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빌립보서 3:1-11)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害)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知識)이 가장
고상(高尙)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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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뜻을 바로 헤아려서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주의깊게 듣거나 성경을 정성껏 읽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고민꺼리가 생깁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노라면, 성경을 읽노라면, 평신도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 같고, 직장생활을 잘 하는 것도 뭔가 잘못된 일처럼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죄송스런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하여 아예 목사님의 설교도 대충 듣고 성경도 대충 읽기로 작정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그 자체에만 믿음생활의 의미를 두기로 작정합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은 아예 교회에 나오는 일을 삼갑니다. 교회에 나오면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중히 여기는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 같기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서 오직 레위 지파만 성소(聖所)에서 제사의 일을 맡게 하셨습니다.
또 성경기록에 보면, 하나님과 더 많은 교제와 교통의 삶을 산 사람들이 이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아닌 것을 봅니다. 구약의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중에 모세와 아론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지만, 요셉은 요셉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갈렙과 다윗은 유다 지파,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 여러분은 목회자가 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기업의 경영권을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전까지 해온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경영방법을 버려랴 할 것이며, 지나친 탐욕의 마음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행심(射倖心)으로 땅투기, 아파트 투기를 하여 돈을 불려가고자 하는 것, 부정한 방법으로 사람을 속이며 사업하는 것,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남을 모함하는 행위, 크리스천인데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없는 일까지 지어내며 온갖 흑색선전을 하는 행위, 학생으로서는 당장의 눈 앞에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하나님께 반드시 드리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지워버리는 행위 등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아닌 한에서, 남보다 부지런히 일함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일,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고 거기에 합당한 직책을 얻는 것, 직장에서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남보다 일찍 승진의 기회를 얻는 일등은 크리스천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일이요, 이러한 일에는 주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2
1절: 종말로 (τὸ λοιπόν)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종말로 (τὸ λοιπόν)’란 ‘마지막으로 (finally)’으로란 뜻으로 빌립보 교인들의 주의(注意)를 환기시키고자 함입니다. 또, 이 말에는 '지금 이후로 (from now on)'란 뜻이 있는데, 이는 이제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을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이제까지 그리 해왔듯이, 이제 이후로도 주 안에서 늘 기뻐하라’ 말씀함입니다. 이렇게 내가 반복해서 말함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함은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하고 믿음의 생활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기억으로는, 불조심 포스터가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불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까지 걸어다녀야 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차조심을 시키는 부모님의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얘야, 길건널 때는 반드시 차가 오나 확인하고 건너라!” 이러한 조바심이 자식이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자식이 집을 나선 것 보다, 자식이 지나치는 소리로 듣더라도 이 말을 함으로서 부모님은 그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성경에서 개들이란 표현은 가치있는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傷)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가나안 여인이 딸의 귀신들림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유대인적인 심한 말로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을 향하여서 유대인들은 ‘개들’이란 표현을 썼는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반대로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켜 그들을 삼가 조심하라고 경계를 줍니다.
이 개들이란 원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밖에 머물고 있는 자들’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안에 속한 자로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들을 삼가고”란 이러한 사람들과 깊은 사귐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행악하는 자들이란 복음을 부인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에 관하여는 1장 27-28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일심(一心)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손할례당이란 자기의 육체의 조건들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99세된 아브라함과 그 가정에 처음으로 행하게 한 것입니다. 남자의 중요한 부분인 생산기관의 양피를 조금 베므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獻身)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헌신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할례를 행치 않는 이방인들에 대한 구분의 표시로서 “할례를 행한 우리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며 할례를 자랑꺼리로 삼았습니다.
육신의 할례(割禮)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서도, ‘너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너희 믿음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에 속한 유대주의적 신자들을 향해서 바울은 손할례당(=거세당)이라 표현했는데, 할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페리토메-이(περιτομή: circumcision = cut around)를 사용하지 않고 카타토메-이(κατατομή: mutilation = cut off)란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네가 양피를 벤 일로 자랑꺼리를 삼으려거든 아예 네 물건을 잘라서 육체의 것으로 더 많이 드린 것을 자랑하라”는 조롱섞인 뜻이며 이와같이 육신의 나음을 자랑하는 자와는 도무지 교제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서도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물건을)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는 극단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할례를 비롯하여 육신의 것으로 자랑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할례당이라.
하나님께 봉사하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사를 할 것이며, 자신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나 이룬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할 것이며, 육체의 조건들 - 박사요, 교수요, 의사요, 장관이요, 부자요 - 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나의 심령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물론, 3절에 사용된 할례당이란 단어는 페리토메-이(περιτομή: circumcision = cut around)로서 하나님께 제대로 된 마음 중심의 헌신을 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바울은 “대저 표면적(=외면상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내면상의)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神靈)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은 육체의 자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도 어리석은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육체적 조건들의 나음이 그리스를 믿는 일에는 아무 유익이 없으며 도리어 장애물이 될 때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6절이하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내의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어리석은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발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이는 그의 육체적 조건들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그의 어리석음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7-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버린 것을 배설물(排泄物)로 여길 수 있음은 그리스도를 믿고 의로와진 나에게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高尙)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로와지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의로와지기 위하여 성경도, 세례도, 윤리적인 선(善)도 필요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신약의 기본교리를 설명함에 아브라함이 왜 필요했습니까? 이는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을 받는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이전에, 그가 할례받기 전에 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온전치 못함에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에 의로 여김을 받았음을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학문이나 사업에 사용하시는 시간이나 정성이나 마음보다 더 많은 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쏟으라고 권면한다면 지나친 일이겠지요. 그러나,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허락되어진 기업을 사랑하고 전심을 다하는 그 마음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주님을 경험하는 일에 열심을 내신 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눈에 뜨이게 성장할 것입니다.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알고자 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열거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자 한 내용은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닥아오신 우리의 구세주(Savior)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아는(=믿는) 사람은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당함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또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도,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경험하여 앎이 필요한 것은 이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던 것과 같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부활에 참여하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할례 또는 세례가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자랑꺼리가 되기 때문이 아니요, 우리 마음 중심에 믿음으로 행한 할례 또는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6-17절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3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외적 조건과 세상에서 가진 것을 의지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 중심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우리의 학문이나 지위나 지식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하며 이로써 우리 각자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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