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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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에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한 지가 오래 되지만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학점을 신청하지 않고 청강(auditing)하는 학생과도 같습니다. 청강생은 숙제를 해가지 않아도 되고 리포트를 써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른 일이 있거나 바쁘면 빠져도 됩니다. 하기 때문에 수업을 듣는데 큰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담이 없는 만큼 수업에서 얻는 것도 없습니다. 청강생 교인도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한 부담이 없는 만큼 믿음의 진전도 없습니다.
두 번째는 남들이 받는 대로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은 지가 오래 경과되었는데도 직분은 절대로 받지 못하겠다고 우기는 교인이 있는데, 이러한 분은 Pass-Fail로 학점을 신청하는 학생과 같습니다. 규칙적으로 출석하고, 숙제도 하고, 리포트도 써내야 하지만 그렇게 큰 부담은 없습니다. 낙제 점수만 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Pass-Fail 교인은 주님의 일을 충성으로 감당하는데 악착같음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상급은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직분을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은 학점을 정식으로 신청한 학생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수업에 꼭 출석하여야 하고, 숙제도 꼬박꼬박 잘 해내야 하고, 리포트도 잘 써내야지만 좋은 학점(A 혹은 적어도 B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업을 듣는 학생이 A 학점을 원하듯이 직분자로서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은 하나님의 좋은 평가받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되고 충성되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이 사람은 A 학점의 직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칼리포니아의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세례등록교인이 120여명 정도에 주일 출석인원이 100여명 되는 비교적 착실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두드러진 특성은 직분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장로님 5명, 권사님 20여명, 집사님 70여명 해서 도합 98명의 직분자가 있었습니다. 120여명 등록교인에 직분자가 98명이니 교인 80% 이상이 직분자인 셈입니다. 혹자는 ‘뭐 그렇게 직분자가 많으냐?’고 할 것이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80% 이상의 교인이 정식 학점을 신청한 학생들과도 같이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존 에글렌(John Egglen)이라고 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콜체스터(Colchester)의 한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850년 1월 6일 주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다가 집사가 눈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는다면 평교인들은 교회에 가겠는가는 책임의식으로 1마일 이상을 눈보라 속을 걸어가야 하지만 교회로 향합니다. 예배시간이 다 되어 겨우 교회에 도착하였는데 교회현관에서 만난 다른 집사님이 난감한 소식을 전합니다. “에글렌집사님. 우리가 지금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설교하실 목사님이 오지 못하셨습니다. 교인들도 겨우 13명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배를 취소해야겠지요?!” “예배를 취소하다니요? 안됩니다. 목사님이 여기 도착하시지 못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이곳과 목사님이 계신 켈브돈 사이에는 눈이 6피트 쌓여 있습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겠습니 다. 참석하신 분들 모두 우리 교인들일 테니 제 실수를 용서해 주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저 구석에 앉아 있는 낯선 한 소년만 제외하고는 모두 다 우리 교인들입니다. 저 소년도 아직 어리니까 별 문제 없을 것입니다.”
에글렌은 전에 설교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 주일을 위해 설교를 준비한 것도 아니기에 단위에 올랐지만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직 본문에 충실하여 읽고 외칠 뿐입니다. 그의 설교는 10분 만에 한계에 달하고 말았습니다. 최초의 감리교인들처럼 소리치면서 에글렌이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고 설교했을 때, 그 열 세 명의 청중 중에 한 사람이었던 16세 소년,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은 그의 설교대로 그의 생을 통하여 늘 ‘예수님을 바라보기로’ 작정했고 그때 그곳에서 그의 마음의 구름과 어둠이 걷혀지고 태양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훗날 영국을 뒤흔들고 세계를 변화시킨 대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회심은 이와 같이 설교를 처음 해보는 스스로 ‘참으로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한 집사님의 덕분이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우리의 능력과 달란트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여겨지더라도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이를 통하여서도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자 할 때, 우리의 푯대 되시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축복하십니다.
2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당시의 어려운 상황과 박해에서 초기에 그들이 가졌던 믿음의 열정과 열심이 식어져서 지치고 포기의 상태에 있던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인내함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라고 독려(督勵)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5-3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그리스도)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감당할 것은 그리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커다란 상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앞서서 많은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상 주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한 까닭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삶을 견고히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환경을 바라볼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적당히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것도 아니라 신실하고 견고한 믿음의 삶을 살다가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함은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하고 지칠 대로 지쳐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고 경주에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함입니다.
11장에 언급한 바대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기생 라합, 기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다른 선지자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믿음의 잘 살다가 갔습니다.
‘내가 너무 지쳐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 중에 믿음이 변변한 사람이 없어서 내 믿음도 이 모양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믿음의 선진들의 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죽어서 심판대 앞에 이르렀습니다. 한 천사가 그를 맞으며 금빛 나는 책 한 권을 보여줍니다.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대의 삶을 기록한 책이니라.” 아마도 행위록이었을 것입니다(계 20:12 참고).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책의 첫 장을 넘깁니다. 거기에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대가 저지른 악한 행동들(acts)이지. 참으로 많기도 하구나.”
천사가 다음 장으로 넘깁니다. 거기에는 먼저 장보다 더 많은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건 너의 입에서 나온 악한 말들(words)이다. 조금 전에 본 행동들보다 많지? 사람은 본래 행동들보다 말로써 더 많은 죄를 짓게 마련이지.”
그는 두려웠습니다. 다음 장으로 넘기니 거기엔 더욱더 촘촘하게 기록된 것이 보입니다. “이건 무엇입니까?”
“이건 너의 머리 속에 있던 악한 생각들(thoughts)이야. 엄청나구먼. 하긴, 사람이란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게 많으니까.”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하느냐고 천사에게 묻습니다. 천사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다음 장으로 넘깁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밤처럼 페이지 전면(全面)이 온통 검게 칠해져 있습니다.
“이건 너의 마음(hearts)이다. 검은 마음에서 그 모든 악한 생각이며 말이며 행동이 나온 것이다.”
우리의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오는데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경주를 달리기를 원하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매고 있는 무거운 것이요 얽매이기 쉬운 죄들입니다.
경주를 잘 달리기 위해서 운동선수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가볍게 만듭니다.
달리기 경기를 여름에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최소한의 옷--팬츠와 런닝--만을 걸쳐야 최상의 기록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실내시설이 잘 갖추어져 겨울에도 달리기 경기를 할 수 있는데 여하튼 선수는 최상의 기록을 위해서 팬츠와 런닝셔츠 이상의 것은 입지 않습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에는 두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해변가를 달립니다. 그러나 경기 당일에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 선수는 무겁고 그의 발목을 얽매는 모래주머니로 인하여 좋은 기록은커녕 제대로 달리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날씨가 쌀쌀하다고 하여 오버코트를 걸치고 달리기를 하는 선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리기 위해서는 모래주머니와도 같이 무겁고 우리를 조이는 죄와 허물의 짐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전력으로 달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사단은 속삭입니다. ‘네가 아무리 잘 달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네 모양을 봐라. 온통 죄 투성이인데 목적지에 이른다고 한들 하나님이 너를 받으실 것 같으냐?’ ‘네가 무슨 수로 그 험한 길을 달리겠어? 달리다가 중간에 기권하지 말고 처음부터 뛰지 않는 것이 상책이야.’ ‘오늘만 날이냐?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천천히 뛰지 그러냐?’ 사단은 우리의 죄의 무거운 짐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며, 평안과 나태의 끈으로 우리의 발을 얽매이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도 믿음의 삶을 산 증인들을 생각하면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달리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출발선 상에 있지 않은 사람은 지금이 달리기를 출발할 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먼 거리를 달리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어.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나는 너무 약해.’라고 할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력으로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앞에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시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의 표현--τὸν τής πίστεως ἀρχηγὸν καὶ τελειωτὴν ʾΙησούν--은 “믿음의 시작자(originator, pioneer, beginner)요 완성자(perfector, finisher)"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의 시작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구약에 많은 믿음의 삶을 살아간 선진들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9-4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체요 온전케(=마치게) 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증거들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마침점(period)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합니다. “바라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라오(ἀφοράω)는 “눈을 ...에 고정시키다"(fix one's eyes on"란 뜻으로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호세아서 12장 6절에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거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는데 하늘의 상급을 사모하여 지상에서의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그가 바라보는 상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은 그분 스스로가 바로 믿음의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순종의 믿음”을 보이시고, 죽음에 이르셔서도 아버지를 바라보고 신뢰하심으로 “신뢰의 믿음”의 본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이 세상의 삶을 사실 때 소망 중에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바라보시고 이로써 그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로 “소망의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의 즐거움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고통이 있을 때에 그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함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당하신 수치 중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게 하는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그 믿음의 결국이 어떻습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삶을 사실 때 그를 높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고 하는 영광의 자리에 앉히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때 우리를 높이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에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선포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앞서 가시는 우리의 푯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만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낙심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는 풍랑이라고 하는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잠시 후에 다시 거친 환경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는다는 불가능을 생각하였을 때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단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환경과 나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게 함으로 ‘나는 안 돼’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나의 믿음의 경주와 봉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있을 때에도 그를 거역할 때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중에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다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의 연약함에서 돌이켜,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달리기를 원하십니다.
3
어떠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달려갑니까?
달리는 일에 힘들어 있습니까? 우리의 앞서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달려갈 길을 마쳤을 때 어떤 상급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전심과 전력으로 달리시되 바울이 사모한 의의 면류관을 여러분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고 (주님으로 향한) 열정이 샘솟듯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것 같이”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기를 원하는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능욕과 세상의 거친 환경도 개의치 아니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을 높이 드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신(엡 1:20-21 참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의 경주에서 온전히 승리하는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실 것입니다(엡 2:5-6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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