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 (에베소서 1:1-6)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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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이 믿음의 마음이 생길 때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하기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성경말씀을 많이 듣고 읽을 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마음이 생기고 또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이 이로써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믿음의 마음이 다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믿음의 마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방황 끝에 믿음의 마음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실패와 좌절의 마지막에 믿음의 마음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 믿음의 마음이 생기고, 또 어떤 사람은 죽을 병에 걸린 다음에 믿음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그러했고,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러했고, 또한 요한 웨슬레(John Wesley)가 그러했듯이, 성경말씀의 한 구절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 말씀으로 인하여 나의 삶 전체가 변함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으로 그의 삶의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고,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으로 자신 믿음의 변화와 종교개혁의 큰 틀을 마련하였고, 요한 웨슬레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듣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리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로 유명한 안요한 목사님은 그가 시력을 잃어가며 장님이 되어갈 때 절망으로 몸부림치다가 그가 목회자의 아들이지만 그렇게 부인하던 하나님의 귀하신 음성을 듣습니다.
그의 눈에는 목사인 아버지가 가난하고 무기력한 존재로만 보입니다. 해서 그는 아버지가 믿고 전하는 그 하나님을 철저히 부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시도하는 절망 가운데 헤매일 때 강권적으로 그를 사로잡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 320면을 펼쳐보아라!”
그는 더듬거리며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난 집을 나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구약성경의 320면을 읽어달라고 부탁합니다. 한 학생이 그에게 구약성경 320면을 읽어줍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 그 학생이 여호수아 1장 1절로 시작하여 계속 읽어내려 가다가 9절을 읽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니라.”
그는 이 구절(句節)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낍니다. 그가 성한 눈을 가졌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던 하나님이었는데, 그의 육신의 눈의 시력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영의 귀를 열으시사 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 “그 안에서“ 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란 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세어본 바로는 32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고 발견치 못했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의 네편의 옥중서신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는 바대로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로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 보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 6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해서, 열 두명이 가정에 모여서 바울의 설교를 들음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간구원의 경륜(=경제계획)이 때가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세상의 모든 죄로 인한 불화와 분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되고 하나가 된다는 진리를 밝히 선포합니다. 1-2절의 인사말에 이어서 바울은 본 서신의 주제로 바로 진입(進入)합니다.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 됨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형편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라고 했는데, 이는 에베소의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신실함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합니다.
신실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실하게 만드십니다.
신실하다(faithful, πιστός)란 말은 영어단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이 많다, 믿음이 넘치다’란 뜻으로 곧 하나님에 대한 신실하심으로(믿음이 넘치시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해서 이 신실하다는 세속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지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일과 세상 일의 상충(conflict)이 있을 때, 주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합당한 단어입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바울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대한 신령한 복을 설명하기에 앞서 “찬송하리로다”(εὺλογητὸς)란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이 신령한 복을 생각만 하여도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모든 신령한 복”(ἐν πάσῃ εὐλογίᾳ πνευματικῇ)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ἐπουρανίοις) 것입니다.
이 복은 또한 그리스도 밖에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주시는 복입니다.
4-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신령한 복”은 시기적으로는 “창세 전에” 마련되어진 복이요, 방법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이요,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자 함이요,” 형태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요, 그 내용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 되게 함”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있습니까?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市民權)은 하늘에 있는지라”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자녀)들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우리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사정을 들어주시는 대상이 되십니다.
로마서 8장 14-15절에서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신령한 복-하나님의 아들(=자녀)들 되게 하심은 사실 값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거저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령한 복을 주심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기 위함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통하여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기 위함이셨는데 사단의 방해로 이것이 중단되어왔었습니다. 이제 때가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이 여러분의 귀에 어떻게 들리십니까?
12세기의 수도사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란 192행의 시를 지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찬송가 85장은 그 시에서 발췌된 가사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Ίησούς)란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름은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인데, “여호와는 구원”(Jehovah is salvation, Jehovah saves)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호칭(Title)으로서 히브리어는 “메시야” 곧 구세주(Savior)란 뜻입니다.
우리의 구세주요 구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미를 돌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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