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의 임함” (살후 2:9-12)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과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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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다가 그의 서투른 솜씨로 인하여 들키게 되고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해서, 그는 한밤중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갑니다. 도둑을 추격하던 경찰이 한참을 쫓다가 갈림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경찰이 왔다면 한 길씩 맡아서 쫓아가면 될텐데 혼자라서 한 길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도둑이 오른 쪽과 왼 쪽 중 어느 쪽을 택하여 도망갔겠습니까?
경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왼쪽으로 달려갑니다. 경찰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목사님이 설교할 때 오른 쪽은 의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왼쪽은 불의의 길이요 멸망의 길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가 도둑일진데 불의의 길, 멸망의 길로 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그들이 구원의 복음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은 이 길로 가면 구원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서도 일부러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멸망으로 향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그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귀가 닳도록 들은 말씀입니다.
해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지!’
그런데, 나의 현재의 삶을 바라보면, 나 역시 그 넓은 길...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가는 그 길을 나도 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문제는, 그 길이 무엇이 잘못인지 그 길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안타까운 질문을 하셨는데,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만 생각하고 세상으로 향한 욕심이 많은 ‘불신앙 속에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먼 길을 떠나면서 그가 아는 가난한 목수를 불러서 아름다운 집 한 채를 지으라고 당부합니다.
“집을 지을 때 재료는 최상품을 사용하게. 값이 얼마나 비싼 것이라도 상관없네. 인부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고용하게. 돈 걱정은 하지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짓도록 하게. 내가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올텐데 그 때까지 아름다운 집이 완성이 되었으면 좋겠네.“
목수는 이것이 큰 돈을 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둥 안으로 들어갈 해서 집이 무너지지 않으면 발각되지 않을 철근들을 가장 싸구려로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부자에게 청구할 영수증은 비싼 것의 값으로 책정하였습니다. 나무도 최상품을 쓰는 대신에 가장 싼 재목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페인트를 덧칠하여 그것이 싸구려 나무라는 것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집안 내의 장식들도 될 수 있는 한 화려하게 보이지만 싸구려인 것들로 골라서 사용하였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은 날림공사를 하였습니다.
집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겉모양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집을 지탱하여주는 재료들은 값싸고 약한 것이기에 사실 언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집입니다.
얼마 후 부자가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목수는 비굴한 얼굴로 그 부자를 맞으면서 말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최고의 재료와 가장 유능한 인부들을 사용하여서 아름다운 집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다만 그가 부린 농간에 따라 재료값과 인건비의 차이에 따른 이익을 얻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부자가 가난하고 부정직한 목수에게 말합니다:
“사실 내가 자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집을 지으라고 한 것은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집 한 간 없이 사는 자네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였네. 이 집은 자네가 살 집이네.”
그리고는 부자는 자기의 길을 행하여 갔습니다.
목수는 자기가 부실공사로 지은 집을 바라보며 깊은 후회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아, 나는 왜 이리 어리석단 말인가? 아름다운 집을 지으라고 말한 부자의 의도를 미리 알았었더라면...”
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료는 최상의 것을 사용하여도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짓는 아름답고 웅장한 믿음의 집은 하나님을 위해서 짓는다기보다는 기실은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의 믿음의 자료를 사용하여서 견고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집을 지어나갈수록 하나님나라에서의 나의 집이 아름답고 웅장한 맨션이 되어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맡겨 경영하게 한 달란트와 그 이윤이 결국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종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하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축복 받고 하나님나라에서의 풍성한 기업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의 집을 짓되, 위의 어리석은 목수와 같이 겉모양은 아름답고 그럴듯해 보이는데 속은 부실하여 태풍이 한 번 불어 치면, 무너질 그런 거짓 믿음의 집을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속이 텅 빈,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어리석은 믿음의 집을 짓는 사람은 결국에 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9-10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악한 자’는 3절의 “불법의 사람,” 또한 ”8절의 ‘불법한 자’입니다. 멸망의 아들입니다. 사단의 하수인 적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를 좇는 자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이단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악한 자에게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이 나타납니다.
능력이나 표적이나 기적이 하나님께만 속한 능력이면 좋겠는데, 사단의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에 버금갑니다. 해서, 사람들이 능력이나 표적이나 기적만 가지고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악한 자’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악한 자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자기의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들에게도 보이는데 악한 자의 미혹과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미혹을 당하되 아주 넘어지지 않고 미혹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보호하심에서 이미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망하는 자들’은 내어버려 두십니다.
‘멸망하는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심판을 당하게 내어놓으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서 1장 21-23절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내어버려 두시고 악한 자의 손에 내어주시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하는 날까지 그냥 두실 것입니다.
‘악한 자’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까닭은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함은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 그들은 자고(自高)하고 우준(愚蠢)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는 구원함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불법한 자가 망하는 자들을 미혹하고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선택할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그들로 불법한 자의 유혹에 노출되게 하시고 거짓 것을 믿게 버려두심입니다.
이사야서 6장 9-10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르시기를,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여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보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주가 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이 삶의 주인이며 예수님은 그저 내가 세상 복 받기 위한 이용의 대상입니까?
하나님은 멸망하는 자들을 악한 자의 유혹들 가운데 버려주시며 그들의 속임수를 믿게 하십니다.
해서,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멸망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진리의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움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해서,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은 그 거절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좋아하는 자는 그 스스로 심판의 자리에 놓이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 “멸망하는 자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세상사람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믿음을 고백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따라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따라서, 적그리스도나 이단(異端)의 미혹이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교리로 쉽게 빠져드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경책하였습니다.
3
악한 자의 임함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에도 악한 자가 임하여 사단의 역사를 따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교회가 안전한 장소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한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 알곡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항상 바로 서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단 마귀는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적 마귀의 궤계(詭計)에 넘어가기가 쉽습니까?
어떤 사람이 악한 자가 임할 때 그 미혹과 속임수에 넘어가기가 쉽습니까?
원망하는 마음과 불평하는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한 자의 미혹과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과 찬송하는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찬송하는 입술로 악한 자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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