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 2015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 2:15-21)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 2:15-21)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
이민교회를 오래 목회 해온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교인의 생활형편이나 삶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교인이 그를 찾아와서 “이건 목사님께만 말씀드리는 거니까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라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말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목사님에게만 말을 하지 않고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할 것인데, 나중에 얘기가 퍼져나가 곤란해지면 목회자를 탓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삶에 대해서 묻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목사님이 그 교인의 삶을 알고 있는데, 혹시도 감추고 싶은 그 교인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목사님은 입도 뻥끗 한 적이 없는데, 가장 먼저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대상이 목회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말이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와 교인이라는 신뢰의 관계가 무너져 내린 현상이기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전에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교인 가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아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요즘은 이것이 자랑이나  덕이 아니라 흠이나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일의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신앙적인 완전을 추구한 사람인데 선행과 고행을 통하여서도 마음에 평안은커녕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피가 흘러도 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내리던 그에게 문득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후에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였고, 이 말씀을 붙잡고 면죄부(免罪符)를 팔고 있던 타락한 카톨릭 세력에 맞서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저술한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를 발견하고 설교하였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기독교가 혼탁된 정치와 화합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설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대신에 바울을 반대하던 초기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복음인 ‘믿음 뿐 아니라 율법과 할례’의 교리를 약간 변형시킨 ‘믿음, 선행과 영세’라는 카톨릭의 구원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행이 부족하여 죽어서 아직 낙원에 이르지 못하고 연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 자녀들이 면죄부를 살 때 연옥에서 옮겨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을 회개할 기회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윤리’에 근거를 두고 구원을 판단합니다. 따라서,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구원의 근거로 착각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이 여겨지고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시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시험꺼리로 교회 봉사를 뜸하게 하고 있을 때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였는데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습니까?
이러함에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함이 믿음입니다.
아직은 그 약속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우리의 바라는 것들이 우리의 ‘고백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reality)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proof)라”(히 11:1)고 말씀하는데, 나의 바라는 것이 구원일 때 믿음은 이를 실현되게 하는 힘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안디옥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냐 아니면 할례(또는 세례)나 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dietary law)를 포함하여 율법을 지켜 행함도 필요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나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흔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구분하여 말하는 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면에서 ‘죄인'(sinners)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취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주장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설령 유대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요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 죄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칭(自稱)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의 율법 지킴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3절143편 2절에서, 그리고 이를 인용한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한 대로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한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이라고 번역한 구절의 헬라어 성경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υ Χριστου)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한글 성경과 같이 사람(=우리)이 믿음을 고백하는 주체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고백의 대상으로 보는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체가 됨이십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신실하심,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이신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해석함이 무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믿음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칭의와 구원의 길(=방법)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율법은 다만 유대인들에게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구원을 위한 부차적인 조건도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평생에 율법을 지키거나, 윤리적이거나, 선한 삶을 살거나,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3)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4)고 말씀하십니다. 그 강도는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면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 죄인과는 달리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여서 율법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판단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그들로 죄 짓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계속 지키거나 버리거나를 불문하고 그들 유대인들도 원래부터 (이방 죄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죄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완전한 율법 지킴으로 의로와지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까닭입니다.

18절: 만일 우리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복음으로, 할례나 식사 규례(dietary law)나 기타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있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선언한 사람입니다.
하기에, 야고보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도 좋다고 권고할 때 이를 바른 것으로 여겼었고, 베드로가 유대인의 식사 규례를 버리고 이방인과 식사 자리에 같이 어울림을 옳게 여겼었습니다.
베드로가 버렸던 식사 규례를 야고보에게서부터 온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다시 세우고자 했을 때, 이를 외식하는 행위로 여겨서 그를 면책하였던 바울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가 헐었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와짐’을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의롭게 되는 한 방법으로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고 세운다면 이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역설(力說)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전에는 율법의 절대성과 온전성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후에는 율법은 그에게 칭의와 구원을 줄 수 없고 다만 그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수단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갈 2:16, 3:22; 롬 3:20).
바울이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씀함은 (칭의를 위한) 율법의 효력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고 함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나의 죄와 죄인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이 깨닫게 하는 죄를 향하여 죽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향하여 살기로 작정합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절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에서 헬라어 ‘순에스타우로마이’(συνεσταύρωμαι)는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나니”입니다. 일회적(一回的)인 못 박힘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못 박혀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συνεσταυρώθη)의 헬라어 시제는 부정형(aorist) 수동태로 일회적(一回的) 사건을 가리킵니다. 죄의 종노릇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갈 5장 24절 참고).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역사하시기 위하여서는 매일 매순간 ‘나의 (죄에 노출되기 쉬운) 자아’를 못 박는 작업을 반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6:24; 마가 8:34).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의 자아도 매일 매순간 죽기에 나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주장도, 생각도, 고집도 모두 죽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안에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해서 간구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의 삶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의 고백이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추가로) 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의 공생애도 헛되고 죽음은 더 더욱이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할례(=세례)로 말미암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믿음은 우리의 수고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 믿음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4-5절에서 바울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노라.”고 신앙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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