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自足)하는 생활” (빌립보서 4:10-13)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秘訣)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能力)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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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에게 하루는 어떤 젊은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제가 매우 아름다운 것에 황홀한 느낌을 갖는답니다. 이렇게 저 자신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혹시 죄(罪)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이 부인의 질문에 그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부인,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 부인은 조나단 스위프트가 그의 아름다운을 인정한 것이라 여기고 얼굴에 막 환한 미소(微笑)를 지으려 합니다. 이때 그가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다만, 그것은 부인의 오해(誤解)일 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을 건내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장인 어른 빽으로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의 엉뚱한 말에 의아해서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아니 선생의 장인 어른이 누구시길래 선생을 천당에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예, 저의 집 사람이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이 제 장인인데 제가 처가집 가는 걸 막으시겠어요?”
우스게 소리입니다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때로는 오해(誤解)요, 때로는 착각(錯覺) 속에서 진행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뜨뜨미지근한 신앙이 좋은 믿음인 줄 아는 분이 있는가 하면, 교회생활을 하는 어떤 부부들은 주일날 둘 중에 한 명만 예배드리면 되는 줄 알고 교대로 교회를 출석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아내가 은혜받으면 남편도 구원받는 줄 알고 신앙생활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라 했으니, 맞는 말 아닙니까?” 질문하실 분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답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님의 오해(誤解)입니다.”
2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전에부터 바울의 선교를 열심히 도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있는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 아가야지방으로 갈 때 그를 도운 교회가 오직 빌립보 교회 뿐이었으며 또 얼마전에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모금을 위해서도 그들은 고린도후서 8:1-5에서 보는 바대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주께 드리는 마음으로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풍성한 연보를 함으로” 바울을 힘에 지나도록 도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후 바울이 로마로 이송된 다음에는 한동안 기회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바울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 끊어져 있던중,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에바브로디도 편에 얼마간의 물질로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이 ‘크게 기뻐하다’고 함은 물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정성된 마음과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기쁨이 넘칩니다: “내가 유럽에 처음 그리스도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마음에 흡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은 그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궁핍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가 크게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함에, 11절에서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17절에서는 “선물을 구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크게 기뻐함으로 그의 감사함을 편지로 전함은 그가 뿌린 복음의 씨가 싹이 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람을 보기 때문이요, 그들로 더욱 풍성한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감사함과 기쁨을 편지로 전하는 기회를 얻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구제가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 텅빈 마음과 공연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주린 형제에게 먹을 것으로, 목마른 형제에게 마실 것으로 공급하여주고, 벗은 형제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형제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형제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있는 복음의 씨의 자람은,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 안에서 옥에 갇혀 불쌍한 자된 소자와 같은 자신을 돌보는 이 일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자된 작은 자와 같은 바울을 돌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고, 그 일을 함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은밀(隱密)하게 하였기에 바울의 기쁨이 큰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구제는 18절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과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 받으심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때 그 마음 중심을 온전히 드렸기 때문인데, 빌립보 교인의 선물이 바로 그들의 온전한 마음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표현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제할 때, 구제를 받을 때, 또 중요한 것은 구제하는 사람의 마음뿐아니라 구제받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은 구제할 때 자랑하거나 외식하는 행위로 구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구제를 받는 사람은 기뻐함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체면을 중시 여기기 때문에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는거요’ ‘내가 구차하게 이런 것을 받을줄 아시오? 차라리 굶어죽는 것이 낫소’ 할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너무 구차하거나 비굴한 마음으로 받을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자로서 선생으로서 자칫 구차하거나 비굴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감사한 마음을 잘 표현하면서도, 의연하고 떳떳한 자세를 잘 취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시대에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11절: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形便)과 환경(環境)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습니다.
가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앞에 서면 주눅이 드는 것은 내가 그렇지 못함에 불평과 불만이 내 속에 잠재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럴 것이 없는 것이 세상의 지위나 재물이나 학식이 다음 세상에도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백성이 된 까닭에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초나라의 섭공(葉公)이란 사람이 공자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는데, 마침 그 제자 자로(子路)를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해서, 그에게 공자가 어떤 분인가 묻습니다만, 자로는 섭공의 갑작스런 질문에 제대로 공자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맙니다.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는 자신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해줍니다: 즉 자신은, “항상 도를 추구하여, 한 번 공부에 전념하면 먹는 것도 잊고, 그리하여 도를 알면 즐거워 모든 걱정거리를 잊고, 나이와 세월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공자는 자족하는 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 “나물밥 먹고 물 마시며 팔굽혀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으니 부정하게 부하고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공자의 삶의 태도는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학문의 도를 깨달은 즐거움에서 온 것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학문의 도를 깨달은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과 평안과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고 영생(永生)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학문의 도를 깨달은 공자의 즐거움이 그로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욱 더 세상의 형편과 처지를 탓하지 않고 이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2절: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할 때, “그는 원래 부요(富饒)하신 자인데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나라에서 부자이신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풍부와 가난 모든 것에 처해보심으로 우리 인간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기 이전에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부유한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가난에 처하기를 자청(自請)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위대한 선생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당시에도 비천하게 여겨지던 일-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계(生計)를 유지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와 같이 큰 이름의 사도가 아니었기에 그를 돕는 교회가 많지 않아 하나님의 일인 선교를 하면서도 자신이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9장에서 기록했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를 돕지않는 교회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 일을 하여야 함은 복음 전하는 일이 사도(使徒)로서 그의 책무(責務)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굶주림과 환난 가운데서 주의 일을 함에서도 원망보다는 만족함으로, 분개함보다는 감사함으로 했습니다.
바울의 “어떠한 형편에서건 자족(自足)하는 일체의 비결(秘訣)”은 바로 “환경을 다스리시고, 우리에게 시절(時節)을 좇아 필요한 것을 예비하여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함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리할 수 있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 당시에 스토아 철학자들도 사람에게 내재해있는 무한한 잠재력(潛在力)을 개발할 때 철저한 극기(克己)를 함으로써 모든 일이 가능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요즘도 세상사람의 방법으로도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함으로 자신이 지향(志向)하는 계획들을 얼마간 이룰 수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실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며, 그가 계획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이 이루지 못하고서도 하나님을 원망(怨望)할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란 ‘자기의 유익(有益)을 위한 세상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가 주님꼐 전적으로 의지하며 간절히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능력을 행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하나님께 고백(告白)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는 오히려 온전히 약해져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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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의 능력(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저자 노-만 필(Norman Peale)목사님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첫째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둘째는 교회에 다니고, 셋째는 염려와 근심을 버리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함은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내어맡길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삶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의 형편과 환경은 다만 지나갑니다. 우리가 부합니까? 거기에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합니까? 거기에도 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권세가 있습니까? 거기에 다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울함을 당합니까? 그것도 다함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형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든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동일한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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