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 2015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 (갈 2:6-10)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 (갈 2:6-10)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고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썼노라.
 

1
한국에는 참으로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블록에 교회가 일곱 여덟 개가 몰려 있고, 심지어는 사오 층으로 된 건물의 삼층에는 장로교회, 이층에는 감리교회, 지하에는 성결교회 식으로 교회가 삼 사 개까지 있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선 교회를 제하고 그 후에 들어선 두 세 개의 교회는 분명히 기존 교회의 사역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외국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고 처음 입국하였을 때, 그들은 선교대상지역을 분할하였다고 합니다. 해서,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맡고, 평안도, 경기도, 서울과 경북은 미국 북 장로교회, 전라도는 미국 남 장로교회, 황해도와 충청도는 미국 북 감리교회, 강원도는 미국 남 감리교회, 그리고 경남은 호주 장로교회가 각각 맡아서 복음전도의 사역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했는데, 요즘의 교회들의 생기고 없어짐에 있어서 성경적인 사역의 원리는 전혀 무시되고 장사꾼의 원리가 적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소문이 난 지역에는 교회가 한 두 개로 시작하여 갑자기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납니다. 한국에서는 분당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분당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고 있어도 작은 교회들이더니 분당에 세워진 교회들이 잘 된다고 소문이 나니까 기존의 큰 교회들도 분당에 대형교회를 짓고 그쪽으로 이사합니다. 이사해도 교인들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것은, 한국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얻은 목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는 두 세 시간도 멀다 않고 와서 그 ‘유명한’ 분의 ‘유명한’ 설교 듣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 그로 인하여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교회가 없던 곳에 무명의 개척 교회를 시작한 목사님은 이 대규모의 유명세 앞에 맥을 못추고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소수의 교인마저 빼앗겨 버리고 사역의 근거를 잃어버리고 고군분투하거나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사가 잘 된다고 소문난 지역에서 기존에 소규모로 장사하던 소규모의 가게들이 대형상가가 들어섬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는 현상과 같습니다.

한국사람들의 교회 세움의 열심은 미국의 이민 사회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에는 한인교회가 1,000개를 넘어서 1,500개를 향하여 달리고 있고, 뉴욕 시에만 7-8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고 하고, 뉴저지 주와 같이 작은 주에도 300개 가량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한 지역에 기왕에 세워진 여러 교회들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주는가 하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한 조그만 지역에 여러 교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 사람들의 주장이 맞지 않아 둘로 나뉘고 또 나뉘어진 교회 안에 서로 화합할 수 없고 내분이 생겨서 또 다시 다른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람의 생각과 주장으로 교회가 갈리고 세워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복음전파의 유효성은 긍정적인 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1:15),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인 까닭에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고 그들이 각각 달리 전파하는 동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전파되어지는 대상이 그리스도인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같은 지역에 한인 교회가 여러 개 있는 것의 또다른 긍정적인 면으로서는 나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선택할 폭이 그만큼 넓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믿는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만을 풀이하여 설교하기를 원하는 목사님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기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한 타운에 교회가 여럿 존재하는 정당성은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각각이고, 그들이 원하는 예배 형태가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에 비하면 변두리의 무명한 사역자였습니다. 아직도 예루살렘의 사도들 중에서 그리고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은 입장이었습니다.
변두리의 무명한 사역자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신 것과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개척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친 갈라디아지방의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이 원래 사역자인 자기의 말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들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사람들 편에 전하는 한 마디는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그들이 이제까지 듣고 배운 복음도, 말씀의 가르침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오히려 순수한 열정으로 그 교회 교인들에 말씀을 준비하여 교인들에게 전하려고 하는데 이는 듣지 않고 먹지 않으려 하며,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소위 유명한 목사님의 그와 무관한 (방송이나 테이프를 통하여 들은) 설교는 대단하게 들리고 그 설교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 전혀 상관이 없는 유명한 목사의 설교가 그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그의 신앙의 삶에 부담을 주지 않고 다만 재미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6절: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하다는 이들”(ʾαπὸ τών δοκούντων)이 누구인가 하면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본절을 보면, 바울이 이들의 유명세를 폄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바울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고 그들의 파견자를 자칭한 사람들에 의하여 갈라디아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의 마음이 동요됨을 안타까이 여김입니다.
요즘도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LA) 등 큰 도시에서 한인 교회들의 연합 집회의 설교자로 한국의 유명 교회들 중에 목사님을 초청합니다. 그리하면, 유명하다는 그분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수천 명이 모여드는데, 이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는 그분이 오랜 경륜에서 나오는 유머나 경험을 듣고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지 그분이 잘 알지 못하는 (혹은 피상적으로 아는) 그 지역 이민 교회들과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를 구석구석 지적하여 교회들과 성도들을 각성시키는 말씀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라고 말씀한 것은 이방 교회들을 복음 증거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바울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바울이 증거한 것 이외에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그 지방과 그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사정은 현재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괄호 안에 있는 말씀은 바울 자신과 그의 사역에 대한 변론입니다. 신명기 10장 17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말씀의 인용인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확신하기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 앞에서 기죽을 것이 없습니다.
그의 학벌이나 과거야 어쨋든 현재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은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건, 교인들에게 어떤 푸대접을 받았건, 한국적인 상황에서 큰 교회 목사님들은 떠받듦을 받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큰 교회 목사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듭니다. 사정,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큰 교회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과 능력이 나타나는 목회자요 자신은 변명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과 능력을 받지 못한 목회자라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목회와 말씀 증거에 확신이 없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시골의 작은 교회의 무명한 목회자였지만 서울의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회자와 같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이는 그의 사도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가 전하는 복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음에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지를 쓰는 지금도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유명세를 따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7-8절: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역들과 교회들을 위해 사역자들을 택하시고 직임을 맡기실 때, 현재 능력이 많은 한 사람에게 모든 교회들을 감독하고 사역하게 하지 않으시고 각각의 교회의 사정에 따라 각각의 목회자를 정하시고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능력이 많은 유명한 목사님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작은 교회의 사역에 관한한 그 작은 교회의 사역자보다 나을 수 없고, 그 작은 교회의 사역자는 그에게 그 교회를 위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능력에 따라서 달란트를 허락하시어 경영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큰 교회는 큰 교회 나름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주신 달란트의 사명에 감사하고 이를 잘 경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할례자들--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그에게는 무할례자--이방인들--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바울을 얕보고 그의 일을 무시할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충실할 것이며, 바울은 베드로를 시기하고 그 앞에 주눅들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것입니다.

   9절: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던 바울을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 삼으신 것이 바울을 향하신 주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둥(στύλος: pillar, column)은 교회라고 하는 건축물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στύλο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심한 비바람 속에서도 오랫동안 꿋꿋하고 흔들리지 않고 변치 않는 믿음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기둥이 되는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가 오랜 세월 동안 자라야 하되, 비비 뒤틀려서 오래된 것이 아니라 굵고 반듯하게 자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 굵고 반듯하고 꿋꿋한 기둥의 재목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속 건축물들을 확장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1-22절에서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둥은 없고 뒤틀린 잡목만이 있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립하기에 항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선 작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라도 기둥 몇 개는 반드시 필요한데, 바라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교회의 기둥이 되시고, 석가래가 되시고, 벽돌이 되시고 기타 필요한 구성자료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시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누가 더 잘났다 못났다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제의 악수”를 나눔은 상대방의 사역을 인정하여 주는 모습입니다. 각각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교통함이 필요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역할, 장로의 역할, 권사의 역할, 집사의 역할, 직분을 받지 않은 사람의 역할이 다르지만, 그 안에 갈등하고 반목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각기 다른 직분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서로 격려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직분의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의 사명과 직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각각 사역의 대상과 장소가 다르지만 그들이 공동으로 힘 쓸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구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교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기본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지만 헌금실적에 따라서 장로의 피택권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부자라도 인색한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바른 현상입니까?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서 가난한 자들도 포함할 것이지만 특별히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를 강압적인 당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중앙 상급기관의 한 마디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강제적 수행능력이 있는데 바울은 그 자신이 예루살렘의 기둥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의 사역이 그들이 감당하는 사역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확신하기에 그들의 부탁을 협조사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바울 스스로 가난한 자--특별히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당부 이전부터 그 일을 힘써서 행하여온 터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7-30절에 보면 바울이 본격적인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는 일을 감당했으며 바울의 삼차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 캠페인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았습니다(롬 15:25-27; 고전 16:1-4; 고후 8-9장).

3
성도들은 주님을 위한 각자의 사명을 하나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기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감당함은 나의 외적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과 계획이기에 나만의 특별하고 귀한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 각각 다른 직분들이 있습니다. 그 직분들이 서로 반목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연합할 것입니다. 이로써 나에게 독특한 직분과 달란트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경영할 것입니다.

그위에 크고 작은 교회들의 존립 목적과 그 각각 다른 모양의 교회 속에 나의 신앙생활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인식하여 나만의 평안과 안일 가운데 빠져들 것이 아니라 주위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달되어지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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