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 (에베소서 1:15-23)
1:15 이로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들고
16 너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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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에 관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컴퓨터 저장 용량과 계산법을 표시하는 단위로 비트(bit)와 바이트(byte)라는 용어를 듣게 됩니다. 비트(bit)는 컴퓨터 저장용량을 표시하는 최소단위로 ‘binary digit'란 말의 축소어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계산은 0에서 9까지의 숫자로 표시하는 십진법인데 컴퓨터의 저장은 0과 1 중의 선택인 이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십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진법의 컴퓨터 저장원리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컴퓨터 용량과 기억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로 바이트(byte)는 8 비트(bit)로 이루어지는데 한 bit의 선택이 두 가지 중에 하나이므로 순열(permutation)의 방식으로 28, 곧 256가지의 다른 표시중에 선택이 가능합니다. 보통은 한 바이트(byte)에 한 숫자 혹은 한 문자, 혹은 한 표시기호를 집어넣는 것이 편리하고 쉽지만, 내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다양하여져서 256가지 표시방법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한 바이트(byte)로 모든 것을 표시하기가 불가능하여져서 두 바이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십진법과 이진법의 표시와 계산방법 중 어느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 이진법이 쉽겠지요.
십진법은 0에서 9까지 열 중에서 선택과 계산을 하는 것이요, 이진법은 0과 1 둘로 이루어진 계산이기 때문입니다.
십진법 중의 선택과 이진법 중의 선택에서도 당연히 이진법 중에서의 선택이 쉽습니다.
그러나 십진법에 익숙해있는 우리에게 이진법은 많은 경우에 십진법 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십진법의 수를 이진법의 수로 전환(轉換)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숙해있는 십진법을 세상의 지혜와 총명이요, 세상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진법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기 위한 것이요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십진법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을 0으로 표시하기로 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9로 표시하면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게 표시됩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있게 “예, 저의 믿음은 9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지 못합니다. “저의 믿음은 아마 5나 6쯤 될껄요,” “저의 믿음은 아직 2나 3에 불과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전적으로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면 0,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삶이면 9라고 표시하십시오’ 라고 질문하면 “예, 저의 삶은 9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예, 저의 삶은 아마 3이나 4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대답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익숙한 것이 십진법의 질문이요 대답이기 때문이고, 회색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취향상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극(極)은 피하고 대충 중간노선을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산과 선택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산과 선택은 이진법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십진법의 질문을 이진법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0으로 표시하고 믿으면 1로 표시하십시요’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자신있게 믿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십진법에 익숙해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질문도, ‘세상의 정과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십니까?’로 바뀌고 우리의 대답도 0과 1 중에 결정을 해야 할며, 우리의 삶 자체도 둘 중에 하나의 선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두 가지중에 한 가지입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 ‘구원이냐? 멸망이냐?’지,
‘너는 세상에서 열 중에 4정도만 나를 믿었으니 네 몸과 영혼의 4/10만 구원받고, 나머지 6/10은 멸망받아라’ 하시며, 몸중에 가슴 위는 천국에 머물게 하시고, 가슴 밑은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것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재물(財物)로 대표되는 세상 것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결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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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 (διὰ τούτο)는 “그러므로” 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 무엇이며, 하나님 뜻의 비밀이 무엇이며, 경륜--구원계획을 알게 하시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를 하나님의 기업--자녀로 삼으시고, 자녀삼으신 자에게는 그 보증으로 (증거로) 성령을 주셨다고” 설명했는데, 나에게 들리는 바로는 너희도 그에 합당한 믿음을 갖고있고 성도들 간에 사랑을 나눈다고 하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할 것이요 또한 하나님께 계속 간구함으로 너희 모두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17-1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8-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의 간구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주사” 하나님 뜻의 비밀--곧 경륜 (인간구원계획)을 알게 하셨는데, 17-19절에서 두 가지를 더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지혜 (σοφία)와 계시 (ἀποκάλυψις)의 정신 (πνεύμα)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ἐπιγινώσκω) 원하십니다.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간들에게 밝히시고자 혹은 보이시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정신으로 번역한 프뉴마((πνεύμα)는 “영, 성령”입니다.
즉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사”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다(ἐπιγινώσκω)는 뜻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2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마귀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있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알게 하시고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 (καρδία)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 기업의 영광의 풍성,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시고 이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도 “마음의 눈”입니다. 이 눈이 탐욕스러우면, 우리의 몸도 탐욕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 마음의 눈이 어둡고 병들어 있으면 우리의 육신의 몸도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육신도 영도 밝음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센쉬(Shen-hsiu)라고 하는 중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한 편의 시를 벽에 써놓았습니다:
“몸은 보리나무요, 마음은 그 앞에 서있는 밝은 거울과 같도다.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항상 거울을 깨끗이 닦아서 먼지가 그 위에 붙지 않게 하라.”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곧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깨끗이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본 그의 선생 희냉(Hui-neng)이 또 한 편의 시를 그 옆에 씁니다:
“예전부터 보리나무도 없었고 밝은 거울도 서있지 않았노라.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어디에 먼지가 붙으리요?”
제자 센쉬(Shen-hsiu)는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승 희냉(Hui-neng)은 ‘무심(無心)’이 부처의 길이라고 대답합니다.
선과 악을 생각하는 마음 자체를 없게 하는 것이 부처가 되게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악(惡)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아래이요, 선(善)을 생각하는 것이 그 다음이요, 제일 위에 것-곧 부처가 된 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생을 좌선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고 이리할 때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결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곧, 이 눈은 영의 눈인데 성령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비로소 뜨임을 받습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고자 구름 떼같이 몰려오지만, 엘리사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눈---영의 눈을 통해 그를 옹위하는 하나님의 능력, 천군천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은 센쉬가 말한 대로 마음을 깨끗케 하는 뼈를 깍는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영접하며 그 분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결단의 순간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서 더욱 더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20-22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바울은 20-22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신 그 능력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시는 능력 (δύναμις)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그리스도를 사흘만에 부활시키신 능력이요, 그를 하늘로 올리우시고 그의 우편에 앉게하신 능력이요, 그에게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신 능력이요, 그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되게 하신 능력입니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연합입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에 지체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층만 (πλήρωμα)은 ‘차고 넘칠 정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정겨운 아주머니가 큰 밥그릇에 밥을 퍼주는데 밥그릇 위로 쌓이게 퍼주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는데, 타락한 우리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로 다시 부르심은 우리가 잃었던 “충만케 됨”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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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나타나사 그들을 부활시키시며 그들로 하늘 위로 올리우시며 그들의 이름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는 축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눈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역사와 능력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신 교회에 속한 백성에 합당한 일들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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