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는 삶” (빌립보서 3:12-16)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穩全)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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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변화도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이란 말중에 교회에 속한 믿는 사람이 택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이란 기독교에 속한 사람 혹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스스로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라 칭할 때, 이는 나의 믿음을 여느 다른 종교행위의 범주로 격하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불교, 회교, 기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데, 나는 나의 구원의 한 방편으로 기독교를 택하고 이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종교행위라기 보다는 우리의 삶 그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란 뜻인데, 이는 맞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 안에 거하라, 속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란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란 의미도 합당한데, 이는 우리의 종교행위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곧,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과 재림하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속한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 하는 것이야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함으로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신 대로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를 본다’와 ‘예배를 드린다’란 말 중에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배를 본다’는 말에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예배에 적극적인 참여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다만 구경꾼으로서 혹은 방관자로서 예배장소에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해서, 자신이 예배장소에 없다고 하더라도 별로 상관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장소인 성전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예배에 참여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 구경꾼이나 방관자의 자세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의 심정으로 나온 것입니다. 설교자가 예배의 한 구성요소인 것처럼, 성가대가 예배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것처럼, 예배드리는 각 사람이 예배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구성원이 잘 조화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심(全心)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일요일”과 “주일”이란 말 중에 “주일”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일요일이 나에게 소중하고 구분됨은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날이었는데 이 날에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소중한 날이 된 것이며, 하루와 일주일에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주님의 전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함에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하기도 하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에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차 유대교에서 분리되는 과정에서, ‘주님의 날’의 의미의 중요성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깨닫게 됨에 따라, 주일예배가 정착화되었습니다.
17세기를 산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천 번을 태어나셨다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나신 바 되지 않았더면, 나는 여전히 잃은 자였으리라 (Wär' Christus tausendmal in Bethlehem geboren
und nicht in mir -- ich wäre doch verloren)"라고 그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되, 다른 사람의 주님되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님되시며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의미있고 은혜롭고 고마우신 주님이 될 때 비로소 나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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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의 가는 길 종착지에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거기 부활(復活)이 있고, 구원(救援)이 있고, 영생(永生)이 있습니다.
앞서 2장 12절에서도 본 바와 같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구원이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크리스천의 과정 중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약속(約束)이 주어졌습니다.
약속의 보증(保證)이신 성령님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救援)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確實)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구원, 영생, 영광에)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하신 대로 과정중의 삶을 사는 우리는 믿음을 견고히 붙잡고 구원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는 종국에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이 믿음대로의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 종착점에 계신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자료를 갖고 믿은의 견실한 집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은 넉넉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1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失足)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이지만 그가 생을 사는 과정에서 부활과 구원과 영생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원래는 3장 6절에 있는 바대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도를 핍박(逼迫)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하며 예수님 믿기 전의 그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또 다른 크리스천들을 결박하고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되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붙잡으실 때 우리에게도 각각 다른 사명 감당함을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그리고 그 이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달려간 그길을 우리도 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로서는 처음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가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 얻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잡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달려갑니다.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미완성의 삶입니다. 나에게 천년의 인생이 주어진다 해도, 내가 이룰 수 있는가 하면 이룬 것이 없고 잡은 것이 있는가 하면 잡은 것이 없습니다.
왕이 되면, 대통령이 되면 다 이룰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닙니다.
인생에는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완성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하강하기 위한 꼭대기에서의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미완성의 삶을 끝까지 달려갈 필요가 있음은 그 종착점에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것이 끝인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 영원한 완성 - 온전함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푯대를 향하는 성화의 삶을 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이 되고 방향판이 될 뿐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주는 영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뒤에 있는 것-우리가 떠나온 것-을 잊어버리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버리라고, 포기하라고 명하신 대로 했는데 그 다음 순간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진전이 없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누가 9:6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의 욕심과 자랑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좇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물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로 접어든 우리가 과거를 아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이 뒤돌아보지도 말고 앞만 보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는데, 이러한 삶은 우리의 현실에서의 지나친 탐욕의 마음을 버림으로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凌辱)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더 큰 칭찬과 상급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는데, 지나갈 세상에서의 자랑과 욕심은 좀 줄여야 하겠습니다.
1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이제까지 12-13절에서 그가 얻은 것도 아니요, 이룬 것도 아니요, 잡은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15절에서는 돌연(突然)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과거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 온전히 이룰 것이 확실한 자들‘ 입니다.
현실(現實)로서는 아직 얻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잡은 것도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크리스챤으로서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 ‘온전히 이룰 것이 확실하므로’ 15절에서는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과거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현재는 나에게 부활도, 구원도, 영생도 다 미래적인 사건이요, 내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과정의 삶을 살아가지만, 성령의 보증을 느끼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구원받았다’고 신앙고백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의 불확실한 사건이지만, 믿음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이룬 것과 진배없는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지니’ 한 것은 첫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함이요, 셋째는 현 위치에 머물지 않고 상 주심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하여 나가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빌립보 교인들이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이 권면하는 이러한 것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소망함이 그에게 있습니다.
16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은 믿음의 삶을 경주로 표현했는데 이 믿음의 경주는 옆 사람과 하는 경주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방해하는 죄성과의 싸움이요, 세상으로 향하는 자신과 겨루는 경주입니다.
걸음을 재촉하여 푯대를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갈 때, 우리는 ‘한 사람이 달리는 생의 경주’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고있는 하나님의 길을 중단(中斷)없이 계속 가야 합니다. 지금 출발하였다고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걸음이 더디지만 꾸준히 그리고 뒤돌아봄이 없이 그렇게 걸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자만(自慢)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이른 것이 사실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인 까닭에 다만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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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울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아직 얻은 자도 아니요, 이룬 자도 아니요, 잡은 자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과정 가운데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또 상급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길을 가고있습니다.
그러나, 미완성중에 완성의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얻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잡은 것도 없지만 해서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얼굴과 얼굴로 주님을 대면하는 세계를 바라볼 것이며, 해서 내가 이미 얻은 자요, 이룬 자요, 잡은 자라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 때,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실현될 때를 소망 중에 사모하며 달려갈 길을 꾸준히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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