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成熟)한 감사” (하박국 3:16-19)
1
저는 예수님의 기적들 중에 남자 장정만 5,000명(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좋아하고, 비유들 중에는 ‘달란트의 비유’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도 제가 경제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과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인간구원(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경제계획의 놀라우신 비밀과 우리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한 미국 목사님이 ‘달란트의 비유’를 현대판으로 개작하여 표현하였는데 미국사람의 정서에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 실정에 맞게 제가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한 회사의 사주(社主)이며 최고경영자(ceo: chief executive officer)인 사람이 6개월 간 외국여행을 떠나면서 세 사람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과 과거의 실적에 비추어, 첫 번째 사람에게는 50,000불을 주면서 ‘자네의 능력대로 이 돈으로 무언가 해보게’ 말했습니다. 또 두 번째 사람에게는 2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사람을 불러서도 10,000불을 주면서 똑같은 말로 당부하였습니다.
50,000불을 맡은 직원은 시장조사를 철저히 한 후에 50,000불로 컴퓨터 및 부품 판매 대리점을 차렸는데 사업이 잘되어 점포를 하나 늘이고, 또 하나를 늘일 수 있었습니다. 20,000불을 맡은 사람도 시장조사를 잘 한 후에 인터넷을 이용한 옷장사를 하였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0,000불을 맡은 사람은 경영주의 돈으로 사업을 했다가 혹 실패하여 돈을 잃기라도 하면 힐책을 당할까 두렵기도 하고,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벌여놓은 일이 많아 시간도 별로 없을 것같아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가 거래하는 은행에 있는 안전보관함(safe-deposit box)에 경영주가 그에게 맡긴 10,000불을 고스란히 집어넣었습니다.
6개월 뒤에 경영주가 돌아와서 그가 돈을 맡겼던 직원들을 부릅니다. 50,000불을 맡겼던 직원에게 묻습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그 돈으로 무엇을 했나?” 그 직원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컴퓨터 대리점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번창하여 50,000불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열심히 사업을 구상하고 확장시킨 자네가 마음에 드네. 나의 사업 파트너가 되어주게. 이제부터 자네는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나의 동업자(partner)이네.”
다음에는 2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네, 저는 요즘 인터넷 장사가 유망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인터넷을 이용한 옷 판매를 하였는데, 지난 6개월 간 20,000불의 순이익을 남겼습니다.” “참 잘했네. 그렇게 독창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성실로 일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이제부터는 자네를 직원(employee)이 아니라 동업자(partner)로 대하겠네. 내 동업자가 되어주게.”
마지막으로 10,000불을 맡았던 직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저는 사장님이 안 계신 동안 제 마음대로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이다가 혹 손해를 보면 사장님이 노하실 것 같아서 사장님의 돈을 안전한 저의 은행의 금고함에 넣어두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장님이 저에게 주셨던 지폐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경영주는 그에게 말합니다: “자네가 나를 잘못 보았네. 만약 자네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손해를 보았더라도 자네가 그 일을 열심히 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더 기뻐하였을 것일세. 자네가 그렇게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다면 적어도 나를 위해서 이 돈을 6개월짜리 CD(certificate deposit, 정기예금)로라도 은행에 예금하였더라면 내가 5% 이자 수입은 얻었을 것 아닌가? 자네는 무사안일주의의 사람이구먼. 자네는 사업하기에 적합지 않으이. 자네를 직원으로라도 두고 싶은 생각이 없네. 우리 회사를 떠나게.”
이 비유에서 경영주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의 회사는 그의 교회이고, 직원들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가 맡긴 돈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이며, 직원들에게 원한 사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시장조사를 하였다’고 함은 주님의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감당하다가 혹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해보는 것이 두려워서, 비난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일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는 혹 실패하고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열심히 주인의 일을 자기 일같이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을 더욱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교회 일이나 교회 안의 기관의 일이 이 비유에서 경영주가 그 직원들이 감당하기를 원했던 사업입니다.
교회 또는 기관의 사업을 감당할 때 우리는 그 일이 바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과 성실로 창의적으로 기도하며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기관은 사람이 적어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십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아니면, 다섯 명이면 적은 숫자입니까?
열심있는 다섯 명으로 못 이룰 사업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그의 나이 35세를 전후하여 다메색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래 30여 년을 주님의 사업을 경영하였지만 늘 두 세 사람, 많아야 십명 안팎의 사람들과 동역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실라, 바울과 디모데 등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경영하는 비결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가? 나에게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업 파트너로 삼으시고 같이 일을 해나가고 사업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도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아니라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며, 실패와 고난을 통하여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추수감사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여 마땅히 거둘 바를 거둔 사람이 이를 거둘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허락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혹 수확이 나의 노력과 예상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함은 수확이 전혀 없을 수도 있는데 이만큼이라도 허락하신 데 대한 감사입니다.
추수철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버려 수확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어도 좋습니까?
성경은 이럴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하는(thank God)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think God) 사람이요, 이러한 사람에게 종국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평안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2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박국의 감사를 봅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 경에 살았던 남방왕국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악이 관영(貫盈)하고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는 유다를 갈대아인을 들어 징벌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은 또,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며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인 갈대아인(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징벌하려고 하시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이 장차 속히 다가올 것인데, 그때에 모든 악인은 그들의 악으로 징벌되고, 의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에 하박국은 3장에서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찬양의 기도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고 했습니다.
갈대아인을 들어 유다를 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심한 두려움에 쌓입니다.
갈대아인의 무리가 유다 백성을 치러오는 환난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기에 그의 뼈속까지 두려움이 저미어오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의 집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보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떨리고 또 떨립니다.
임박한 환난으로 인한 그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갈대아인들이 유다를 유린(蹂躪)할 때 예루살렘의 집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며 산과 들과 밭은 황폐케 될 것입니다.
그때 무화과나무는 무성치 못할 것이며,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상실( total loss)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실의 슬픔과 고통으로, 낙담함이나 좌절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늘 평안하고 고통이 없고 좌절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 하기에 때로는 더욱 큰 고통을 받고, 슬픔을 당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은 거기서 그저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줄 압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무력감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화(昇華)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감사와 기쁨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한 몇 가지 일로 인하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잠간의 감사와 기쁨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외형적인 환경으로 따지면 하박국에게는 감사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현재 악인의 번성함을 보며 고통 당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앞으로 그와 그의 조국 유다에게 일어날 일이란 기쁨이나 즐거움하고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가 바라보는 감사의 조건들은 이 세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까닭입니다.
이 세상의 감사의 조건들이 순간적인 것에 불과한 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의 조건들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한 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는 내가 다 잃은 사람이요, 고통중에 있는 사람이요, 절망에 쌓여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때에도 내게 감사함이 넘쳐남은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무거운 짐을 벗기신 까닭이요, 내게 구원의 즐거움을 베푸신 까닭이요, 내 앞에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기쁨을 두신 까닭입니다.
이를 믿으시고 소망하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과 찬양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신앙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의 근원은 세상의 권세도 재물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주장하시매 나에게 힘이 샘솟습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사슴의 발은 가볍고 빠릅니다.
여기에 낙담하고 좌절하여 주저앉아버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슴과 같은 민첩한 발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높은 곳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곳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 땅에서 그 동포 히브리인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땅에 피하여 40년을 죽은 듯이 소망도 없이 지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은 곳,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엘리야가 850인의 이방 선지자들을 물리쳤지만, 악녀(惡女) 이세벨의 말을 들었을 때 낙담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하여 유다 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두려움으로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편기자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부르시되, 하나님의 거룩하신 산 시온에 오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갱신하기 위함이며, 이제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케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를 지킨 그의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이 세상의 갇힘으로부터 자유케하시며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도(now and here)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셔서 우리로 그의 성산(聖山)에 올라 소망(所望) 중에 하나님과 교통케 하십니다.
3
오늘 본문의 하박국은 사람의 눈에는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양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바울은 매맞음 가운데, 갇힘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상실로 인한 슬픔이 있을 수 있으며, 헐벗음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있으며, 절망 중에 하나님께 원망을 발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아주 쓰러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 소망을 발견하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혼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감사를 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 같은 성숙(成熟)한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November 24, 2013
Sunday, November 17, 20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1
대머리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있었습니다. 낙관주의자인 대머리의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역시 대머리는 좋아요. 우리는 힘들여서 머리를 빗질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자 비관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아, 하지만 우리는 씻어야 할 얼굴이 너무 넓지 않소?"
비관주의자는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릴 것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어제가 오늘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오늘도 좋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벌을 보고 사람을 쏘는 곤충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꿀을 만드는 곤충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게 슬프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현재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선 속에서 악을 찾고, 낙관주의자는 악 속에서 선을 찾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난데 신체적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냉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요 시인인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 역시 다리를 절었지만, 생활태도는 바이런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 불평을 해댔습니다. 스코트는 정반대였습니다.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한 번은 바이런이 스코트를 만나게 되자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모두 주겠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장애에 대해서 서로 반응이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빌미로 방탕한 생활방식을 택했으나,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부자유함을 감사와 기쁨으로 승화시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수도원 원장은 부지런히 수도원을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손님이 당도하자 원장은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왠지 울적하고 심각해 보였습니다. 구경을 모두 마친 손님과 원장이 접대실로 들어섰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수도원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장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되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원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시간에 맞게 기도하고 일하고 있으며, 수도사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손님이 말했습니다.
"기쁨입니다. 기쁨이 빠지고 나면 기도와 봉사도 고역이 되고 마는 법이지요."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2
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모순되고 상반된, 정반대의 단어의 결합(combination of contradictory words)이라고 사전에 해석된 이 말은 예리하고 총명하다는 뜻의 헬라어 ‘oxys’(sharp)와 어리석고 바보 같다는 뜻을 가진 ‘moros'(foolish)의 합성으로 그 어원자체가 상충하는 두 단어의 결합이며,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합성시켜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하며, 단어에 감정을 불어넣어 언어에 맛과 멋을 내는 독특한 비유법입니다.
예를 들면 'open secret'(다 아는 비밀), 'bitter sweet'(씁쓰르 달콤한), 'cruel kindness'(끔찍한 친절), 'thunderous silence'(천둥칠 것 같은 침묵),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들고 고된 상태),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등이 있습니다.
3절은 옥시모론의 절정을 이루는 표현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
재대신 화관, 슬픔대신 희락(=기쁨)의 기름, 근심대신 찬송의 옷, 이 얼마나 멋있는 옥시모론적 은혜와 영광의 장면들입니까?
바울의 서신에도 옥시모론적인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세상적으론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인내(perseverance)를 생산해내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 된 성품과 인격(character)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그 변화된 인격으로 온전한 소망(hope)을 품고 일어서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것”, 이것이 희락의 기름이 있는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옥시모론적인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안수하실 때 성령의 열매인 기쁨(=희락)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신이 아담과 하와를 떠날 때 사라졌던 그 기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사람의 기준으로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만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슬픔이 있으며, 고통이 있으며, 근심이 있지만, 내 영혼이 구원받음을 알기에,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주님 되심을 알기에 오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기록된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라”(Πάντοτε χαίρετε)에서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의 명사형 카라(χαρά)가 희락 또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삶은 우리 먼저 믿은 성도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나중 믿은 자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더하여줄 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 걱정과 근심과 고통으로 삐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락의 기름을 발라서 원활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름통을 들고 다니던 괴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다 삐걱대는 문이나 뻑뻑한 출입문이 있으면 경첩에다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의 기름 바르는 습관은 그의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문제들 때문에 삶이 심하게 삐걱거리고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락의 기름으로 그들의 삶에 발라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몇몇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가지고 있어 기름 역할을 하는 한 마디의 동정적인 말을 그리워합니다. 낙망하여 포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기름 한 방울 같은 말이 그들의 희망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습니다.
비열하고 죄로 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친절이라는 기름을 정기적으로 발라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순응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일 어디에서나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함께 기쁨의 기름을 가지고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
1
대머리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있었습니다. 낙관주의자인 대머리의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역시 대머리는 좋아요. 우리는 힘들여서 머리를 빗질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자 비관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아, 하지만 우리는 씻어야 할 얼굴이 너무 넓지 않소?"
비관주의자는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릴 것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어제가 오늘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오늘도 좋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벌을 보고 사람을 쏘는 곤충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꿀을 만드는 곤충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게 슬프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현재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선 속에서 악을 찾고, 낙관주의자는 악 속에서 선을 찾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난데 신체적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냉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요 시인인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 역시 다리를 절었지만, 생활태도는 바이런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 불평을 해댔습니다. 스코트는 정반대였습니다.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한 번은 바이런이 스코트를 만나게 되자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모두 주겠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장애에 대해서 서로 반응이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빌미로 방탕한 생활방식을 택했으나,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부자유함을 감사와 기쁨으로 승화시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수도원 원장은 부지런히 수도원을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손님이 당도하자 원장은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왠지 울적하고 심각해 보였습니다. 구경을 모두 마친 손님과 원장이 접대실로 들어섰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수도원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장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되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원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시간에 맞게 기도하고 일하고 있으며, 수도사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손님이 말했습니다.
"기쁨입니다. 기쁨이 빠지고 나면 기도와 봉사도 고역이 되고 마는 법이지요."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2
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모순되고 상반된, 정반대의 단어의 결합(combination of contradictory words)이라고 사전에 해석된 이 말은 예리하고 총명하다는 뜻의 헬라어 ‘oxys’(sharp)와 어리석고 바보 같다는 뜻을 가진 ‘moros'(foolish)의 합성으로 그 어원자체가 상충하는 두 단어의 결합이며,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합성시켜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하며, 단어에 감정을 불어넣어 언어에 맛과 멋을 내는 독특한 비유법입니다.
예를 들면 'open secret'(다 아는 비밀), 'bitter sweet'(씁쓰르 달콤한), 'cruel kindness'(끔찍한 친절), 'thunderous silence'(천둥칠 것 같은 침묵),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들고 고된 상태),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등이 있습니다.
3절은 옥시모론의 절정을 이루는 표현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
재대신 화관, 슬픔대신 희락(=기쁨)의 기름, 근심대신 찬송의 옷, 이 얼마나 멋있는 옥시모론적 은혜와 영광의 장면들입니까?
바울의 서신에도 옥시모론적인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세상적으론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인내(perseverance)를 생산해내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 된 성품과 인격(character)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그 변화된 인격으로 온전한 소망(hope)을 품고 일어서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것”, 이것이 희락의 기름이 있는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옥시모론적인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안수하실 때 성령의 열매인 기쁨(=희락)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신이 아담과 하와를 떠날 때 사라졌던 그 기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사람의 기준으로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만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슬픔이 있으며, 고통이 있으며, 근심이 있지만, 내 영혼이 구원받음을 알기에,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주님 되심을 알기에 오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기록된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라”(Πάντοτε χαίρετε)에서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의 명사형 카라(χαρά)가 희락 또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삶은 우리 먼저 믿은 성도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나중 믿은 자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더하여줄 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 걱정과 근심과 고통으로 삐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락의 기름을 발라서 원활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름통을 들고 다니던 괴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다 삐걱대는 문이나 뻑뻑한 출입문이 있으면 경첩에다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의 기름 바르는 습관은 그의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문제들 때문에 삶이 심하게 삐걱거리고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락의 기름으로 그들의 삶에 발라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몇몇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가지고 있어 기름 역할을 하는 한 마디의 동정적인 말을 그리워합니다. 낙망하여 포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기름 한 방울 같은 말이 그들의 희망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습니다.
비열하고 죄로 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친절이라는 기름을 정기적으로 발라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순응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일 어디에서나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함께 기쁨의 기름을 가지고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
Sunday, November 10, 2013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 (로마서 9:19-29)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 (로마서 9:19-29)
1
세상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삽니다. 뚱뚱한 사람과 홀쭉한 사람,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백인, 흑인, 황색인등등...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외모와 조건, 인생항로에 만족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들과 정신박약아 및 지진아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우리 일행의 방문을 조금도 반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함을 알고 그들이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의 그늘지고 일그러진 표정뒤에 감추어져있는 아름다운 속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러앉아 같이 찬송하고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서로 간증하였습니다.
다음주일 저녁예배에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특송을 부탁하였는데 그들이 부른 찬송가는 세상의 어떤 유명한 합창단의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은혜스럽게 들렸습니다.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
그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의 손으로 그들의 고통받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계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저들에게 처소를 예비하여주시기 위해서 하늘로 먼저 올리우셨습니다. 하늘의 처소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정박아나 지진아보다는 형편이 낫지만, 참으로 어려운 환경과 사정을 가지고 이 생을 살아가는 성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거쳐가는 역려과객(逆旅過客)의 삶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 중에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모습은 감사와 찬송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흙 한덩이로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긍휼의 그릇의 삶입니다. 우리의 외모나 형편은 우리가 여행자로서 입고있는 옷에 불과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이를 영원한 가나안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한 옷으로 덧입을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모습과 환경속에서 맡겨진 달란트를 잘 경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바울은 본문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다른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과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반박인즉 하나님은 이미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15-18절에서 하나님의 공평-불공평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긍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과 긍휼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렸다고 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히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이유없이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공평원칙(公平原則)에 따른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무언인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나에게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하면, 금방 원수가 되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대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어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른 아침에 포도원 집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품군들과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아침 9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이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합니다. 12시와 3시에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오후 5시에 다시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서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데려다가 일하게 합니다
날이 저물어 품삯을 계산할 때,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먼저 온 자들이 생각할 때, 그들은 더 많은 시간 일하였으니까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줄로 기대하였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은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자기네들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왜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와서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품삯을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는 약속을 어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처음 데려올 때 한 데나리온 주기로 약속하고 데려왔으니 약속대로 준 것이고, 늦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마음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방법대로 하자면, 분명히 잘못된 품삯계산 방법이지만, 이것이 심판날에 하나님이 우리와 하실 계산방법이라고 할 때,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의대로 하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세상의 윤리와 도덕 기준에서 착하게 산 사람이 사형 당하기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형수보다 우선적으로 천국에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던 한 유대인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옥행을 명하십니다. 그때 그가 눈을 들어 낙원을 쳐다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가 예수님 곁에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저 자는 사람을 죽인 강도인데도 낙원에 들어갔는데, 매주 공회에 나가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잘한 저는 왜 지옥행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너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느냐? 너희 인간은 불완전하여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데, 저 사람은 바로 그 길을 택한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워놓은 가치판단과 공평의 척도를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기준대로 이행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義)-불의(不義)의 기준은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3
바울은 본문에서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을 강조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그릇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공평-불공평, 의-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불평합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고, 어찌하여 사람들을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20절에서 반문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하겠느뇨?”
바울은 하나님-인간, 즉,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그 진흙 한 덩이가 어떤 용도의 그릇으로 빚어질까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갖고있는 절대권(絶對權)을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을, 또 다른 한 덩이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더라도 이는 온전히 그의 소관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만든 그릇이 마음에 안들어서 부숴버리더라도 진흙 한 덩이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진흙덩이가 토기장이의 뜻을 거스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拒逆)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빚어지는 진흙덩이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의 용도(用途)에 따라 빚는 것이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이렇게 빚어달라 저렇게 빚어달라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10장 15절에서,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 있는 체 하는 우리의 모습이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내 뜻에 따라 오라 명하는 삶을 살려고 함을 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잘못된 믿음의 모습입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잇는 체 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와 다르신 것은,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이 귀히 쓸 그릇도 천히 쓸 그릇도 아닌, 볼품없이 잘못 만들어진 것일 때 그대로 부숴버리지만, 하나님은 그가 만든 인간이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아닌-- 긍휼의 그릇이 아닌--잘못 만들어진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했습니다 (22절).
요나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하고 음란한 니느웨성의 사람들은 분명히 잘못만들어진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릇도 하나님은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사람들은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또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준비되었던 진노(震怒)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6-10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를 떠나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 긍휼을 거두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예비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야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27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란 적다는 뉴앙스를 줍니다. 해서, 몰몬(Mormon)이나 말일성도(末日聖徒) 교회 교인들은 자기네 숫자에 들어오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란, 숫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께 있는 믿음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구원에 합당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과연 얼마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통한 영광나라의 삶이 얼마나 확신 있게 실감됩니까?
설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믿음이 구원받기에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시더라도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도 어여쁘게 여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4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각각 진흙 한덩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의 목적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가진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시간이 많으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을 터인데 합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시간과 물질적 조건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물질이 주어져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 금액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의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를 주님의 용도에 따라 주셨습니다. 어떤 이는 좀더 많이, 또 어떤 이는 좀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히 쓸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뚝배기는 뚝배기 나름대로 특별한 용도가 있듯이 천히 지음 받은 그릇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지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아니, 우리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니느웨성의 사람처럼 주님께 회개하고 나아감으로서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어떠한 그릇으로 지음 받았든지, 우리는 다 약하고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면--가난, 소수민족, 달란트 적음 등등--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것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단 둘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던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20세쯤 되었는데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기에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의지하여 이제까지 그래도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오죽이나 딱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 홀어머니는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첫째는, “제가 외로울까봐 20년 동안 저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허락(許諾)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했고, 둘째는, 이 세상보다 더 평안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불러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고, 셋째는, ”아들로 인하여 제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식으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시험꺼리를 거두워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불평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불평을 하게되고 감사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감사꺼리가 넘친다고 합니다.
장미 꽃을 보면서 한 사람은 그 꽃이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찬미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가시가 많다고 불평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입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귀한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나 생각해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세상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삽니다. 뚱뚱한 사람과 홀쭉한 사람,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백인, 흑인, 황색인등등...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외모와 조건, 인생항로에 만족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들과 정신박약아 및 지진아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우리 일행의 방문을 조금도 반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함을 알고 그들이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의 그늘지고 일그러진 표정뒤에 감추어져있는 아름다운 속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러앉아 같이 찬송하고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서로 간증하였습니다.
다음주일 저녁예배에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특송을 부탁하였는데 그들이 부른 찬송가는 세상의 어떤 유명한 합창단의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답고 은혜스럽게 들렸습니다.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
그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의 손으로 그들의 고통받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계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저들에게 처소를 예비하여주시기 위해서 하늘로 먼저 올리우셨습니다. 하늘의 처소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정박아나 지진아보다는 형편이 낫지만, 참으로 어려운 환경과 사정을 가지고 이 생을 살아가는 성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의 거쳐가는 역려과객(逆旅過客)의 삶이란 사실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 중에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모습은 감사와 찬송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흙 한덩이로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긍휼의 그릇의 삶입니다. 우리의 외모나 형편은 우리가 여행자로서 입고있는 옷에 불과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이를 영원한 가나안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한 옷으로 덧입을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모습과 환경속에서 맡겨진 달란트를 잘 경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바울은 본문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다른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과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반박인즉 하나님은 이미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15-18절에서 하나님의 공평-불공평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긍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과 긍휼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렸다고 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히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이유없이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공평원칙(公平原則)에 따른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무언인가 잘해주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나에게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하면, 금방 원수가 되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대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라,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어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른 아침에 포도원 집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품군들과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아침 9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이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합니다. 12시와 3시에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섰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오후 5시에 다시 장터에 가보니, 또 놀고 서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데려다가 일하게 합니다
날이 저물어 품삯을 계산할 때,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먼저 온 자들이 생각할 때, 그들은 더 많은 시간 일하였으니까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줄로 기대하였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은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자기네들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왜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와서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품삯을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는 약속을 어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처음 데려올 때 한 데나리온 주기로 약속하고 데려왔으니 약속대로 준 것이고, 늦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마음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방법대로 하자면, 분명히 잘못된 품삯계산 방법이지만, 이것이 심판날에 하나님이 우리와 하실 계산방법이라고 할 때,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의대로 하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세상의 윤리와 도덕 기준에서 착하게 산 사람이 사형 당하기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형수보다 우선적으로 천국에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던 한 유대인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옥행을 명하십니다. 그때 그가 눈을 들어 낙원을 쳐다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가 예수님 곁에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 저 자는 사람을 죽인 강도인데도 낙원에 들어갔는데, 매주 공회에 나가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잘한 저는 왜 지옥행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너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느냐? 너희 인간은 불완전하여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데, 저 사람은 바로 그 길을 택한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워놓은 가치판단과 공평의 척도를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기준대로 이행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義)-불의(不義)의 기준은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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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에서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을 강조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그릇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공평-불공평, 의-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불평합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고, 어찌하여 사람들을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20절에서 반문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하겠느뇨?”
바울은 하나님-인간, 즉,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그 진흙 한 덩이가 어떤 용도의 그릇으로 빚어질까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갖고있는 절대권(絶對權)을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을, 또 다른 한 덩이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더라도 이는 온전히 그의 소관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만든 그릇이 마음에 안들어서 부숴버리더라도 진흙 한 덩이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진흙덩이가 토기장이의 뜻을 거스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拒逆)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빚어지는 진흙덩이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의 용도(用途)에 따라 빚는 것이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이렇게 빚어달라 저렇게 빚어달라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10장 15절에서,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 있는 체 하는 우리의 모습이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내 뜻에 따라 오라 명하는 삶을 살려고 함을 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잘못된 믿음의 모습입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잇는 체 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와 다르신 것은,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이 귀히 쓸 그릇도 천히 쓸 그릇도 아닌, 볼품없이 잘못 만들어진 것일 때 그대로 부숴버리지만, 하나님은 그가 만든 인간이 귀한 것도 천한 것도 아닌-- 긍휼의 그릇이 아닌--잘못 만들어진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했습니다 (22절).
요나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하고 음란한 니느웨성의 사람들은 분명히 잘못만들어진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릇도 하나님은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사람들은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또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준비되었던 진노(震怒)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6-10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그를 떠나서 생활할 때, 하나님은 그 긍휼을 거두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긍휼의 그릇으로 예비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야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27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란 적다는 뉴앙스를 줍니다. 해서, 몰몬(Mormon)이나 말일성도(末日聖徒) 교회 교인들은 자기네 숫자에 들어오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란, 숫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께 있는 믿음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구원에 합당한 믿음이기는 합니까?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과연 얼마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통한 영광나라의 삶이 얼마나 확신 있게 실감됩니까?
설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믿음이 구원받기에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시더라도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도 어여쁘게 여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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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각각 진흙 한덩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의 목적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가진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시간이 많으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을 터인데 합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시간과 물질적 조건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물질이 주어져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그 금액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의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를 주님의 용도에 따라 주셨습니다. 어떤 이는 좀더 많이, 또 어떤 이는 좀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히 쓸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뚝배기는 뚝배기 나름대로 특별한 용도가 있듯이 천히 지음 받은 그릇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지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아니, 우리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니느웨성의 사람처럼 주님께 회개하고 나아감으로서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어떠한 그릇으로 지음 받았든지, 우리는 다 약하고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면--가난, 소수민족, 달란트 적음 등등--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것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단 둘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던 홀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20세쯤 되었는데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기에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의지하여 이제까지 그래도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이 세상을 떠났으니 오죽이나 딱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 홀어머니는 세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첫째는, “제가 외로울까봐 20년 동안 저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허락(許諾)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했고, 둘째는, 이 세상보다 더 평안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불러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고, 셋째는, ”아들로 인하여 제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식으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시험꺼리를 거두워 가시니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불평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불평을 하게되고 감사의 마음과 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나 감사꺼리가 넘친다고 합니다.
장미 꽃을 보면서 한 사람은 그 꽃이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찬미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가시가 많다고 불평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입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귀한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나 생각해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약속(約束)의 자녀” (로마서 9:1-18)
“약속(約束)의 자녀” (로마서 9:1-18)
1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는 65세이상의 연령층(年齡層)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을 것으로 전망(展望)합니다. 현재 사회가 조기은퇴(早期隱退)를 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21세기를 살 사람들이 해결해야할 커다란 사회문제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정된 일자리로 인한 조기은퇴를 장려할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와 환경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할 줄 믿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쇠약한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만 주어지면 70세 이상이 되어서도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12장에서, “너희는 청년의 때--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아직 기력이 있을 때에 그를 위해 힘써 일하라”고 권면하듯이, 우리의 청년 됨은 육체적 나이로 인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의지적 나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가 노인이라도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 작정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르는 청년의 삶을 사는 사람이요, 내가 젊은 사람이라도, “나는 주를 위해 살만한 의지와 시간이 없다”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대로 청년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로마서 12장 4절이하와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됨을 업수이여기고 전혀 일을 아니 하거나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할 때에 나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구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일을 감당할 때 자긍(自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는냐는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우님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있다고 하면,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교회가 감당 못할 일이 없음”을 인정하게될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연세가 많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아시고 담임목사님의 심방을 청합니다. 그리곤, 그 목사님께 작고 쇠약한 목소리로 말씀합니다: “목사님, 내가 매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여 우리 교회가 이만한데, 내가 이제 부르심을 받고 가야하니 교회가 걱정이 되는군요. 나를 대신하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기도의 용사를 마련하셔야 됩니다.” 이 권사님은 그 교회의 성장과 유지가 자신의 끊이지 않는 기도로 인함이었다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잘하여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한 줄 알았는데 그 권사님 말씀을 들으며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2
로마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8장은 교리적 부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즉,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교만의 마음으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심판과 죽음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었는데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의 육체를 지배하는 죄의 법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우리 앞에 고난이 놓여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위의 피조물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를 대적하거나, 송사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고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제외(除外)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장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권면하는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나의 형제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는데, 바울이 이와 같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함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흩으심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심이 아님을 바울이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비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가운데는 늘 그의 민족에 대한 기도와 간구로 가득 차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가까운 형제·친척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을 때, 이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모색하여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믿지않는 사람인데도 나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다 하면 나의 믿음 역시 잘못된 믿음이요 구원에 합당한, 영광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약속의 자녀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자녀 이삭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약속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민족의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75세쯤 되어 나이 많음으로 자녀를 잉태할 수 없을 줄로 알고 사라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육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자손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를 바울은 본문 11-12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보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의 역사로 받아들입니다. 곧,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 중 어리숙한 형 에서가 약삭빠른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됨은 에서가 장차 그 행위에 있어서 야곱보다 불의하기 때문에 그렇게 됨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들의 일생을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가운데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혹 이르되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하거나 불의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14절에서 반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의 기록이 아닙니다. 말라기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신 축복과 보응을 보고 기록한 결과적인 표현입니다.
주권적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더라도 다른 민족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왜, 하필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내가 보기에는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보다 내가 더 나아보이지만 못한 이스라엘을 택하였다고 내가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엿장수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엿장수가 같은 돈을 받고 엿을 줄 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준다고 해서 내가 돈을 낸 분량의 엿을 산 사람이 항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누구를 불쌍히 여기든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린 주권적 역사(役事)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간구하매 그에게 그의 등을 보게 하실 때, 출애굽기 33장 19절에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함대로, 또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달음박질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은혜와 긍휼을 베풂이 오직 주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과 생각대로 달음질한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함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1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자를 강퍅케 하시는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矜恤)히 여길 자만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퍅(剛愎)케 여길 자도 마음대로 결정하십니다.
3
오늘 말씀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은 우리 편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의미없는 존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 하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에서 떠난 삶을 살면서 아무리 달음질하고 아무리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원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신 계획과 섭리가 다른 것이었을지라도 우리의 겸손함과 간구를 보시고 혹시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실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돌이키시는 것도 주님의 권한 속에 있습니다. 해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8-19절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그릇이요, 악인은 심판을 베풀고자 작정하신 그릇이지만, 이들이 그에서 떠나 다른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시는 식언(食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약속에서 떠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든지 심판하시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미리 보시고 미리 아시는 주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뜻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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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는 65세이상의 연령층(年齡層)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을 것으로 전망(展望)합니다. 현재 사회가 조기은퇴(早期隱退)를 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21세기를 살 사람들이 해결해야할 커다란 사회문제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정된 일자리로 인한 조기은퇴를 장려할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와 환경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할 줄 믿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쇠약한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만 주어지면 70세 이상이 되어서도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12장에서, “너희는 청년의 때--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아직 기력이 있을 때에 그를 위해 힘써 일하라”고 권면하듯이, 우리의 청년 됨은 육체적 나이로 인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의지적 나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가 노인이라도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 작정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르는 청년의 삶을 사는 사람이요, 내가 젊은 사람이라도, “나는 주를 위해 살만한 의지와 시간이 없다”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대로 청년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로마서 12장 4절이하와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지체됨을 업수이여기고 전혀 일을 아니 하거나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할 때에 나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구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일을 감당할 때 자긍(自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는냐는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우님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있다고 하면,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교회가 감당 못할 일이 없음”을 인정하게될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연세가 많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아시고 담임목사님의 심방을 청합니다. 그리곤, 그 목사님께 작고 쇠약한 목소리로 말씀합니다: “목사님, 내가 매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여 우리 교회가 이만한데, 내가 이제 부르심을 받고 가야하니 교회가 걱정이 되는군요. 나를 대신하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기도의 용사를 마련하셔야 됩니다.” 이 권사님은 그 교회의 성장과 유지가 자신의 끊이지 않는 기도로 인함이었다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잘하여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한 줄 알았는데 그 권사님 말씀을 들으며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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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8장은 교리적 부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즉,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교만의 마음으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심판과 죽음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었는데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의 육체를 지배하는 죄의 법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우리 앞에 고난이 놓여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위의 피조물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를 대적하거나, 송사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고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제외(除外)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장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권면하는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나의 형제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는데, 바울이 이와 같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함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흩으심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심이 아님을 바울이 믿고있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비록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가운데는 늘 그의 민족에 대한 기도와 간구로 가득 차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가까운 형제·친척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을 때, 이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모색하여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믿지않는 사람인데도 나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다 하면 나의 믿음 역시 잘못된 믿음이요 구원에 합당한, 영광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약속의 자녀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자녀 이삭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약속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민족의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75세쯤 되어 나이 많음으로 자녀를 잉태할 수 없을 줄로 알고 사라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육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자손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를 바울은 본문 11-12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보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의 역사로 받아들입니다. 곧,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 중 어리숙한 형 에서가 약삭빠른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됨은 에서가 장차 그 행위에 있어서 야곱보다 불의하기 때문에 그렇게 됨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들의 일생을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가운데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혹 이르되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하거나 불의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14절에서 반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의 기록이 아닙니다. 말라기서 1장 2절에 있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신 축복과 보응을 보고 기록한 결과적인 표현입니다.
주권적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더라도 다른 민족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왜, 하필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내가 보기에는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보다 내가 더 나아보이지만 못한 이스라엘을 택하였다고 내가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엿장수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엿장수가 같은 돈을 받고 엿을 줄 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준다고 해서 내가 돈을 낸 분량의 엿을 산 사람이 항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누구를 불쌍히 여기든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린 주권적 역사(役事)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간구하매 그에게 그의 등을 보게 하실 때, 출애굽기 33장 19절에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함대로, 또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달음박질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은혜와 긍휼을 베풂이 오직 주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과 생각대로 달음질한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함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1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자를 강퍅케 하시는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矜恤)히 여길 자만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퍅(剛愎)케 여길 자도 마음대로 결정하십니다.
3
오늘 말씀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은 우리 편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의미없는 존재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 하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에서 떠난 삶을 살면서 아무리 달음질하고 아무리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원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신 계획과 섭리가 다른 것이었을지라도 우리의 겸손함과 간구를 보시고 혹시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뜻을 돌이키실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돌이키시는 것도 주님의 권한 속에 있습니다. 해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8-19절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그릇이요, 악인은 심판을 베풀고자 작정하신 그릇이지만, 이들이 그에서 떠나 다른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시는 식언(食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약속에서 떠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든지 심판하시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미리 보시고 미리 아시는 주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뜻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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