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인한 구원” (에베소서 2:1-10)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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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씀합니다. 이 분이 큰 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던중 모처럼 기회를 얻어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천 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충실히 잘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설교준비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가지고 크리스찬의 경제윤리를 설교하고자 준비하는데 자꾸만 한 장로님의 얼굴이 그의 설교준비의 길을 막습니다.
그 장로님은 어떤 분인가 하면 자그마치 빌딩 아홉 채를 소유하고 땅도 상당하여 당시 개인소득세 납세실적이 한국전체에서 상당히 상위 권 안에 들어있던 분입니다.
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윤리를 말씀 그대로 설교하고 싶었지만 그 장로님이 부담이 되어 결국 우회적인, 변죽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르기를, 그 장로님이 설교 내용의 속 뜻을 깨닫고 아홉 채 빌딩과 땅의 얼마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습니다.
설교를 마친 이 전도사님께 그 부자 장로님이 다가옵니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니 젊은 전도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하면서 기쁜 낯으로 악수를 청합니다. 그러나, 기실 그가 “은혜 많이 받았다” 한 것은 전도사님을 통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줄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보니, 그 장로님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해석으로는, 재산을 그대로 갖고 있는다고 해서 크게 죄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그 분의 귀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이 없이 많은 재산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 은혜로 생각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삶 가운데 부담으로 생각되는 것에 관한 설교를 듣기를 원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가려운 귀를 그대로 두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시원하게 긁어주기를 원합니다.
전혀 언급이 없으면 그것을 갖고 사는 것이 계속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에 관한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이 죄가 아니요 허물이 아니라는 해석을 듣고자 함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는 것 같은데 야단치지 않으시면 계속 불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에 관하여 말씀하시되 “얘야, 그건 잘한 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괜찮은 일이야.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해도 돼”라고 하시면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책되는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듣기를 원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받기 보다는 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괜찮다”는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며 만일 목사님이 그렇게 해준다면 설교를 통해서 은혜받았다고 여기게 됩니다.
바울도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귀가 가렵다”고 하는 표현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자기 삶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의 표현에도 있지요. “다른 사람들이 내 욕을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질간질하지?!”
그러면 근본적으로 이 잘못된 부분을 돌여내야 할 터인데, 그러자니 너무 아깝고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서, 그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해줄 설교자를 구하되, 그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즉, 직언해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줄 사람 두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마태 19:16-22; 마가 10:17-21). 그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여전히 한 가지 부담이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재산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늘 부담꺼리가 되던 중에 영생(永生)에 관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는 예수란 선생을 만나서 그 분의 변호를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듣기를 원한 대답은, “당신이 재산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권세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당신은 지금 이 모양 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직설적이십니다. 그가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자신의 부담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라하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이 부자 청년 관원은 어떠해습니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 10:22)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의 허물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설교자가 그래도 좋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한 뜻을 변경하여 이브를 미혹하는 옛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구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만 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회개하지않은-뉘우치고 고치지 않은-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이요 기억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1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그들에게 주사 그들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알기를 원하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알기를 원하고, 그들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는 이 하나님은 또 어떤 분이신가 하면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어 없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입니다.
너희들의 죄와 허물은 그대로 갖고있어도 괜찮다 하시면서 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며, 이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게 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전에 에베소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하면 이 세상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믿지않는 자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에게 공중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 사단은 그로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을 타락시킴으로 잠간동안 하나님에 대항하여 승리한 것 같은 착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착각을 더하여주시듯이 그로 땅에 권세까지 허용하셨습니다.
해서, 그가 이 땅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인간의 타락에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단에 대한 징계를 쌓아가시는 것이며, 사단의 자녀들로 발견되는 인간은 물리치시고, 이러한 미혹과 시련 가운데서도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우리 인간이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구원계획이십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 가운데 순종치않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치않아 타락한 천사인 사단에 속한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뿐아니라 우리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는 하나 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함에 따라 행하였기에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마음의 원함대로 살 때 진노의 자녀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요한은 요한1서 2장 15-16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요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좇지않는 삶이 우리의 원함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할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4-5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사정을 안타까와 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무엇이든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διὰ τὴν πολλὴν ἀγάπην)라 함은 원뜻에 가까운 표현은 “많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되 한 번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많이, 늘 사랑하시기에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오래참으심으로 기다리시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마련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구원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하실 때, 1장 20절에 보는 바 대로, 죽은지 사흘이 지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했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십니다.
“은혜로(χάριτι)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는데, “은혜로”라고 표현하든 “은혜를 인하여”라고 표현하든 같은 뜻입니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instrumental dative"(수단적 보격)라고 하는데, ”by means of"(...을 매체로 하여)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매체로 하여(=수단으로 하여)”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이 “은혜” (χάρις)는 햇빛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내리 비췹니다.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든 사람이 악인(惡人)이었습니다. 그 모든 악한 사람들, 아담의 타락이후에 어둠의 자식들인 우리에게 따사한 은혜의 빛을 내리쪼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은한 사람도 예외됨이 없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의 통로로 들어올 때 그 통로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통로로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과거에 여러차례 거절하고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의 통로를 계속 마련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 끝날까지 이를 거부한 사람은 마침내 그가 가는 길이 끊겨있음을 발견하며 그 일생의 길 다음에 구렁(pit)이 놓여있어 영생이 있는 천국으로 건널 수 없으며 결국 이 구렁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일생의 어느 때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통로에 들어선 사람은 그 믿음의 긴 통로가 끝날 때쯤에 햇빛보다도 더 밝은 천국이 그 앞에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6-7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5절 괄호안에 있는 “은혜로 인한 구원”에 대한 언급으로 잠시 끊긴 것같은,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하늘에 올리우셔서 오른 편에 앉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늘로 올리우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 모든 인간을 살리시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살리시되 한 세대에 특정한 사람만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인간들에게 풍성한 빛의 은혜를 밝히셔서, 모든 인간들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를 인하여”는 5절에서 설명한 대로 “은혜를 수단으로 하여”--곧, 하나님의 은혜의 햇빛이 각 사람에게 비취매“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라고 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에서 “through faith"라고 했듯이 ”믿음을 통하여“입니다.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라고 제가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통로에 들어가는 일조차 우리의 선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세상의 기준으로 행위가 선한 사람 앞에만 믿음의 통로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통로가 놓여있고, 믿음의 통로에 들어서는 사람이 들어서지 않는 사람보다 행위가 선한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혜를 인하여 믿음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통로를 들어서는 사람이 들어서지 않는 사람보다 행위가 더 선한 사람은 아닌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더욱 부르짖어 간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여 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곧, 은혜받을 만한 마음을 갖고있는 사람입니다.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셨던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처음 사람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일입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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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함을 얻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다름아닌 새로운 피조물로서 과거 불순종의 자식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