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살전 2:17-20)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란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인정받기 위하여 자신을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합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같은 사람들은 모두 역사에 남는 철학자들이지만, 이들 역시 자기를 자랑하고픈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헤겔은 “나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전한다. 아니, 내가 곧 진리다.”라고 했으며, 피히테는 “나의 모든 철학은 바로 성령의 유출이다.”라고 망언을 했고, 쇼펜하우어는 “나는 어떠한 성인도 엄두를 내지 못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연 사람이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 또는 아내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문을,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력을 자랑하지만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헛된 자랑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이 세상 살 동안만 허락되어진 것이요, 잠시 잠간 후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지혜와 능력과 문벌과 소유와 행위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고 구원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하고 씁쓸한 맛을 남깁니다. 듣는 사람이 이것을 듣고 말하는 사람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자랑은 시기나게 하며, 배아프게 하며,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주님을 자랑함은 유익을 주며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실현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자랑꺼리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거룩한 자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온전히 사함받음을 자랑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주를 자랑하라”(고전 1:31)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에서 빌려온 것인데,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랑하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카우카오마이(καυχάομαι)는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자랑하다(boast)”는 뜻이고, 둘째는 “기뻐하다(rejoice)”는 뜻이고, 셋째는 “영광돌리다(glory)”는 뜻인데, 주님을 자랑할 때는 이 세 가지 뜻을 다 포함합니다.
곧, “주 안에서 주님을 자랑하는 자”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주님을 증거함으로 자랑하고, 자랑함으로 그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넘치고, 이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 위에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더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전도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그들의 믿음이 바울과 그 일행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2
17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바울이 잠시 그들을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은 아닙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강제로 떼어놓다’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의 바울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핍박자들은 목자와 양들을 강제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양들은 고아와 같이 되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식처럼 사랑하는 양들을 떠나게 된 바울의 정신적 고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얼굴로 보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를 원하되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해도 그들은 바울의 마음을 소망과 기쁨과 자랑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18절: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한 번 두 번”이란 두 번만 가고자 했다는 뜻이 아니라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가기를 힘썼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 여러 번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사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대인의 핍박이라고 하고, 또 어떤 학자는 데살로니가의 정치적 세력이 야손 같은 신자를 구금하여 둔 것, 또는 바울의 신병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모든 궁핍과 환난이라고 하며, 또는 바울의 내적 고민 등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든지 바울은 아마도 모든 것을 통털어 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나갈 수 없게 하는 모든 방해요인들을 사단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19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이는 그들이 바울의 소망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들을 자기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으로 여기는 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맛볼 수 없는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주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씌어 주십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습니다. 또 영광 받을 기대를 겁니다. 이처럼 바울도 양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영광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 주님 앞에 자신의 수고와 기도의 열매인 양떼들을 소개할 소망으로 바울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기쁨으로 목자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면류관‘(στέΦανος)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헬라의 경기장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주는 월계관을 말합니다. 면류관을 받아 쓴 선수에게는 기쁨과 영광과 명예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의 성도들은 이렇게 자랑이며, 영광이고 기쁨의 존재였습니다.
두 번째는 만찬 석상에서 귀빈의 초청자로 예우하기 위해 씌워주는 면류관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피땀 흘려 온 생명을 다해 뛰어서 달려갈 길을 다 간 후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한 천국 잔치 자리에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도 모두 초대되어 그 아름다운 면류관을 받아쓰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 안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겨서 쓰는 월계관은 시간이 가면 시들고 사람들에게서도 잊혀지지만 우리에게는 시들지 않고 썩지 않는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주 안에 서 있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인생은 달음박질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이 소중한 인생의 경기에서 면류관을 쓰느냐 못쓰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나옵니다.
1: 생명의 면류관 (계 2:10): 죽도록 충성 한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 의의 면류관 (딤후 4:7-8): 믿음을 지킨 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3: 영광의 면류관 (벧전 5:4): 양무리의 본이 된 자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4: 자랑의 면류관 (살전 2:19-20): 영혼 구원에 참여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어떤 목사님은 “믿음은 천국의 입장권이고, 전도는 천국의 상품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입장권은 누구나 한 장이면 되지만 상품권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내가 전도해서 얻게 된 열매는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기쁨과 자랑과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늘나라 상급을 마련하는 노동입니다. 힘쓰고 노력해야 할 노동입니다. 담대하게 헌신해야 할 노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이웃집에 들어가는 일은 숨겨진 면류관을 찾기 위해 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일은 두려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닌 기쁘고 즐거운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두는 일입니다.
20절: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울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울에게는 중요합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에게 성도는 소망이요, 기쁨이요, 영광이요, 또한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목회자 역시 주님 안에서 영광과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창조하시고, 위로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근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