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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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말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고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든, 믿음의 생활이든 우리가 수고한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또한 풍성한 것을 거두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친 시간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성과가 크기를 바라고 또 조급히 큰 성과를 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무디(D. L. Moody, 1837-1899) 목사님이 한 번은 자기의 사업성과가 너무도 미미한 것에 낙심하여 서재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친구가 찾아와서 낙심한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자기가 일한 성과가 너무 작아 낙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자네, 노아의 생애에 대하여 공부한 적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무디가 “아니, 그의 생애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한 일은 없는걸”하고 대답하자, 친구는 무디에게 노아에 대하여 공부하라고 권합니다. 무디는 친구가 간 뒤에 구약을 펴들고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백년가까이 온갖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나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견딘 것을 읽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세상에 큰 홍수가 내리고 그의 믿음의 역사로 지은 방주 안에는 오직 육축과 노아의 여덟 가족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디는 “아 나의 조급함이 이리도 어리석은 것임을...” 하며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새로운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하였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중에 조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화를 내고 돌아섭니다. 그런가 하면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사람 말만 듣고 있다보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는 그가 입으로 말하는 일이 한 가지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할 것을 말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게도냐 전도는 이차 전도여행 중 그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전 16:9)고 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한 곳이 빌립보 지방이었는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더 이동하여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이로써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소요가 일어나자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는데,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듣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편지를 쓰게된 계기는 그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소요가 일어나 부득이 이곳을 떠나게 되고 이후에 가고자 하나 갈 수 없어(살전 2:17-18), 디모데를 보내어 형편을 알게 하는데(살전 3:1-5),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그곳의 소식을 가져오므로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살전 3:6-13).
데살로니가전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하여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독려(督勵)하고(3:6,10), 그들 가운데 있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음란[4:3], 게으름[4: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고(4:13-17), 새로 믿기 시작한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격려하고(4:1-12), 바울에 대한 중상(中傷)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증거한다[2:3,9-10]; 아첨한다[2:4-6], 겁쟁이다[2:17-20]).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빎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교회가 많은데 그 어느 교회 하나 그의 마음과 기도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들 가운데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바울을 가장 기쁘게 하고 그를 열심히 도운 교회들입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바울은 믿음의 초기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전도에 반대하는 데살로니가 지방의 유대인들의 소요(騷擾)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음이 대견하였습니다. 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로 선한 일의 열매를 맺는 능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후에는 그 믿음을 삶 속에 구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곧 믿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믿음의 역사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늘 생각나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라면 역사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5-6절에서도 역사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수고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늘 생각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란 책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는 “고통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곧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이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행 20:35). 이것이 참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본문에서 말하는 아가페사랑입니다.
셋째는, “소망의 인내”(steadfastness of hope)로 하나님 나라와 그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은 인내할 때 그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기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망은 헛된 것이며(전 1:2~3)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1장 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쉬지 않고 기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기 때문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늘 생각나는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던 과거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고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삶의 초점은 확실히 예수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러한 일들을 잘 감당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유대인의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의 생활에 힘쓰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힘쓰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을 알게 합니다.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하여진 복음은 그저 말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해서 그저 환난이나 소요가 나면 그대로 시들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담대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하여 성령이 도우시고,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확신 가운데 전달되어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복음을 전한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먼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와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기에,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함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능력과 성령의 역사와 복음으로 말미암은 큰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연조가 짧고 그들 앞에 환난이 있음에도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생활을 기뻐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과 또한 복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울에게 큰 기쁨입니다.
7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에 위치한 교회로서 같은 지역에 있던 빌립보 교회와 함께 초대교회 당시 좋은 본을 보인 교회입니다.
바울이 3차 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곳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인데, 이들 중에 마게도냐에 있던 교회들--특히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이후의 기록이지만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을 얼마나 대견하게 여기는지는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1-2절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증거했습니다.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믿음과 그들에게 전달되어진 복음의 소식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뿐만 아니라 입에 입을 통하여 널리 널리 전파되기에 바울이 굳이 그들의 좋은 믿음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하여 좋은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함 받았으며,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 가운데 있던 우상을 어떻게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어떠한 열심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니까
주위의 사람들--아직
신앙에 열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들의 좋은
삶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주위에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까?
사랑의 수고가 있습니까?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주위에 아름다운 소문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갖고 가까운 지역뿐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 믿음의 좋은 소문을 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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