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2, 2018

나는 인애를 원하고 (호세아 6:1-6)

나는 인애를 원하고 (호세아 6:1-6)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매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1
신앙의 년 수를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다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여기 저기 읽은 것 다 합하면 한 번 읽은 것은 될걸요??
세상의 학문은 16년을 마치면 학사학위를 받습니다.
거기에 5-7년을 더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분야를 다 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기가 연구한 부분은 조금 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의 교육연한이 20여 년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 기간을 전심으로 연구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20여 년을 했다고 하고 그 중에 몇 년을 전심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했다고 하면 하나님을 아는데 박사가 되어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전체는 일평생 신앙생활을 잘하여도 알 수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어떤 삶을 우리에게 살아나가기를 원하시는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년 수는 자랑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지 않은 까닭은 아닐까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자신이 신앙의 대단한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꿨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나는 어거스틴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때 천사가 다가와 어거스틴을 자세히 보더니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어.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천사는 어거스틴에게 호통을 치며 다시 땅으로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이 놀라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그 꿈으로 인해 철저하게 회개하였으며 결국엔 성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몇 번 출석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안 되지만, 대강적 기준은 됩니다.
특별히 매 예배마다 잘 출석하던 사람이 빠지는 회수가 늘어남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구나’라고 짐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짐작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도님, 왜 요즘 교회출석이 뜸하여졌습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아 요즘 정신 없이 바쁘거든요. 좀 한가해지면 다시 나가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일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한가해지면 하는 여가선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바쁘게, 가장 힘써서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매여 사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바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입니까?
일정한 액수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까?
은퇴 후에 평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종착점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음’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하여 달리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삐 살아가는 이유가 인생의 은퇴 이후에 있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쁨이 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 중에 하나인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이 어느 신문과 인터뷰했습니다.
그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매일 매일 참으로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늘 한 가지 이상의 병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감기나 몸살 정도의 가벼운 병이 아니라 무슨무슨 암이나 고치기 어려운 병명들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집에 자리를 펴고 누워 요양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스스로 조금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매달려 고쳐달라고 간구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중병(?)에 든 몸으로 여전히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병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중심에 주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가장 시간을 할애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바쁘게, 최우선적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1-3절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회개이며 4-6절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십니다. 1-3절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르짖음은 철저한 회개 같으나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옴이 없는 불성실하고 잠간뿐인 입술만의 뉘우침이었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5장 15절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한 다음에 6장 1절 이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르짖는 회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문제는 뉘우치기는 잘하는데 고침이 없음입니다.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다음엔 정말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다음에 후회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슙’의 뜻은 ‘돌아오다, 돌아가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罪)’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회개(悔改)’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의(義)’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뉘우침과 고침이 있습니다. 뉘우침이 진행하던 죄의 길을 멈추게 하고, 고침이 진행하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할 때 시편 23편 3절에서 다윗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한 것 같이 영혼의 소생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죄 짓는 삶을 살 때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을 찢으시고 치시기도 하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도로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여호와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의 역사는 속히 임합니다.
“이틀”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을 구원하시고 소생시키심입니다.
“제삼일”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 모티브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그들을 소생시키기에 필요한 기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일으키실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알되 힘써 전심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변개함이 없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되 마른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그렇게 촉촉이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고 하나님을 힘써 알겠다고 입술로는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죄 가운데 방황(彷徨)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물으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셔서 물으시는 물음이 아닙니다.
에브라임--곧 이스라엘이, 유다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힘써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들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늦은 비와 같이 임할 터인데, 그들의 진실이 없는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안타깝게 합니다.

4절과 6절에 나오는 “인애(仁愛)”는 히브리어 헷세드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지속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고있는 사랑은 일시적(一時的)이고 변덕(變德)스러우며 쉬 없어지는, 모양(模樣)만이 있는 아침구름이나 이슬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는 한결같은 것인데,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침과 저녁 때가 다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생활에서, 혹은 남녀의 연애에서 한편이 이와 같을 때,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戀愛)는 곧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입으로 반복하나,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이는 모양(模樣)만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 작은 자를 긍휼(矜恤)로 대함으로서 확증(確證)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5절: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가 없는 백성들을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하고, 하나님을 힘써 알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로 향한 신실함이 없고 여전히 세상의 우상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와 인애가 없는 백성을 말씀으로 치시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좇을 것인지 세상의 우상인 바알을 좇을 것인지 결단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서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무엇을 좇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이 세상임금인 사단에게 더 많이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한결같은 인애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그 자체를 원치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제사는 인애와 긍휼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의미는 잊어버린 채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열납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첫 소산(所産)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드렸기에 이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와 번제의 제사를 드리지만, 그 안에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회개가 없고, 하나님과 화목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獻身)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 자신이 물질이 궁하셔서 그것으로 생계(生計)를 유지하셔야 하기에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사에 앞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형제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머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전부를--인격과 자랑까지도 다 바치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禮拜)니라”고 말씀합니다. 몸이라 함은 우리의 인격과 품성을 포함한 우리의 전부(全部)입니다. 곧, 우리의 인격과 자랑과 마음과 모두를 다 주님께 내어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예와 같이 낮아져서 우리의 사는 삶을 통하여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로마서 12장 2절에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삶”입니다.

6절 후반에서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그분께 헌신과 결단의 표시인 번제를 드리는 것은, 누구의 결혼식인지도 몰고 참석하여 덩달아 기뻐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누구의 초상(初喪)인지도 모르면서 참석하여 밤새도록 우는 사람의 모양이며,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부처님을 찾고 있는 자의 어리석음입니다.

히브리어의 '알다'(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귀는 것'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과의 사귐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을 체험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쉽게쉽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그려놓은 하나님의 허상을 바라봄이며 이를 위하여 제사 드림입니다.

3
음란(淫亂)하고 부정(不貞)한 이스라엘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변챦고 한결같은 신실한 인애-긍휼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제사만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사는 우리 속에 거짓된 마음이 없이 겸허하고 낮아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상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Sunday, July 1, 2018

데살로니가후서를 마치면서 (살후 3:16-18)

데살로니가후서를 마치면서 (살후 3:16-18)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1
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 속에서 조난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배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의 그 배는 많은 사람들을 태운 채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지르고 구조를 요청하며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이어야 할 터인데 겁에 질리기는커녕 여유 있고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림 속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배의 선장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평안은 주변 환경이 순조로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평강의 하나님인데서 오는 것입니다.

찬송가 작사자 스파포드(H. G. Spafford)는 시카고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사건이 있은 직후에 그는 상심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럽여행을 계획하였으나 자신은 화재를 당한 무디 교회를 보살피기 위하여 남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부인과 네 딸을 실은 여객선이 영국 배와 충돌하여 그의 부인과 네 딸을 포함하여 승객 226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찢어질 듯한 마음의 아픔을 느꼈지만 이내 신앙으로 극복하고 찬송가 470장을 작사하였습니다: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3.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눈보다도 더 정하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4.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다윗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도 그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하나님은 많은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매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사랑으로 역사하시매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매 “생명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소망되시매 “소망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매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매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매 “평강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로마서 15장 5절에서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영어성경은 인내(perseverance) 대신에 “steadfastness"(RSV)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한결같으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변함 없이 한결같으심으로 오래 참으시고 연약한 우리를 책망하시기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하고 불완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낙담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바라보매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는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요,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慰勞)”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는 ‘용기를 돋우어주다’, ‘도와주다’, ‘위로하다’, ‘(대신) 요청하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보혜사(Helper) 성령께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입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위로자(Comforter)--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여호와 삼마”(Jehovah is there, 에스겔 48:35)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매, 우리가 세상의 일로 번민하거나 미혹되지 아니하므로 “온전히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신 평안(평화 또는 화평)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어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그러나 곧 잃을까봐 불안한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보장받은 자의, 동록이나 도둑이 침입할 수 없는 하늘창고에 보화를 쌓는 사람의 뿌듯하고 영속적인 마음의 평안입니다.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그 가운데 갖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천국 백성의 평안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에서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든든함이 없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불안하여 함은 하나님께서 혹 안 계신 것이 아닌가 또는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험한 산길을 갈 때에나 깊은 골짜기를 갈 때에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만 한다면 이 사람은 불안하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쫓김과 고통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확신을 주십니다.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바울의 육체적 조건이 열악(劣惡)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를 쓸 때 바울의 나이가 55-60세쯤 되었습니다. 지금은 60세가 장년의 나이요 한참 일할 때지만 바울 당시에는 노인의 나이로 배나 육로로 여행하기에는 적잖이 힘든 나이였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바울은 눈이 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행전 9:18), 이후로 그의 눈은 성치 못하고 쉬 피로하고, 눈물이 나고, 글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갈 4:15 참조).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보는 바 대로 이 문제(“육체에 가시”, 고후 12:7; “육체의 약함”, 갈 4:13 참조)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역사하신 “예수님의 흔적”이기에(갈 6:17) 그는 육체적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눈이 이와 같기에 그의 편지는 대서(代書)되어집니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했고(롬 16:22), 고린도전서는 소스데네가 대서했습니다(고전 1:1). 그러나, 바울은 편지들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보이고 또한 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마지막 부분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도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여건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바울만큼 좋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데 눈이 성치 못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을 때 그가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봉사를 잘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정들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 이래서’, ‘나는 무엇이 저래서’ ...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사정이 정말 어려워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바 은혜는 큰 것이라도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고 남이 섭섭하게 대한 것, 나에 대해 해를 가한 것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 기억하여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free gift)이기에 우리는 하찮게 여기거나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없다”는 것은 하찮은(valueless)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priceless) 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은혜이기에 우리는 이를 마음 판에 새기고 오래오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사랑의 빛에 노출되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reflect)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이제 다시 그 은혜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삶에 평안이 있습니까?
더욱 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불안하여 평안을 느끼지 못합니까?
평강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불안함과 초조함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과 주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힘쓰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