한결같음으로 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건 비난을 하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분쟁함으로가 아니라 화평함으로, 미워함으로가 아니라 사랑함으로 감당해 나갈 때, 우리에게는 크리스천의 표시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약함과 미련함이 많은 자연인으로서의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마가 16:17)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크고 작고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나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